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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심한 삘릴리 Jul 03. 2021

따로 또 같이 프로방스를 걷다

7편

                                                         6     


 엄마에게 엽서가 온 날, 미양은 약국에서 임신테스트기를 샀다. 생리가 끊긴 지 보름이 넘었다. 전혀 임신일 거로 생각하지 않았다. 조금만 신경을 써도 소화 장애가 생기고 생리불순이 나타나는 체질이라 그러려니 했다. 엄마 때문에 생긴 스트레스의 후유증일지도 모른다고 여겼다. 그런데 점심 메뉴로 선택한 된장찌개와 마주하자 헛구역질이 나면서 냄새도 맡기 싫어졌다. 느낌이 이상했다.      

 임신테스트기를 확인한 미양은 화장실에 쪼그리고 앉아서 울었다. 

 테스트기의 선명한 두 줄을 확인하는 순간 엄마가 곁에 없다는 사실이 서러웠다. 엄마도 없이 출산준비를 하고 아기를 낳을 일이 겁나고 무서웠다. 

 그녀가 아무리 못되게 굴어도 다 받아주던 엄마, 그녀가 왜 어떤 일로 화가 났는지 헤아려주던 엄마가 보고 싶었다. 미양이 짜증을 부릴 때마다, 그녀에게 ‘나중에 너랑 똑같은 딸을 낳아보라’고 말하며 돌아서던 엄마의 쓸쓸한 등이 그리웠다. 

  며칠 동안 엄마의 엽서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미양은 휴가신청서를 작성했다. 

 부장은 한창 바쁠 때 휴가를 낸다고 눈을 흘겼다. 미양의 남편은 임신 초기의 아내를 걱정했다. 오랜 시간 비행을 견뎌내며 엄마를 찾아 나서는 아내를 안쓰러워했다. 그리고 일이 바빠서 아내와 동행하지 못하는 것을 미안해했다.      


 기차역에서 그렇게 헤어진 후, 데니와 미양의 사이에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데니의 표정은 침울했고 그녀에게 시선도 주지 않았다. 멍하니 다른 곳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데니와 자연스럽게 친해질 것을 기대했던 미양은 실의에 찼다. 실연을 당한 것 같았다. 무심하고 차가운 눈빛의 데니는 이제 기차 안에서 그녀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던 남자가 아니었다. 이미 그에게 마음을 빼앗긴 미양은 하루하루가 버거웠다. 그에게 빼앗긴 마음을 되찾아오는 길을 잃어버린 후, 그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갔고 크리스마스 방학이 시작됐다.      

 미양의 일상은 폭풍전야처럼 고요했다.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출장으로 스페인 여행이 취소됐다. 일상은 단조로웠다. 종일 공부하다가 저녁 무렵에 엄마와 함께 시내로 산책하러 나가는 것이 전부였다. 

 엄마는 크리스마스 장식을 한 엑상프로방스의 밤거리를 좋아했다. 조명이 빛을 발하며 만들어내는 거리의 풍경은 정말 사랑스러웠다. 

 미라보 거리를 따라 장난감 집처럼 들어선 크리스마스 마쉐에는 진기하고 예쁜 물건들이 가득했고 달콤한 음식 냄새가 흘러나왔다. 아이들은 회전목마를 타며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아름다운 조명이 반짝이는 미라보 거리의 카페와 레스토랑은 손님들로 넘쳐났다. 

 아버지의 부재로 자유로워진 모녀는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기도 하고, 크리스마스 마쉐에서 뜨거운 포도주 방쇼를 사서 홀짝이기도 했다.      

 그날도 미양은 카페에서 엄마와 저녁을 먹고 있었다. 크리스마스를 이틀 앞둔 거리는 축제의 절정에 달했다. 카페에 앉아 밤거리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시간이었다. 밤공기가 쌀쌀했다. 엄마는 테라스에서 밥을 먹자고 고집을 부리더니 분홍빛 로제 와인을 시켰다. 미양은 남편의 부재를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며 즐기는 엄마가 싫지 않았다. 

 아마 그때가 프로방스에서 유일하게 엄마와 함께했던 행복한 순간이었던 것 같다.      

 그 순간, 데니가 미양의 가슴으로 들어왔다. 우연히 고개를 돌리던 미양은 침울한 얼굴로 미라보 거리에 서 있는 그를 보았다. 그는 가슴 가득 꽃다발을 안고 온천 분수를 바라보다가 그 자리에 꽃다발을 내려놓았다. 

 곧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얼굴이었다. 엄숙한 표정은 문상객처럼 음울했다. 카페테라스의 손님들은 물론이고 거리를 걷던 사람들도 온천 분수에 꽃을 헌화하는 그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데니는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 자리에 망부석처럼 서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데니가 천천히 온천 분수에서 몸을 돌렸다. 엄마에게 들키지 않으려 애쓰며 그를 흘끔거리던 미양은 후두두 떨어지는 그의 눈물을 보고 말았다. 순간 가슴이 시큰해졌다. 데니에게 품었던 서운함은 어느새 사라졌다. 멀어져 가는 그의 등을 따뜻하게 안아주고 위로해주고 싶은 마음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미양은 귀신에 홀린 듯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따라나섰다. 그녀를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무작정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골목길로 들어서는 그의 등이 흐느끼고 있었다. 박제된 슬픔이 처량하게 그를 감쌌다. 홀린 듯 그를 따라 걷던 미양의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의 이름을 부르고 싶은데 목이 멨다. 

 시청 앞 광장을 지나 성 소뵈르 성당으로 가는 길로 접어들 무렵, 그의 걸음이 느려졌다. 몇 걸음만 걸으면 그를 따라잡을 것 같았다. 미양은 잠시 주춤했다. 그와 마주하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나지 않았다. 그의 등을 안아주겠다던 치기도 허망했다. 

 아쉐베쉐 광장을 지나던 데니가 무언가를 의식한 듯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은은한 크리스마스 조명에 비친 그의 얼굴은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 


 “너였구나.”


 미양을 알아본 데니의 얼굴에 오묘한 감정이 뒤엉켰다. 슬픔의 바다에서 기쁨을 건져낸 얼굴 같기도 하고 사막의 홀로 걷는 나그네 같기도 했다. 그가 천천히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심장이 멈추는 것 같은 둔탁한 아픔이 느껴졌다. 


 “데니, 나는, 나는 말이야…”


 미양은 그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냥 슬퍼 보이는 네 등을 가만히 안아주고 싶었다, 는 말이 입안을 맴돌았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대신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데니는 가만히 미양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우주를 유영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입을 맞췄다. 첫 키스였다. 

 온몸의 힘이 풀리면서 정신이 몽롱해졌다. 달콤하고 쌉싸름한 초콜릿을 입 안 가득 베어 문 느낌이었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고 하늘로 둥둥 떠오르는 아련함이 몰려왔다. 머릿속이 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해지면서 그를 만나기 위한 운명이 그녀를 이곳으로 이끌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울고 있었다. 그녀의 혼까지 빨아들일 듯 키스를 하는 동안에도 울고 있었다. 키스가 끝나자 미양은 탈진해서 쓰러질 것 같았다. 데니는 그런 그녀를 숨 막히게 끌어안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오늘, 엄마가 돌아가신 지 2주기 되는 날이야. 너, 우리 엄마랑 정말… 정말 많이 닮았어.”   


<8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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