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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심한 삘릴리 Jul 02. 2021

따로 또 같이 프로방스를 걷다

6편

                                                  5

                          5월 20엑상프로방스


  미양은 인포메이션센터에서 받은 지도를 들고 구시가지 골목길로 들어선다. 카페와 레스토랑 그리고 크고 작은 부티크들이 늘어선 골목길은 미라보 거리와 다른 풍경이다. 예전에 이 길을 걸었던 것 같다. 골목길은 어딘지 익숙하면서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녀는 아리아드네가 준 실타래를 들고 미궁으로 들어가는 테세우스처럼 지도를 꽉 움켜잡는다. 지도만 있으면 길을 잃을 걱정은 없다. 미양은 크게 심호흡을 하고 엑상프로방스 골목길 산책을 나선다. 골목골목 이어지는 길이 정겹다. 3백 년이 넘은 건물들이 고풍스레 서 있다. 미양은 천천히 걸으며 주위를 둘러본다. 골목길이 품고 있는 아름다움이 오감으로 느껴진다. 

  미양은 골목길을 지나 시청 앞 광장으로 접어든다. 햇살이 쏟아지는 광장에서 현악 4중주 연주가 한창이다. 사람들은 카페에 앉아 음악을 들으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다. 미양의 발길이 저절로 카페로 향한다. 엄마를 찾는 일은 잠시 잊고, 카페에 앉아 연주를 듣고 싶어 진다. 

  햇살이 그녀의 머리를, 어깨를 지나 등 뒤로 부드럽게 쏟아진다. 미양은 커피를 마시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시청 시계탑 근처에서 사진을 찍는 여행자들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길을 걷는 사람들의 시선이 카페로 향하는 순간 카페에 앉은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눈길이 마주친다. 마주치는 눈빛 속에는 따뜻한 애정이 담겨있다. 

 그 시절, 미양과 데니가 애정 어린 시선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던 것처럼.   

   

  “네가 많이 보고 싶을 거야.”


  로잘린이 미양을 와락 껴안으며 말했다. 


  “겨우 3주일인데 뭐.”


  말은 이렇게 했지만, 미양도 서운했다. 곧 크리스마스 방학인데 로잘린 없이 방학을 보낼 일이 막막했다. 그 사이 데니를 향한 로잘린의 사랑은 덤덤해졌다. 짝사랑의 아련한 감정을 못 이겨 훌쩍거리며 미양에게 하소연하는 일도 줄어들었다. 더불어 미양의 마음도 가벼워졌다. 로잘린은 크리스마스 방학 동안 데니를 못 보는 것보다 미양과 헤어질 일을 더 아쉬워했다. 우정이 짝사랑을 이긴 것 같다며 수줍게 웃기도 했다. 

  크리스마스 방학을 앞두고 로잘린은 필라델피아에 있는 할머니네로 휴가를 떠났다. 매년 크리스마스를 온 가족이 함께 보내는 것이 로잘린네 가족의 전통이었다. 


  방학 일주일 전, 학교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미국이나 캐나다에서 온 아이들은 로잘린처럼 방학을 앞당겨 고국으로 크리스마스를 보내러 갔고, 프랑스 아이들은 여행을 핑계로 결석했다.  

  아이들이 떠난 교실은 휑했다. 그나마 데니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데니는 미양에게 따뜻한 눈빛을 보내거나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철 지난 바닷가처럼 썰렁해진 스쿨버스에서도 그랬다. 미양은 등굣길 스쿨버스를 타면서 혹시나 하는 기대에 부풀었다. 늘 미양의 옆자리에 앉던 로잘린이 결석했으니 혹시 그가 옆에 앉을지도 모를 것 같았다. 데니는 미양의 존재를 잊은 사람처럼 그녀를 스쳐지나 뒷자리로 갔다. 미양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날따라 수업이 일찍 끝났다. 아이들이 없어서 정상적인 수업이 힘들었다. 스쿨버스가 오려면 두 시간이나 기다려야 했다. 새삼 로잘린의 부재가 아쉬웠다.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도 모두 떠난 터라 외로웠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리도 복잡했다. 

 해결책은 단 하나. 어려운 수학 문제를 푸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미양은 수학을 잘했다. 복잡한 수학 문제를 풀다 보면 스트레스도 함께 풀렸고, 외롭고 쓸쓸하던 마음도 사라졌다. 미양은 수학책을 꺼내 들고 빈 강의실로 스며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수학 문제를 푸느라 집중하던 미양은 시계를 보고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벌써 스쿨버스가 떠난 시간이었다. 

 미양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어떻게 집으로 돌아갈지 몰랐다. 매일 스쿨버스만 타고 다녀서 학교에서 집까지 얼마나 먼지, 집으로 가려면 어떤 버스를 어디서 어떻게 타야 하는지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갑자기 초등학교 1학년 때, 수영장 셔틀버스를 놓치고 울면서 집까지 뛰어가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는 집이 어딘지, 수영장과 집이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는 알고 있었다. 

  당황한 미양은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엄마는 차가 없다. 도움이 못 될 거라는 생각에 짜증이 났다. 그래도 기댈 사람은 엄마밖에 없었다. 


  “학교 앞 버스정류장이 어디 있는지 알지?” 

  “버스정류장? 어, 어딨더라…”

  “왜, 교문 들어가는 입구에 말이야.”

  “아! 거기…”


  미양의 목소리가 두려움으로 살짝 떨렸다.


  “거기서 버스를 타고 가르당느 기차역에서 내리렴.”

  “또 기차를 타라고? 집으로 바로 가는 버스는 없어?”


  이번에는 미양의 목소리에 짜증이 묻어났다.


  “엄마도 잘 모르겠어. 아마 없을 거야. 하여튼 가르당느역에서 엑상프로방스로 가는 기차를 타. 엄마가 기차 시간 찾아보고, 기차역으로 마중 나갈게.” 


  엄마의 목소리는 침착했다. 차근차근한 엄마의 설명을 듣는 동안 미양의 마음도 차분해졌다. 만약 수영장 셔틀버스를 놓쳤을 때 지금처럼 엄마에게 전화했더라면 공포에 젖어 울면서 집까지 달려가지 않았을 텐데, 하는 후회가 들었다.      

  버스에 오른 미양은 출입문과 가까운 곳에 자리 잡고 앉았다. 엄마가 알려준 가르당느역까지 얼마나 먼지, 어디서 내려야 하는지 알 수 없어서 불안했다. 

  그때 익숙한 시선이 느껴졌다. 습관처럼 고개를 돌리던 미양은 데니와 눈이 마주쳤다. 데니와 같은 버스를 탔어. 미양은 안도의 숨을 쉬었다. 가슴도 콩닥거렸다. 사막을 헤매다 오아시스를 만난 것처럼 기뻤다. 

  이런 마음과 달리 그에게 말을 걸 용기가 나지 않았다. 가르당느역이 어딘지, 어디서 버스를 내려야 하는지 알려달라는 말이 입안에서만 맴돌았다. 처음 타보는 프로방스 버스는 안내방송도 없었다. 하긴 방송이 나왔어도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미양은 버스가 멈출 때마다 고개를 빼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다섯 번째 정류장이야.”


  데니가 미양 곁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미양이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다섯 번째 정류장이면 어디지? 지금까지 지나온 버스정류장을 세느라 미양이 허둥거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버스가 멈춰 섰다. 


  “지금이야.”


  데니가 와락 미양의 손을 잡고 버스에서 내렸다. 조건반사처럼 미양의 손바닥에 땀이 고였다. 


  “기차가 들어오고 있어. 뛰자!”


  그는 미양의 손을 잡고 정신없이 기차역을 향해 뛰었다. 정신이 혼미해지고 숨이 가빠왔다. 그들이 가르당느역으로 뛰어들자 엑상프로방스로 가는 기차가 들어서고 있었다. 미양은 표를 살 겨를도 없이 데니에게 이끌려 기차를 탔다. 

  출발하는 기차에 겨우 올라탄 두 사람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짧은 순간 그의 얼굴에 미소가 스쳤다. 끓는 물과 얼음이 뒤섞이는 미소였다. 미양의 가슴이 떨려왔다. 

  잠시 적막이 흘렀고 그제야 미양은 그와 잡고 있는 손이 어색해졌다. 그녀가 살짝 손을 빼려고 하자 데니는 잡은 손에 더 힘을 주었다. 미양은 탄식처럼 흘러나오는 한숨을 삼켰다. 가벼운 현기증이 일었다. 잡은 손의 의미를 알고 싶었다. 고집스레 그녀의 손을 놓지 않으려는 데니의 마음이 궁금했다. 그동안 그녀에게 보내온 눈길의 의미도 같은 뜻이 분명한데 말하지 못한 진실처럼 침묵에 갇혀있다. 답답했다.     


  “저기 보이는 산이 생트 빅투아르 산이야.”


  데니의 눈길이 창밖을 향했다. 흰 석회암 덩어리가 불쑥 솟은 것 같은 경이로움이 차창을 따라 흘러갔다. 세잔이 그려서 유명해졌다는 생트 빅투아르 산. 미양도 알고 있는 곳이었다. 


  “일요일마다 아빠랑 저 산엘 오르고 있어.”

  “우리 집 근처에 저 산을 바라볼 수 있는 곳이 있어. 레 로브라고.”

  “아. 거기? 그곳에서 보는 산의 모습은 좀 다르지?”

  “어.”


  생트 빅투아르를 이야기하는 동안에도 데니는 미양의 손을 놓지 않았다. 주제를 벗어나 빙빙 도는 이야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미양도 왜 그동안 자신을 바라보았는지, 지금 이렇게 손을 잡고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 묻지 못했다. 기차가 엑상프로방스 역에 도착할 때까지 그는 미양의 손을 놓지 않았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어렴풋이 무언가 알 것 같았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으나 그 마음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 기차가 엑상프로방스 역으로 들어서자 미양의 입에서 가벼운 한숨이 흘러나왔다. 데니와 함께 있고 싶은데 핑계가 없었다. 

  곧 크리스마스 방학인데 그는 미양에게 방학 때 무엇을 할 건지 묻지 않았고, 만나자는 말도 하지 않았다. 기차에서 내린 두 사람은 아쉬운 얼굴로 마주 섰다. 데니가 잡고 있던 손을 풀어주었다. 


  “잘 가.”


  짧은 인사말과 함께 그가 돌아섰다. 미양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하늘을 나는 양탄자를 타고 구름 위를 날다가 갑자기 추락한 기분이었다. 왠지 모를 서운함에 코끝이 찡해졌다. 


  “미양아!”


  등 뒤에서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였다. 깜짝 놀라 돌아선 그녀는 사람들 틈에서 자신을 찾던 엄마와 마주쳤다. 순간 서러움이 폭풍처럼 밀려왔다. 

  엄마… 미양은 길을 잃고 헤매던 아이처럼 엄마 품으로 달려가 안겼다. 


<7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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