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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심한 삘릴리 Jul 02. 2021

따로 또 같이 프로방스를 걷다

5편

 “넌, 덥지도 않니?”


  습관처럼 로잘린이 양손으로 가슴을 끌어올리며 미양에게 눈짓을 보냈다. 

  85 D컵. 풍만한 그녀의 가슴이 브이라인으로 깊게 파인 블라우스 안에서 여유로운 미소를 보내왔다. 목까지 올라오는 티셔츠를 입은 미양의 납작 가슴이 부끄러움으로 움츠러들었다. 오늘따라 몸에 꼭 붙는 스판덱스 러닝을 입었으니 안 그래도 발육이 늦은 미양의 가슴이 더 작아 보였다. 

  이상했다. 서울에서는 가슴이 크건 적건 관심 없었다. 화장한 적도 없었고, 교복을 줄여 입으며 멋 내기를 한 적도 없었는데, 이곳에서 미양은 자꾸 외모에 신경이 쓰였다. 가슴골이 드러나는 여자아이들의 원피스와 짙은 화장이 그녀의 신경을 자극했다. 

  자유분방한 학교 분위기는 더 혼란스러웠다. 상상도 못 했던 일들이 학교 안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운동장 곳곳에는 자연스럽게 담배를 피우는 아이들이 수두룩했다. 사랑에 빠진 커플들의 애정행각도 자유로웠다. 커플들은 어디에서건 가리지 않고 거침없이 껴안고 키스를 했다. 아침 등굣길에 커플들의 딮키스를 바라보기가 민망해서 미양은 교실 밖에서 한참 서 있기도 했었다. 

  한국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들이 이곳에서는 자연스러웠다. 그 상황이 혼란스러웠다. 프랑스에서 받은 문화적인 충격은 한국에서 나고 자란 14살 소녀가 감당하기에 너무 컸다.


  로잘린은 달랐다. 미양이 커플들의 애정행각에 얼굴이 빨개져서 눈을 어디에 둘지 몰라 허둥거릴 때마다 그녀를 촌스럽다며 놀렸다. 


  “졸리면 자고 싶고, 배고프면 먹고 싶지?”

  “당연하지.” 

  “그거랑 똑같아. 사랑하면 안고 싶고, 키스하고 싶은 거라고.”

  “그렇지만 모든 행동은 때와 장소가 있는 거야. 졸린다고 길에서 잘 수는 없잖아”

  “미양. 사랑은 이성적이지 않아. 본능처럼 편해야 하는 거야.”

  “본능? 너한테 본능이 뭔데?”

  “그냥 하고 싶은 걸 하는 거야. 나를 억누르지 않는 것.”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남의 시선이 무슨 상관이야?”


  미양은 로잘린의 당당함이 부러웠다. 본능을 억누르기보다 존중한다는 그녀가 다른 세상 사람 같았다. 하긴 미양은 14년간 그들과 다른 문화권에서 다른 세상을 살아왔다. 그들과의 차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정신건강을 위해서도 좋을 것이다. 


  미양은 학교생활에 익숙해졌다. 로잘린의 우정에 기대서 함께 몰려다니는 친구들도 생겼다. 로잘린의 집에 초대를 받기도 했고, 로잘린과 엑상프로방스 시내에서 만나 쇼핑을 하기도 했다. 14살 사춘기 소녀답게 그녀들의 수다는 그칠 줄 모르고 계속됐다. 대화의 80%는 물론 데니에 관한 것이었다. 미양은 로잘린을 통해서 매일 데니를 만나는 느낌이었다. 

  로잘린은 데니가 여자들에게 관심이 없다는 것이 불만이었다. 청교도적인 아이라는 표현을 썼다. 

  데니가 청교도적인 아이라고? 미양은 이해할 수 없었다. 가끔 그녀를 바라보는 데니의 시선이 애절하게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누군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돌아보면 그곳에 늘 그가 있었다. 물론 로잘린에게 말하지 못했다. 데니가 미양에게 보내는 미묘한 신호를.  


  “너, 좋아하는 아이 있어?”


  데니 이야기에 지친 로잘린이 물었다. 


  “아니”


  미양의 목소리가 저절로 커졌다. 마음을 감추려는 강한 부정이었다.

  로잘린은 그럼 그렇지 하는 안심의 눈빛으로 미양을 바라보며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듯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데니를 사랑하고부터 다른 남자들이 눈에 차지 않는다고. 미국에서 사귀던 남자 친구와 헤어진 것도 사실은 데니 때문이었다고.

  로잘린의 짝사랑은 나날이 깊어갔다. 가슴 시린 사랑의 상처는 그녀의 감정을 양극화시켰다. 데니의 무심한 말 한마디에 하늘을 날 듯 행복해하다가 그의 완고한 등이 보내는 쓸쓸함에 눌려 우울해했다. 로잘린의 마음이 깊어질수록 미양은 바늘방석에 앉은 사람처럼 불편해졌다. 때때로 파고드는 데니의 비밀스러운 시선이 미양을 들뜨게 했기 때문이었다.      

  며칠 전, 스쿨버스에서 미양은 데니와 나란히 앉게 되었다. 로잘린이 결석했던 날이었다. 미양보다 늦게 버스에 오른 데니가 털썩 소리를 내며 미양의 옆자리에 앉았다. 

  소피아의 날카로운 시선이 미양을 향했다. 곧이어 여자아이들의 수군거림이 이어졌다. 당황한 미양과 달리 데니는 평온한 얼굴이었다. 그는 의자에 깊숙이 앉아 눈을 감았다. 웅성거리던 소리가 줄어들었다. 미양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데니처럼 태연한 척 애를 썼지만, 심장이 지르는 비명이 밖으로 새어 나올까 걱정됐다. 미양은 얼른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버스가 출발했다. 프로방스 햇살이 눈부시게 차창에 부딪혔다. 키다리 사이프러스 나무가 흔들흔들 춤을 추며 지나갔다. 가슴이 너무 떨려서 미양은 평범한 일상 같은 풍경들과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눈을 질끈 감고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때 감미로운 샹송이 들려왔다. 기분 좋은 잠에서 막 깨어난 것 같은 아련함이 묻어있는 노래였다. 미양의 놀란 눈이 데니를 향했다. 그녀의 귀에 이어폰을 꽂아준 데니는 태연하게 눈을 감고 있었다. 미양은 도둑고양이처럼 그의 옆모습을 슬금슬금 훔쳐보았다. 완벽해서 살짝만 부딪쳐도 깨질 것 같은 외모였다. 

  노래를 듣는 내내 미양의 가슴이 두방망이질 쳤다. 처음 듣는 샹송은 나른한 행복감을 불러왔다. 설탕을 진하게 넣은 얼그레이 티처럼 달콤하게 그녀를 적셨다. 시를 읊조리는 듯한 노랫소리에 그녀의 가슴이 떨려왔다. 


  “조르주 무스타키 야.”


  샹송이 끝나자 데니가 이어폰을 빼가며 속삭이듯 말했다. 


  “노래 제목이?”

  “가수 이름.”


  데니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얼른 메모지와 펜을 꺼냈다. 

  Georges Moustaki ‘Il est trop tard(It’s too late)’라고 쓴 메모지를 미양에게 건넸다. 조르주 무스타키, 너무 늦었어요. 미양은 메모지와 데니를 번갈아 보았다. 시를 낭송하듯 조용히 속삭이며 노래하던 목소리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미양이 용기를 내서 말을 꺼내려는 순간 스쿨버스가 학교에 도착했다.  

  그날 이후 미양은 데니의 시선 속에 무언가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착각이 아니었다. 분명 그는 미양에게 관심이 있었다. 가슴 떨리는 일이었다. 한편으로 친구를 배신하는 것 같은 미안한 일이었다. 그를 향한 로잘린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데니와 절대로 가까워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도 들었다. 한 남자를 두고 친한 친구와 치정으로 얽힐 수는 없지 않은가.      

  로잘린은 생각보다 둔했다. 아니 방심한 것인지도 몰랐다. 늘 미양과 붙어 다니면서 데니가 미양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소피아가 데니의 변화를 눈치채고 미양을 경계했다. 

  우정을 위해서 그를 향한 마음을 포기해야 하는데 잘되지 않았다. 흐르는 강물을 거스를 수 없는 것처럼 그를 향해 흘러가는 마음을 막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남자 친구를 사귄 적 없었고, 또래 친구들처럼 연예인에게 열광해 본 적 없던 미양에게 이런 감정은 너무 버거웠다. 견디기 힘들었다. 

  미양은 자신에게 찾아온 이 변화의 정체를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로잘린처럼 혼자서 꿈꾸는 사랑일지 몰라도 그녀에게는 소중했다. 너무 소중해서 그 누구에게도 보여 줄 수 없었다.      

<6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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