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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심한 삘릴리 Jul 01. 2021

따로 또 같이 프로방스를 걷다

4편


                                                 4

                            5월 20엑상프로방스 


  인포메이션센터 직원이 상냥하게 웃으며 주말에 있을 축제를 알려준다. 엑상프로방스는 거의 일 년 내내 크고 작은 축제가 열리는 도시라며, 주말에 열리는 축제에 꼭 참석하라는 당부를 한다. 그러면서 미양에게 두 가지 지도를 내민다. 

  하나는 엑상프로방스 가이드 지도고 다른 하나는 엑상프로방스가 낳은 세계적인 화가 세잔의 지도다. 세잔이 태어난 집과 그가 즐겨 다니던 카페 그리고 그가 그림을 그리던 아틀리에가 표시되어 있다. 이런 지도도 있었다니. 엑상프로방스는 마치 세잔을 위해 존재하는 도시 같다.  

  신기한 듯 지도를 들여다보던 미양이 엄마가 보낸 엽서를 꺼내 든다. 엄마가 사는 곳을 지도에 표시해 달라고 하자, 직원은 친절하게 차근차근 형광펜으로 길 표시를 해 준다. 법원 건물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미양은 곧 엄마를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에 부풀어 새벽하늘을 가르며 열기구를 타는 것처럼 기분이 좋아진다.      

  인포메이션센터를 나선 미양은 거대한 분수가 햇빛에 반짝이는 호똥드 광장으로 들어선다. 차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이어지는 호똥드 로터리 한구석에 세잔의 동상이 서 있다. 사진 속에서 만났던 세잔보다 키 크고 야윈 모습이다. 화구를 메고 지팡이를 짚은 그의 발길은 생트 빅투아르 산을 향하고 있다. 

  미양은 자신에게 묻는다. 그녀가 살았던 시절에도 세잔의 동상이 이곳에 있었는지… 잘 모르겠다. 기억이 전혀 나지 않는다. 세잔은 물론이고 그녀가 이곳에 살았던 기억조차 흐릿하다. 오직 한 사람. 상처로 남았던 그의 존재만이 또렷하게 떠오른다. 

  14년 전, 그녀의 삶을 뿌리째 흔들어 놓았던… 대리석 조각처럼 투명하고 아름다웠던 미소년 데니의 얼굴이.       


  아버지가 남프랑스에 있는 연구소로 발령을 받았을 때, 미양은 전교 1등 성적표를 받아 들었을 때보다 더 기뻤다. 사춘기에 접어든 소녀에게 프랑스는, 프랑스에서의 삶은 화려한 과일을 잔뜩 얹은 생크림 케이크보다 달콤한 것이었다. 전생에 나라를 구한 것이 틀림없다는 친구들의 부러운 야유를 받으며 그녀는 엄마와 함께 이삿짐을 꾸렸다. 

  엄마가 행복해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좋았다. 엄마는 프랑스 그것도 여자들의 로망이라는 프로방스에서 시작될 새로운 인생에 대한 기대로 잔뜩 들떠있었다. 엄마에게 프로방스는 시어머니가 만들어 놓은 암울한 그늘을 벗어나 따뜻한 햇볕이 쏟아지는 축복의 땅으로 들어서는 일이었다.      

  인천공항을 출발하는 비행기를 타기 전까지 모든 것이 좋았다. 12시간의 긴 비행을 끝내고 지친 몸으로 파리 드골 공항에 내렸을 때도 나쁘지 않았다. 

  프로방스로 가는 비행기를 갈아타려고 파리 드골공항의 B 존을 찾아가는 길에 갑자기 속이 메슥거리며 두통이 시작됐다. 프랑스어와 프랑스 억양이 잔뜩 들어간 영어를 듣는 순간 속이 다 뒤집힐 것 같은 멀미가 일며 앞이 캄캄해졌다. 

  비로소 우리말을 한마디도 할 수 없는 곳에서 공부해야 한다는 현실이 공포로 다가왔다. 핑크빛 꿈에 들떠서 간과했던 문제였다. 남의 나라말로 공부하고, 좋은 성적을 내야 한다는 부담감이 봇물 터지듯 터져 나왔다. 무서웠다.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영어 학원에 다녔고 방학 때마다 미국으로 필리핀으로 어학연수를 다녀왔어도 이건 다른 문제였다.  

  프로방스에 도착했을 때, 미양은 그곳에서 펼쳐질 새로운 삶에 대한 설렘과 기대보다 두려움으로 가득 차서 어두운 고속도로를 바라보았다. 암담한 그녀의 미래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등교 첫날은 마침 새로운 학년이 시작되는 날이었다. 엑상프로방스 근교 작은 마을에 있는 인터내셔널 스쿨은 프랑스 아이들과 외국 아이들이 섞여서 공부하는 중학교였다. 학교 분위기는 어수선했고 미양의 불안감은 고조됐다. 

  아버지는 미양을 학교에 내려놓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긴장하지 마라. 넌 잘할 수 있으니까.”


  아버지 목소리는 신념처럼 강직했다. 그녀의 어깨를 다독이는 손길은 공부 잘하는 딸에 대한 믿음으로 가득했다. 그래서일까. 아버지는 그녀를 휘감던 두려움의 실체를 눈치 채지 못했다. 

  교실로 들어선 미양은 눈치를 살피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삼삼오오 모여서 떠드는 아이 중에 동양인은 한 명도 없었다. 여기저기서 웅성웅성 영어와 프랑스어가 들렸다. 주눅이 잔뜩 든 미양은 구석 자리를 찾아 앉았다. 

  수업은 첫날부터 험난했다. 매부리코에 신경질적인 눈을 한 마담 프랑스와의 말을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똑똑 하이힐 소리처럼 끊어지는 그녀의 영국식 영어는 집중을 해도 겨우 들릴락 말락 했고, 콧소리가 강한 프랑스어는 윙윙거리는 소음 같았다. 그녀가 가르치는 수학이 미로를 헤매는 것처럼 어려워졌다. 언제 뒤집힐지 모를 낡은 조각배에 몸을 싣고 해무가 자욱한 바다를 건너는 기분이었다. 멍하니 앉아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쏟아내고 있는 마담 프랑스와의 입을 바라보는데 핑하니 눈물이 솟았다. 속이 메스꺼워지고 멀미도 일었다. 당장 토할 것 같이 어지러웠고 정신도 몽롱해졌다. 겨우 1교시 수업이 끝났는데 미양은 탈진해서 쓰러질 지경이었다. 부르르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책상을 부여잡는데 여자아이들 몇 명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뛰 에 쉬누아즈? 자뽀네즈?”


  그들이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미양은 절망에 차서 그들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난 너희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영어로 하려던 이 말도 입안에서만 맴돌았다. 갑자기 뇌세포가 파괴되어 머릿속에 저장된 것들이 지워진 느낌이었다. 핑그르르 이슬처럼 눈물이 맺히는데 영국식 영어가 천천히 그리고 또렷하게 들렸다.   

  

  “네가 중국인인지 일본인인지 묻고 있는 거야.”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린 미양은 대리석을 조각해 놓은 것처럼 잘생긴 얼굴과 마주쳤다. 부드러운 갈색 머리에 창백할 정도로 흰 피부 그리고 어딘지 모르게 동양적인 분위기가 느껴지는 남자가 그녀를 무심한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에서 왠지 모를 슬픔이 묻어났다. 


  “한국에서 왔어.”


  미양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 그의 얼굴에 반가움이 스쳤다. 


  “사우스? 노스?”


  미양은 왜 이런 질문을 받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사우스라고 대답했다. 그는 아! 그렇군, 하는 표정으로 잠깐 그녀를 바라보았다. 순간 교실이 조용해졌다. 모두 하던 일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자리로 돌아갔다. 


  “너, 데니랑 아는 사이니?”


  뒤이어 익숙한 미국식 영어가 들렸다. 


  “데니가 누군데?” 

  “몰라? 방금 너랑 이야기한 아이 말이야.”


  주근깨 투성이 빨간 머리가 미양에게 다가왔다. 로잘린이었다. 


  “정말 데니를 모르는구나.”


  잔뜩 긴장됐던 로잘린의 표정이 풀어졌다. 흘끔 데니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 그를 향한 마음이 비쳤다. 


  “너, 데니를 좋아하는구나?”


  미양의 말에 그녀가 어색하게 웃었다. 두 뺨이 발그레해지는 모습이 귀여웠다. 


  “들켰네? 모르는 척 해줄 거지?”


  그렇게 로잘린은 오랜 친구처럼 미양에게 다가왔다. 미양도 그런 그녀가 싫지 않았다.      

  그날 이후, 미양은 로잘린과 친해졌다. 로잘린은 자신의 짝사랑 이야기를 털어놓고 위로받을 누군가가 필요했고, 미양은 그 역할에 충실했다. 대신 로잘린은 미양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쳐주고 친구들 사이의 가교 역할도 해주었다.  

  로잘린은 쉬지 않고 데니 이야기를 했다. 주로 데니와 관련된 가십이었다. 데니에게 데이트 신청을 했다가 거절당한 여자들 이야기를 할 때, 로잘린의 입꼬리가 기분 좋게 올라가기도 했다.

      

  “데니는 영어와 프랑스어도 완벽하게 하고 공부도 일등이야. 아마, 우리 반 아이들 모두 그를 좋아할걸?”    


  그랬다. 프랑스어를 모르는 미양도 반 아이들이 틈날 때마다, 데니 이야기를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스페인에서 온 소피아는 대놓고 애정을 드러냈다. 빚쟁이처럼 데니 주변을 맴돌며 반 아이들에게 그와의 친분을 과시했다.  


  “난 쟤가 정말 싫어.”


  로잘린은 그런 소피아를 늘 못마땅해했다.  


  “소피아랑 데니, 아빠들끼리 친구래. 그걸 핑계로 소피아가 데니 옆에 앉아서 저러는 거지. 어유, 꼴 보기 싫어.”


  다행히 데니는 소피아에게 살갑지 않았다.  


  “만약 데니가 소피아랑 사귄다면 학교를 그만둘 거야. 난, 둘이 사귀는 꼴은 죽어도 못 봐!”


   로잘린은 그러나 소피아와 곧잘 어울렸다. 적과의 동침이라고 했다. 데니를 좋아하는 여자들과 친하게 지내면서 그들을 경계하는 것이 그녀의 치밀한 작전이었다. 14살 소녀의 사랑이 그렇게 치밀하게 계산적이라니… 미양은 짝사랑의 열병을 앓는 로잘린을 이해하면서도 그녀의 계산적인 사랑이 조금 섬뜩했다.     

 

  “데니가 살짝 건방져 보여도 기품이 넘쳐 보이지? 왜 그런지 아니?”

  “……”

  “그건, 데니 아빠가 영국 귀족 출신이라서 그래. 그러니까 데니도 귀족인 셈이지.”

  “엄마는?”

  “프랑스 사람이라는데, 자세한 건 몰라.”

  “근데, 좀 외로워 보여.”

  “아! 그건 우리 탓이야. 우리 수준이 너무 낮아서 고귀하고 지적인 그의 상대가 못 되기 때문이지.”

  “에이. 그건 억지다. 데니가 수준이 높으면 얼마나 높다고…”

  “너, 데니가 얼마나 똑똑한지 모르는구나? 봐! 쟤가 읽고 있는 책. 대학생들도 어려워서 쩔쩔매는 책인 걸?”


  미양은 나무 그늘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데니를 흘끔 쳐다보았다. 한 줄기 바람이 그녀의 등을 스치며 지나갔다. 살랑거리던 바람은 데니에게로 다가가 그가 읽던 책을 간질이며 장난을 걸었다. 

  순간, 데니가 고개를 들었다. 미양과 눈이 마주쳤다. 미양은 뜨거운 것에 덴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며 시선을 피했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것을 본 듯했다. 


<5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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