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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심한 삘릴리 Jul 01. 2021

따로 또 같이 프로방스를 걷다

3편

                                             3

                           5월 20엑상프로방스     


  어젯밤 어둠 속에서 본 호텔은 평범해 보였다. 유난히 높은 천장에 걸린 화려한 샹들리에만 눈에 띄었다. 침실은 낡았지만 정갈했다. 따스함도 느껴졌다. 까닭 모를 안도감과 함께 아찔한 현기증이 몰려왔다. 미양은 아기가 엄마 품을 파고들 듯 침대로 기어들었다. 오래된 피로의 유혹이 그녀를 깊은 잠 속으로 끌어들였다. 신기했다. 조금만 잠자리가 바뀌어도, 시차가 변해도 밤을 하얗게 새우던 그녀였다. 그런 그녀가 밤사이 폭우가 쏟아진 것도 모르고 곯아떨어졌다. 그녀를 잠에서 건져낸 건 남편의 전화였다.     


  “걱정했잖아. 잘 도착했고?”


  그제야 미양은 남편에게 미안해졌다. 


  “전화할 여유가 없었어. 무소식이 희소식이려니 하랬잖아.”     


  마음과 달리 미양의 말소리가 퉁명스러웠다. 늘 그랬다. 다정다감하고 세심한 남편의 성격이 눈물이 나게 좋으면서도 그녀는 무심한 척 그의 사랑을 귀찮아하며 피해 다녔다. 사랑에 있어 강자와 약자가 있다면, 그것은 덜 사랑하고 더 사랑하는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남편을 사랑하지만, 그녀는 두 사람의 사랑 앞에서 강자였다. 미양의 뚱한 말투에 남편의 목소리가 마시멜로처럼 부드러워졌다.    

  

  “장모님은? 공항에 나오셨어?”

  “아니.”    

 

  곧 남편이 한숨을 쉬었다. 같이 오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제스처였다. 


  “아침은 먹었니?”

  “조금 있다 먹을 거야.”

  “저기, 혹시 장모님을 못 만나더라도 낙심하지 말고.”

  “걱정하지 마. 곧 엄마를 찾을 수 있을 거야.”

  “혼자서 괜찮겠어? 지금이라도 내가 갈까?”

  “그럴 필요 없대도. 그리고 전화 못 해도 무소식이 희소식이려니 해.”

  “최미양. 너, 힘들어하는 거 다 보여. 그러니까 너무 센 척하지 말고 힘들면 힘들다고 응석 부려도 돼.”


  속내를 들킨 미양은 목이 메었다. 더 꼿꼿하게 고개를 들고 상황을 모면해야 했다. 


  “나 배고파.”

  “어. 알았어. 또 전화할게.”


  배가 고프면 예민해지는 미양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아는 남편은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미양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휴대폰을 바라본다. 남편의 목소리가 묻어있는 휴대폰. 그는 습관처럼 굳어버린 그녀의 무뚝뚝함을, 그 속에 감춰진 그녀의 속내를 아는 사람이다. 그녀가 넘어지면 제일 먼저 달려와 일으켜주고, 그녀가 잘못을 저질러도 그녀를 믿고 그녀의 편을 들어줄 사람이다. 

  기분 좋은 아침이다. 새소리로 가득한 창을 열자 달콤하고 쌉쌀한 공기가 쏟아져 들어온다. 미양은 깊은숨을 몰아쉬며 엄마를 떠올린다. 그녀에게 엄마는 어떤 존재였던가.   

   

  샤워를 마친 미양은 호텔 종업원의 안내를 받으며 가든 카페로 들어선다. 정갈하게 이발을 마친 정원수들 사이로 앙증맞은 테이블이 놓여있다. 시내 한가운데 있는 작은 호텔에 이렇게 예쁜 정원이 있을 줄 상상도 못 했다. 그녀는 햇살을 향해 놓인 테이블에 자리를 잡는다. 이제 막 뜨거워지기 시작한 햇살이 가볍게 그녀에게 인사를 보낸다. 


  “봉주르”     


  호텔의 아침 식사, 쁘띠 데쥬네는 그녀의 입맛에 아주 잘 맞았다. 

  미양은 갓 구운 바게트에 버터를 바르고 호텔 주인이 직접 만들었다는 무화과 잼을 얹어서 한 입 베어 먹는다. 코끝이 찡해진다. 느글거리던 속이 진정되고 마음이 편안해진다. 

  미양은 걸신들린 사람처럼 테이블에 놓인 바게트를 다 먹고, 카페 한쪽에 놓인 초콜릿이 박힌 빵 오 쇼콜라를 더 가져온다. 평소에 초콜릿은 물론이고 단맛이 나는 빵은 별로 좋아하지 않던 그녀다. 이상하게 오늘은 단맛이 끌린다. 그녀는 달콤하게 바삭거리는 초콜릿 빵을 단숨에 먹어치우고 진한 에스프레소 커피를 마신다. 나른한 포만감이 밀려온다.      

  느긋하게 아침을 즐긴 미양은 간단하게 외출 준비를 마치고 호텔을 나선다. 호텔이 있는 골목길을 벗어나자 곧 미라보 거리가 펼쳐진다. 엄마가 보내온 엽서 속의 사진과 똑같은 풍경이다.  

    

  '거리에 앉아 음악을 들으며 진정한 자유를 느낀다. 누구의 내가 아닌 나로 존재할 수 있다는 기쁨에 온몸이 떨린다. 진정 살아있음을 느끼며 이곳에 나를 영원히 묻고 싶다.'


  미양은 회사로 날아온 엄마의 엽서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글은 낯설었지만 분명 엄마 글씨였다. 엄마는 엽서에 이름을 쓰는 대신 또박또박 주소를 정확하게 적어놓았다. 

  에피노 거리 2번지 엑상프로방스 13100. 

  그곳은 14년 전 미양의 가족들이 살았던 남프랑스의 작은 도시였다.  

  엄마가 엑상프로방스에 있다니 믿을 수 없었다. 

  엄마는 왜 그렇게 먼 곳으로 떠난 것일까. 더구나 그곳은 그녀가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할 수만 있다면 영원히 그녀의 인생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곳이다. 대체, 왜 엄마는 엑상프로방스로 간 것일까. 미양은 엄마의 엽서를 읽고 또 읽었다. 엄마의 마음마저 읽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엽서 속의 엄마는 다른 사람 같았다. 지금까지 그녀가 알고 있던, 답답할 정도로 순종적이고 매사에 우유부단하고 소극적인 엄마가 아니었다. 식구들의 기에 눌리고 주눅이 들어서,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집안일이나 하던 그런 엄마가 아니었다. 뭐라고 표현할 수 없지만, 엽서 속의 엄마는 잔 다르크처럼 당당한 목소리로 자아 선언을 하고 있었다.      

  솔직히 미양은 그런 엄마가 싫지 않았다. 엽서 속의 엄마라면 오랫동안 터놓지 못했던 그녀의 속마음을 보여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반면에 미양은 아버지한테 엄마의 엽서를 보여줄 엄두가 나지 않았다. 

  ‘누구의 내가 아닌 나로 존재할 수 있다는 기쁨에 온몸이 떨린다.’는 엄마를 아버지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우선 아버지한테 엄마에게 엽서가 왔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미양은 길게 한숨을 쉬며 엄마의 엽서를 책상 서랍 깊숙한 곳으로 밀어 넣었다.


<4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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