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편
9
5월 20일, 엑상프로방스
엄마를 기다린 지, 세 시간째다. 미양은 카페에 앉아 드나드는 사람이 없는 에피노거리 2번지를 하염없이 바라본다. 엄마를 못 만날 것 같은 공포가 다시 엄습해온다. 혹시 엄마가 이곳에 없는 것은 아닐까, 그녀를 피해서 멀리 다른 곳으로 떠난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이제 어디서 어떻게 엄마를 만나야 할까…
미양은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드는 불안과 초조감을 이기지 못하고 에피노거리 2번지로 뛰어간다. 엄마, 엄마… 그녀는 엄마를 부르며 계속해서 벨을 누른다.
“실례지만 누구신 가요?”
한껏 멋을 낸 할머니가 조심스러운 얼굴로 미양에게 다가선다. 그녀의 손에는 건물로 들어가는 열쇠가 들려있다.
“여기 사세요? 전, 김화숙 씨 딸인데요. 우리 엄마 여기 사시죠? 맞죠?”
“울랄라~ 정말 마담 킴이랑 많이 닮았네.”
미양을 알아본 할머니는 반가운 손님을 맞이하듯 어서 들어가자며 앞장선다. 2층에 있는 엄마의 스튜디오는 굳게 잠겨있다. 아무리 벨을 눌러도, 문을 두드려도 응답이 없다.
맥이 풀린 미양은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는다. 아무래도 엄마가 다시 숨어버린 것 같다. 엄마가 우울증을 앓았다는 아버지의 말이 떠오른다. 우울증의 원인이 어쩌면 그녀 자신일지 모른다는 자책감도 든다.
그래도 너무했다. 엄마에게 불손한 딸이었지만 모녀의 연을 끊을 정도로 선을 넘지는 않았다고 믿었다. 미양은 정말로 엄마가 그녀를 끊어낸 것은 아닐 거라며 자위한다. 적어도 엽서 속의 엄마는 그녀에게 무언가 말을 걸어오고 있었다. 미양은 하루빨리 엄마를 만나서 엄마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진다.
“이것 좀 들어요. 울랄라~ 마담 킴한테 이렇게 큰딸이 있는 줄 몰랐네.”
할머니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미양에게 오렌지 주스를 내밀었다. 직접 오렌지를 짜서 만든 주스다.
“연락이라도 좀 하고 오지 그랬어요?”
“엄마가 어디 있는지 잘 몰랐거든요.”
할머니는 안쓰러운 눈길로 미양을 바라본다.
“무슨 사정이 있는 것 같은데, 너무 걱정하지 마요. 곧 돌아올 테니까.”
“엄마가 보고 싶어서… 여기가 아파요.”
미양이 가슴을 문지르며 꼭꼭 숨겨두었던 말을 쏟아낸다. 미칠 듯이 엄마가 보고 싶다. 미양은 와락 쏟아지려는 눈물을 참으려고 입술을 깨물었다.
엄마는 운전할 때마다 흥얼거리며 노래를 불렀다. 부드러운 샹송이었지만 듣기 싫었다. 등하굣길의 차 안에서 고문당하는 기분이었다. 안 그래도 가슴을 짓누르는 바윗덩어리 때문에 죽을 것 같던 날들이었다.
“엄마. 노래 좀 안 하면 안 돼?”
“어? 미안. 시끄러웠니?”
“그냥 듣기 싫어.”
“근데 어쩌지? 습관이 돼서 그런지 노래를 안 하면 운전을 못 할 것 같아.”
엄마의 목소리는 늘 명랑했다. 그것도 싫었다.
“어머. 미양아. 저기 좀 봐. 아몬드 꽃이 활짝 피었어.”
엄마는 매일 지나다니는 프로방스 경치에 흠뻑 빠져있었다. 차창으로 들어오는 바람 한 줄기, 햇살 한 줌에도 감탄하며 행복해했다. 미양은 그런 엄마의 행복이 가소로웠다. 그녀를 볼모로 잡고 엄마가 얻은 행복이 역겨웠다.
시간이 갈수록 엄마가 싫어졌다. 아버지가 여전히 그녀를 미워하고 죄인 취급하는 것도 엄마 탓 같았다. 모녀 사이는 점점 나빠졌다. 미양의 심술이 늘었다. 엄마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툭하면 그날 일을 끄집어냈다. 데니를 집으로 데려온 그녀의 행실을 탓했다. 고리타분하고 꽉 막힌 엄마가 답답했다. 미양은 모든 일이 엄마 탓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날 밤, 엄마랑 아버지가 집에 오지 않았더라면 일이 이렇게 커지지 않았을 거예요. 데니도 곧 이성을 찾았을 테고 미안해하며 돌아갔을 거라고요.’
엄마는 딸의 첫사랑을 잔인하게 짓밟았다. 그러고도 딸의 순결을 지켜낸 것으로 엄마의 의무를 다했다고 자위했다. 미양에게는 순결보다 첫사랑이 더 소중했다. 미양은 죽었다 깨어나도 그 사실을 모를 엄마가 갑갑했다. 할머니가 엄마를 왜 그렇게 미워하고 싫어했는지, 그 마음을 알 것도 같았다.
엄마에 대한 미움이 깊어지자 엄마가 좋아하는 것들이 소름 끼치도록 싫어졌다. 그녀의 책을 빌려서 프랑스어 공부를 하려는 엄마가 가소롭게 느껴졌다. 엄마가 좋아하고 예찬하는 프로방스 날씨와 경치 그리고 문화와 사람들까지 정이 뚝뚝 떨어지게 싫었다.
엄마에 대한 미움은 엄마를 무시하는 일로 이어졌다. 미양은 엄마의 바람대로 공부에 매진하는 대신 엄마에게 모든 짜증과 신경질을 퍼부었다. 엄마와 대화는 사라졌고 말도 꼭 필요한 것만 했다.
“밥 먹을래?”
“네.”
“쇼핑하러 갈까?”
“아니요.”
“오늘 날씨 참 좋지?”
“……”
엄마를 무시하는 일은 간단했다. 공부라는 바람막이 뒤로 숨으면 모든 것이 용서됐다. 엄마의 의견을 깔아뭉개도, 엄마에게 짜증과 신경질을 퍼부어도, 공부 때문이었다고, 핑계만 대면 그만이었다.
미양은 엄마에게 자신의 화를 쏟아내며 그녀의 몸 안에 아버지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 그녀는 아버지와 할머니한테 상처 받고 힘들어하는 엄마를 보며, 가슴 아파하던 딸이 아니었다.
오히려 더 악랄하고 치졸한 가해자가 되어서 엄마에게 횡포를 부렸다. 그녀의 변신에 엄마는 속절없이 무너졌다. 엄마는 할머니나 아버지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녀의 기세에 눌렸고, 특유의 침묵으로 일관하며 화를 삭여나갔다.
<12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