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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심한 삘릴리 Jul 06. 2021

따로 또 같이 프로방스를 걷다

13편


                                                    11

                                  5월 20니스     


  화숙은 천천히 느린 걸음으로 프롬나드 데 장글레, 영국인의 산책길을 걷는다. 영국인이 만들었다는 니스 바닷가의 산책길은 어제보다 한산하다. 파도가 밀려올 때마다 검은 자갈들이 간지럽다며 짜그르르 소리를 지른다. 

  바다를 따라 늘어선 카페로 발길을 옮긴 화숙은 진한 에스프레소 대신 디카페인 커피를 주문한다. 먼 시선으로 코발트색으로 빛나는 지중해를 바라본다. 잠을 빼앗아 가는 갱년기 증상이 다시 시작된 탓에 화숙은 어젯밤을 뜬눈으로 새웠다. 

  잠을 자려고 할수록 허무에 젖은 의식이 그녀를 붙잡았다. 왜 이곳에 왔는지, 그녀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답을 알 수 없는 물음이 집요하게 그녀를 따라붙었다. 

  화숙은 황폐해진 자신과 마주하기 겁났다. 속에 가두어놓은 것들이 너무 많아서 감당하기 힘들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폭발할지 모르는 폭탄을 안고 살다가 자폭하기에는 자신이 너무 가엾고 안쓰러웠다. 


  ‘나는 왜 이곳에 와 있는가.’ 


  또다시 자문해 본다. 자신을 찾고 위로를 받고 싶었는지, 프로방스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의 그녀를 만나고 싶었는지, 그녀를 짓누르던 삶들이 일시에 사라지기를 바랐는지, 모르겠다.     

  갹송이 가져다준 커피를 마시며 화숙은 바다로 눈을 돌린다. 수영하던 쥬디가 화숙을 발견하고 장난스럽게 손을 흔든다. 화숙에게 5월의 지중해는 발을 담그기에도 섬뜩한데 이곳 사람들은 벌써 해수욕을 즐기고 있다. 

  바닷바람이 차다. 화숙은 카디건 위로 스카프를 두르며 바다로 시선을 모은다. 불쑥 이곳 카페에 앉아서 커피 한잔 마시자고 했다가 남편에게 핀잔을 들었던 옛날 기억이 떠오른다.     

 



  결혼 기념 여행길이었다. 남편이 모처럼 부부만의 시간을 갖자며 모나코와 니스 여행을 제안했다. 딸아이도 마음껏 여행을 즐기라며 그녀의 등을 떠밀었다. 화숙은 남편과 모나코를 돌아다니면서 행복했다. 모나코 왕비로 생을 마감한 그레이스 켈리가 부럽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니스로 넘어오는 길에 들른 에즈 마을에서 행복은 절정에 달했다. 마을로 들어가는 언덕길을 오르는 내내 남편은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고마워요.”

  “뭐가?”

  “나를 프로방스로 데려와 준거요.”


  남편은 어깨를 으쓱하며 화숙을 바라보았다. 별것도 아닌 일에 감동하는 아내가 귀엽다는 듯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니스로 들어와서도 괜찮았다. 주차하고 메세나 광장을 돌아다닐 때도 남편은 기분이 좋았다. 일이 어긋나기 시작한 것은 예약한 호텔이 더블 부킹 됐다는 것을 안 순간부터였다. 그들보다 먼저 도착한 손님이 방을 차지했고 빈방이 없었다. 남편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다시 호텔 방을 구해야 한다는 중압감이 그의 신경을 강박적으로 쪼아댔다.      

  늘 그랬다. 남편은 자신의 계획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으면 불안 증세를 나타냈다. 반면에 화숙은 천하태평에 낙천적이었다. 영국인의 산책로를 따라 줄지어 늘어선 호텔을 바라보며, 빈방은 꼭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마침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니스 해변에는 잔뜩 멋을 부린 조명등이 일제히 불을 밝혔다.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온 기분이었다. 화숙은 겨울 한기를 따뜻하게 녹여주는 불빛에 홀렸다. 파도가 춤을 추었고 검은 자갈들이 낭만으로 가득한 노래를 불렀다. 

  화숙의 몸이 먼저 반응했다. 향이 진한 커피를 마시며 마음으로 니스를 품고 싶었다. 


  “우리 저기서 커피 한잔 마시고 가요.”  


  그때 화숙은 남편을 헤아리지 못했다. 들뜬 마음에 남편이 어떤 마음이었는지 생각 못 했다. 잠시 호텔 문제도 잊었다. 니스 해변에서 커피 한잔 마시고 싶다는 생각만 간절했다.

  생각하기에 따라 별것도 아닌 소박한 요구였다. 그냥 커피 한잔인데, 남편은 불같이 화를 냈다. 그렇게 한심하게 커피 타령이나 할 거면 여행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당장 집으로 돌아가자며, 펄펄 뛰었다. 남편의 분노조절장치를 건드린 화숙은 죄인 아닌 죄인이 되어 엑상프로방스 집으로 돌아갔다.      




  쥬디가 물이 뚝뚝 떨어지는 긴 머리를 수건으로 감싸며 개구쟁이처럼 웃는다. 


  “수영할 때 추웠지? 바람이 차더라.”

  “뭐 조금. 그래도 괜찮아.” 


  괜찮다고 큰소리쳤지만 뜨거운 카페오레를 마시는 쥬디의 입술이 새파랗다. 

  화숙은 주위 사람들까지도 유쾌하게 만드는 건강한 그녀를 바라본다. 입가에 기분 좋은 미소가 번진다. 그녀의 친구가 되어 준 쥬디가 새삼 고맙다.  


<14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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