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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심한 삘릴리 Jul 07. 2021

따로 또 같이 프로방스를 걷다

16편

                                                       13

                               5월 22니스 그리고 앙티브     


  화숙은 샤갈 미술관을 돌아본다. 몽환적이며 강렬한 색채의 그림 속으로 빠져든다. 

미술 교과서에서 보았던 샤갈의 그림과 마주한 감동이 그녀의 가슴을 타고 흘러내린다. 

  그의 그림 속에서 어제 다녀온 마을, 생뽈 드 방스가 보인다. 그곳은 샤갈이 진정으로 사랑했던 마을, 죽어서도 머물고 있는 마을이다. 전시실을 둘러보던 쥬디가 화숙 곁으로 다가왔다. 


  “이 그림 앞을 떠나지 못하네? 그렇게 마음에 들어?”


  화숙이 다정하게 쥬디의 팔짱을 끼며 말한다.


  “이 그림… 샤갈이 70살이 넘어서 그린 거래.”

  “음, 샤갈이 97살까지 살았으니까, 한창때 그린 그림이네.” 

  “맞아. 한창때 그린 거.”     


  화숙은 70살이 넘어서도 정열적으로 그림을 그리던 샤갈을 상상하며, 자신도 무언가를 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슬그머니 품는다. 쥬디가 갈 길이 멀다며 화숙을 재촉한다. 벌써 이곳을 떠나야 한다니… 화숙은 짧게 한숨을 쉬고 쥬디를 따라나선다. 

  잘생긴 소나무와 키 큰 종려나무 그리고 짙푸른 올리브나무가 어우러진 미술관 정원 위로 온몸을 간질이듯 부드러운 햇살이 쏟아지고 있다.      

  영화제 때문에 깐느로 가는 해변도로 정체가 심하다. 니스를 떠난 지 한 시간이 훨씬 지났는데 버스는 이제 겨우 앙티브로 접어든다. 


  “그냥 여기서 내릴까?”

  “그러자. 앙티브에서 피카소나 만나자.”


  화숙과 쥬디는 깐느를 포기하고 서둘러 버스에서 내린다. 

  피카소가 사랑했고, 피카소 때문에 유명해진 앙티브가 푸른 지중해를 따라 새색시처럼 다소곳이 앉아있다. 화숙은 진주처럼 빛나는 백사장을 따라 걸으며 고풍스러운 성곽길이 이어져 있는 구시가지를 바라본다. 

  처음 엑상프로방스에 도착하던 순간처럼 화숙의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남편이 엑상프로방스 근교에 있는 연구소로 발령을 받았을 때, 화숙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자신이 시어머니의 그늘을 벗어나서 살 수 있는 것인지, 정말 그래도 되는 건지 걱정부터 앞섰다. 

  남편은 홀로 살게 될 시어머니를 염려하면서도 프로방스로 함께 가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화숙은 자신을 배려해준 남편이 고마웠다. 그동안 섭섭했던 모든 일을 다 털어버리고 프로방스에서 시작될 새로운 생활에 기대를 걸었다. 

  타국살이는 녹록하지 않았다. 꼼꼼한 남편은 프로방스로 떠나기 전부터 철저하게 사전 준비를 했지만, 현지에서 수많은 돌발 상황과 부딪쳤다. 

  화숙은 남편의 눈치를 살폈다. 그의 나약한 신경이 예민해져서 폭발할까 걱정이었다. 다행히 남편은 상황을 잘 헤쳐 나갔다. 새삼 남편이 듬직한 가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집을 구하는 일이 가장 어려웠다. 프랑스의 유명 연구소에서 일한다는 증명서류를 보여주어도 집주인들은 외국인에게 집을 빌려주기를 꺼렸다. 

  화숙은 집을 구하느라 혼자 고군분투하는 남편에게 미안했다. 그녀가 도울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남편은 온종일 직장에서 영어 울렁증에 시달리고, 퇴근 후에는 프랑스어로 집을 구하느라 진땀을 흘렸다. 그녀는 괜히 남편의 눈치가 보였다. 

  프로방스에서 남편은 변했다. 겨우 집을 구했을 때, 그는 화숙의 손을 잡고 그동안 고생시켜서 미안하다는 말도 했다. 해외 발령을 받으면 모두 애처가가 된다는 말이 맞았다. 남편은 주말마다 화숙의 손을 잡고 장을 보러 다녔고, 가족들을 데리고 가까운 근교로 나들이를 갔다. 

  남편은 프로방스 햇살처럼 나날이 따뜻해지고 넉넉해졌다. 화숙은 결혼 후 처음으로 신혼 기분을 만끽했다. 행복한 날들이었다.   

       

  프랑스어 스트레스만 없다면, 프로방스의 모든 것이 좋았다. 

  언어의 장벽은 안 그래도 소심한 화숙을 더 작고 초라하게 만들었다. 프랑스어는 물론이고 영어까지 못하니 영락없는 벙어리 신세였다. 남편 없이 시장도 못 갔다. 한심했다. 프로방스에 가면 삶이 핑크빛일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화숙은 조심스럽게 언어의 벽을 두드렸다. 남편이 해외 발령을 받자마자 산 프랑스어 문법책과 사전은 그녀에게 우주의 언어만큼 어려웠다. 텔레비전만 켜도, 대문 밖만 나가도 프랑스 말들이 쏟아졌지만, 그녀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은 ‘봉주르’ 한 마디밖에 없었다. 

  혼자서 하는 공부는 한계가 있었다. 책에 코를 박고 익힌 발음기호와 간단한 단어 그리고 인사말은 책을 덮기 무섭게 잊어버렸다. 단어 하나를 겨우 외우고 나면 그전에 알았던 단어 두 개를 잃어버리는 느낌도 들었다. 

  결국, 그녀는 백기를 들었다. 남편에게 어학원에서 프랑스어를 배우고 싶다는 말을 꺼냈다. 


  “대체 공부에 대한 당신의 열등감은 언제 끝나는 거야?”


  프로방스에 와서 남편이 처음으로 언성을 높였다. 

  짜증이 잔뜩 묻은 남편의 말은 있는 힘껏 화숙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공부에 대한 열등감’이라는 표현은 그녀가 애써 감추고 싶은 치부를 적나라하게 까발린 말이었다. 남편이 날린 폭언의 화살은 아팠다. 


  “지금처럼 프랑스 말 한마디도 못 하는 벙어리로 살기 싫어요. 혼자서 시장도 못 가는 멍청이로 살고 싶지도 않고요.”


  화숙은 화를 억누르며 또박또박 제 생각을 밝혔다. 남편이 한심하다는 시선으로 그녀를 보며 말했다. 


  “어학원은 그냥 가니? 당신이 창피해하는 학벌을 여기서도 떠들고 다닐 거야?”

  “그게 무슨 말이에요?”

  “어학원 가려면 최종학교 졸업증명서를 내야 한다고. 졸업증명서를 프랑스어로 공증을 받아야 한단 말이야.”


  결국, 그거였다. 남편은 공증절차 때문에 프로방스 대학에서 일하는 선배, 박 교수에게 아내가 고졸이라는 사실을 들키기 싫었던 거였다. 


  “그러니까 여상 출신인 내가 창피한 거였네요?”


  화숙의 목소리가 떨렸다. 남편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또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학벌 콤플렉스가 그녀를 짓눌렀다. 가슴이 터질 것처럼 아팠다. 콧등이 시큰했다. 그에게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무작정 집을 나왔다. 

  하염없이 엑상프로방스 골목길을 걸었다. 참았던 눈물이 두 뺨을 타고 흘렀다. 이렇게 아름답고 낭만적인 골목길을 걷고 있는 그녀가 너무 작고 초라해서 눈물이 나왔다. 


<17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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