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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심한 삘릴리 Jul 08. 2021

따로 또 같이 프로방스를 걷다

18편

  12월의 엑상프로방스는 더없이 아름다웠다. 미라보 거리를 따라서 동화처럼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마쉐들이 들어섰고, 거리는 온통 환상적인 조명들로 빛났다. 

  화숙은 관광객들로 바글거리는 미라보 거리를 걷는 것이 좋았다. 남편이 출장 간 사이에 딸과 함께 마음껏 엑상프로방스의 낭만을 즐기며 행복해했다. 

  그날 화숙은 외출하기 싫다는 미양을 억지로 끌고 시내로 저녁을 먹으러 갔다. 크리스마스 장식을 한 미라보 거리에서 딸과 단둘이 축제를 즐기고 싶었다. 거리는 행복한 사람들 차지였다. 저마다 웃음 가득한 얼굴로 선물상자를 들고 느린 걸음으로 거리를 산책하고 있었다. 화숙은 카페테라스에 앉아 분홍빛 로제 와인을 홀짝였다. 미라보 거리를 바라보며 김춘수 시인의 시를 떠올렸다.  

  프로방스는 이제 그녀의 꽃이 되었다. 은은한 향기로 그녀를 점령한 꽃이 되었다. 화숙은 사랑이 가득한 눈으로 거리를 바라보았다. 옆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이 떠드는, 알아들을 수 없는 프랑스 말들이 감미롭게 귓가를 맴돌았다. 

  그때 잘 생긴 청년이 꽃을 들고 카페테라스 옆에 있는 온천 분수로 다가왔다. 어디선가 본 얼굴이었다. 동시에 화숙은 미양의 시선이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미양의 모든 감각이, 몸을 이루고 있는 모든 세포가 그를 향하고 있었다. 

  딸은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홀연히 일어나 그를 따라갔다. 화숙은 딸을 잡지 못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슬픔에 젖은 그 아이의 눈을 보게 되어서 그랬는지, 사랑에 빠진 딸을 더는 막아설 수 없어서 그랬는지 모르겠다. 인파 속으로 사라지는 딸의 뒷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왠지 모를 불안이 엄습해 왔다. 



  얼마 후, 화숙은 그날 미양을 잡지 못한 것을 뼈저리게 후회했다. 발등을 찍고 싶었다. 남편 말대로 자신은 엄마 노릇도 제대로 못 한 바보였다. 딸이 첫사랑 때문에 상처 받을 것을 알면서도 말리지 않고 방관했던 자신이 미웠다. 그나마 니스 여행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온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현관문을 열었을 때 펼쳐지던 광경. 성폭행을 당하기 일보직전의 상황에서 딸이 애절하게 외치던 절규가, 찢어진 옷 사이로 드러난 딸아이의 분홍빛 순결이 그녀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미양의 절규로 남편과 화숙의 피가 거꾸로 솟았다. 남편이 침입자를  가격하는 동안 화숙은 만신창이가 된 딸을 끌어안고 울었다. 미양은 둥지에서 떨어진 어린 새처럼 떨고 있었다. 괜찮아… 이제 괜찮아… 그녀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딸을 어루만지며 이제는 다 괜찮다고, 최면을 걸듯 중얼거렸다.      



  딸은 괜찮지 않았다. 화숙도 그랬다. 남편은 집안으로 남자를 끌어들인 어린 딸을 용서하지 못했다. 착하고 공부도 잘했던 딸이 이런 식으로 배신을 할 줄 몰랐다며 가슴을 쳤다. 

  데니를 끌고 경찰서로 그의 집으로 다니면서 분풀이를 할수록 남편의 화는 더 깊어졌다. 결국, 문화적인 차이를 몰라서 생긴 해프닝으로 일이 마무리됐다. 그로 인해 받은 상처는 깊고 쓰렸다. 

  데니가 영국으로 떠나고, 미양이 다시 학교생활에 적응하느라 힘들어하는 것을 짐작하면서도 화숙은 딸을 보듬어줄 여유가 없었다. 자식 교육을 제대로 못 했다는 이유로 남편의 화를 온몸으로 받아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일이 힘들었다. 솔직히 엄마로서 딸에게 실망도 했다. 남편 말처럼 겁도 없이 집안으로 남자를 끌어들인 딸이 미웠다. 미움이 커질수록 딸에 대한 관심도 소홀해졌다. 


  남편은 딸에게 자유를 주지 않았다. 중고자동차를 사서 화숙에게 딸의 등하교를 맡겼다. 딸을 절대로 혼자 두지 말고 일거수일투족까지 감시하라며 그녀를 재촉했다. 

  아이러니했다. 딸의 자유를 박탈하겠다고 산 자동차가 화숙에게는 더없이 큰 자유를 주었다. 화숙은 미양을 학교에 데려다주고 다시 데리러 가는 시간까지 마음껏 프로방스의 들판을 누빌 수 있었다. 그들의 언어를 몰라도 가능한 일이었다. 그녀는 프로방스의 예쁜 마을을 순례하는 일에 빠져들었다. 햇살과 바람이 좋은 카페에 앉아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책을 읽기도 했다. 걸을 때마다 햇빛의 각도가 달라지는 프로방스의 꽃밭과 프로방스 특유의 매미 소리는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에 행복이라는 이름으로 자리를 잡았다.      

  미양은 여전히 자신의 실수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안타까웠지만 화숙이 도울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시간이 딸의 사랑을 망각의 늪으로 이끌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기다림은 화숙을 지치고 짜증 나게 했다. 아침저녁으로 학교 다니기 싫다며 징징거리는 딸의 투정을 받아주는 일도 점점 힘들어졌다. 


  화숙은 딸이 학교에서 어떤 일을 당하는지 전혀 몰랐다. 미양의 절규를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딸은 변했다. 자신이 저지른 실수를 책임지기보다 실수 때문에 다친 상처가 아프다며 울기만 했다. 한심했다. 그래서 더 강하게 몰아붙였다. 

  딸이 이 일을 극복해야 바로 설 수 있을 것 같았다. 아픈 상처를 딸과 같이 끌어안고 전전긍긍하기보다, 아무렇지 않으니까 엄살 부리지 말라고 대범하게 넘겨주고 싶었다.  

  매일 차 안에서, 학교 가기 싫다는 미양의 투정으로 시작해서 공부나 열심히 하라는 화숙의 잔소리로 끝나는, 모녀간의 싸움이 계속됐다. 결국, 모녀간의 갈등이 깊어졌고 미양은 엄마를 향해 열어놓았던 마음의 창을 닫아걸었다.     

 

  화숙은 미양의 변화를 눈치 채지 못했다. 칭얼대던 딸이 잠잠해져서 다행이라고 여기며 프로방스의 햇살 속에서 행복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남편도 한결 편안해졌다. 잃어버렸던 웃음도 되찾았다. 평화가 찾아왔고 부부 사이도 좋아졌다. 분노조절을 잘 못 해서 그렇지 남편은 책임감이 강하고 믿음직한 사람이었다. 

  이렇게 행복에 겨웠던 화숙은 미양이 공부라는 방패 뒤로 숨어서 자신을 미워하고 무시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겨우 딸이 마음을 잡았다고 안도하는 순간, 화숙은 분노의 칼을 뽑아 든 미양과 마주쳤다.      

  초장에 기선제압을 해야 했다. 화숙은 미양이 자신을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씨는 못 속였다. 딸의 몸 안에는 남편의 못된 유전자가 생생하게 살아있었다. 

  처음 미양이 가시로 뒤덮인 언어폭력을 쏟아냈을 때, 화숙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아무런 대응을 하지 못했다. 그다음에는 딸의 아픔을 함께 해주지 못한 것이 미안해서 딸의 신경질을 받아주었다. 화풀이 대상이 엄마밖에 없는 딸의 처지가 불쌍해서 딸의 화를 받아주기도 했다. 

  미양이 화숙에게 쏟아내는 짜증과 신경질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모로코 속담처럼 말이 입힌 상처는 칼이 입힌 상처보다 깊었다. 화숙은 딸을 위해서 상처를 보듬었다. 다행히 공부 뒤로 몸을 숨긴 미양은 더는 엇나가지 않았다. 

  화숙은 딸이 비뚤어지지 않고 공부만 열심히 한다면 모두 괜찮다고 생각했다. 딸에게 받은 악랄하고 치졸한 스트레스쯤은 충분히 견딜 수 있었다. 그녀에게는 언제든지 달려 나갈 수 있는 프로방스 들판이 있었으니까.       



  서울로 돌아온 뒤에도 미양은 제 앞가림을 잘했다. 프로방스에서 혹독한 사춘기를 겪은 탓인지 다소 침울해 보였지만, 공부도 잘했고 친구들과도 잘 어울렸다. 가끔 정이 뚝뚝 떨어지도록 화숙에게 성질을 부리는 것만 빼고는 다 괜찮았다. 

  시어머니의 시집살이도 한결 누그러졌고, 다시 무뚝뚝한 일 중독자가 된 남편도 주말이면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려고 애썼다.  

  프로방스를 떠난 뒤에도 화숙은 그곳을 잊지 않았다. 아니 잊을 수 없었다. 방송통신대학교에서 불어불문학을 공부하며 프로방스에 대한 사랑을 키워나갔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현실과 마주한 그녀의 삶은 모든 것이 완벽했다. 남편의 여자를 알기 전까지는.     


<19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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