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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심한 삘릴리 Jul 09. 2021

따로 또 같이 프로방스를 걷다

19편

                                                15

                                    5월 23니스   

  

  니스의 메종이 모처럼 떠들썩하다. 앙투완이 무사히 일을 끝낸 기념으로 쥬디가 그의 친구들을 초대해서 파티를 열었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오월의 밤은 파티를 즐기기에 좋은 날이다. 

  쥬디가 함박꽃처럼 환한 웃음을 머금고 음식을 나른다. 화숙과 함께 아침부터 장을 보고 요리를 한 것들이다. 화숙은 요리와 어울리는 술을 준비한다. 가벼운 맥주부터 프로방스의 파스티스 그리고 독한 깔바도스까지 테이블에 가득 올려놓는다.     

 

  “봉수와 뚜르 몽드”


  미셸이 양손에 와인을 들고 들어선다. 가볍게 대화를 나누며 식전주를 마시던 친구들이 반갑게 미셸에게 다가선다. 살갑게 양볼에 가벼운 키스, 비주를 하며 그간의 안부를 나눈다. 


  “미셀까지 초대한 거야?”


  화숙이 당황한 표정을 감추며 물었다.


  “이런 자리에 미셸이 빠질 수 없잖아?”


  쥬디가 뿌듯한 얼굴로 친구들과 비주를 하는 미셸을 바라보았다. 곧 미셸이 쥬디와 화숙에게로 다가왔다.   


  “엑상프로방스는 잘 지키고 있었어?”

  “어우. 쥬디와 화숙이 없는 엑스는 지옥이었어.”


  미셸이 쥬디와 화숙에게 비주를 하며 장난처럼 찡긋거렸다. 아무렇지 않은 듯 화숙을 바라보는 눈이 조금 슬퍼 보인다. 화숙도 어색함을 떨쳐내며 미셸에게 식전주를 내민다.      

  화숙은 쥬디가 주최하는 파티에서 미셸을 처음 만났다. 앙투완의 상사인 그는 올드한 데니 분 인상을 풍겼다. 알랭 드롱처럼 잘생긴 얼굴은 아니지만 친근하면서도 젠틀한 느낌이었다.    

  



  “3년 전에 한국으로 출장을 다녀왔어요. 어메이징 한 나라더군요.”


  그는 고향 친구를 만난 것처럼 화숙을 반갑게 대했다. 서로 소개를 하다 보니 나이도 비슷했다. 미셸은 화숙이 자기보다 10살은 어린 줄 알았다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동양 여자들이 어려 보인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이럴 줄은 몰랐다며 흥분했다. 

  화숙은 희끗희끗한 새치가 어우러진 그의 그레이 헤어가 마음에 들었다. 짙은 눈썹에 그늘지도록 긴 속눈썹과 청회색 눈동자도 묘한 매력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그는 프로방스에서 만난 또래 친구일 뿐이었다. 

  그래서 부담 없이 어울려 다녔다. 쥬디네 집에서 파티를 할 때마다,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에 대해 조금씩 알아갔다. 쥬디네 커플과 함께 맥주를 마시기도 했다. 작은 도시 엑상프로방스를 걷다가 우연처럼 만나 커피를 마시기도 했다. 또래라는 공감대 탓인지 말도 잘 통했다.   

   

  “이혼한 아내와는 일 년에 두 번, 아이들 생일 때마다 만나요.”


  그는 솔직했다. 이혼한 아내 이야기는 물론이고 얼마 전까지 동거하다가 헤어진 여자 친구 이야기도 아무렇지도 않게 가벼움을 가장해서 털어놓았다. 대신 화숙의 사생활은 묻지 않았다. 그녀가 왜 가족들과 떨어져서 낯선 프로방스에 혼자 사는지 알려고 하지 않았다.      

  미셸의 생일파티가 열리던 날이었다. 화숙은 그를 위해 한식을 준비했다. 생일 케이크를 자르고 샴페인을 마시고 분위기가 고조됐다. 누군가 진실 게임을 하자는 제안을 했다. 


  “당신이 왜 이곳에 사는지 알고 싶어요.”


  미셸이 화숙의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


  “음…… 바캉스를 즐기는 중이에요.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바캉스.”


  화숙이 당황한 표정을 감추며 말했다. 

  앙투완이 손뼉을 치며 브라보를 외쳤다. 쥬디도 부럽다는 몸짓으로 화숙의 어깨를 껴안았다. 화숙은 미셸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풀리는 것을 보았다. 허공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쳤다. 미셸이 쾌활한 웃음을 머금고 일어섰다. 


  “당신의 바캉스를 위해 건배…”


  모두 신나는 목소리로 건배를 외쳤다. 그때 누군가 미셸을 향해 윈느 샹송을 외쳤다. 노래해. 노래해. 아이들처럼 테이블을 두드리며 미셸에게 노래하라고 소리를 지르며 웃었다. 

  미셸은 기타를 치며 조르주 무스타키의 노래를 불렀다. 음유시인 같은 그의 분위기와 꼭 맞는 노래였다. 노래를 부르는 동안 미셸의 시선은 노골적으로 화숙을 향했다. 음울한 아름다움이 샹송을 타고 흘렀다. 영혼을 울리는 소리였다.      

  그의 노래는 화숙을 흔들었다. 노래에는 노골적인 그의 관심이 담겨있었다. 그의 마음을 받고 싶었다. 남편에게 복수하는 마음으로 그를 만나고 싶었다. 뒤늦게 찾아온 낯선 감정이 신기했다. 사랑일지 몰랐다. 아니 사랑 같았다. 놓치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았다. 그러나 사랑이 가벼울 수 없다는 것을 화숙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도덕적인 관념이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그날 이후, 화숙은 미셸을 피해 다녔다. 친구들도 어색해진 두 사람의 일을 쉬쉬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나 큰일이 있었던 것처럼, 두 사람 사이를 안타까워했다.  



     

  파티 분위기는 자유롭다.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누다가 음악이 나오면 춤을 추고, 술을 마시고 싶으면 건배를 외친다. 와인도 레드, 로제, 화이트 색깔별로 취향대로다. 한쪽에서는 맥주를 그리고 다른 한쪽에서는 테킬라를 마시며 웃고 떠든다. 

  처음에 일곱 명으로 시작한 파티가 점점 커졌다. 앙투완이 니스에 사는 친구를 부르고, 그 친구가 또 친구를 부르는 식으로 점점 많은 손님이 메종으로 모여들고 있다. 

  조촐한 파티를 기대했던 화숙은 시끄럽게 변해가는 파티가 피곤해졌다. 와인을 3잔이나 마셔서 그런지 몸도 노곤하다. 터져 나오는 하품을 참느라 화숙의 눈에 눈물이 고인다. 눈물 때문에 흐릿해진 시야로 호탕하게 웃고 있는 미셸이 보인다.    

  



  박사과정을 밟던 미양이가 갑자기 학교를 그만두고 취직을 했다. 가족의 거센 반대도 소용없었다. 거기다 한술 더 떠서 결혼을 하겠다고 나섰다. 다행히 동아리 선배라며 데려온 사위는 한 눈에도 내 사람이다 싶었다. 마음에 쏙 들었다. 

  시어머니와 남편도 사위를 만족해했고, 사돈댁에서도 미양을 좋아했다. 혼인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화숙은 딸의 혼수를 준비할 꿈에 부풀었다. 대형 냉장고부터 쓰레기통까지 신혼살림에 필요한 리스트를 작성하고 시댁에 보낼 예단도 알아보러 다녔다. 그러다가 세일 중인 대형 김치냉장고를 덜컥 샀다. 

  미양이가 알아봐 달라고 부탁한 모델보다 훨씬 크고 좋은 것이었다. 값도 저렴했다. 이것만 있으면 맞벌이를 하는 딸에게 김치와 반찬들을 넉넉하게 가져다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엄마 미쳤어? 왜 엄마가 내 물건을 함부로 사? 그거 월권인 거 몰라? 그냥 어떤 제품이 좋은지 알아보랬지 누가 엄마한테 사라고 했어?” 

  “저기, 미양아…”

  “그게 신혼집에 어울린다고 생각해? 센스도 없으면서 왜 엄마가 나서? 아유~ 정말 짜증 나! 난 몰라. 엄마가 사고 친 거니까 엄마가 알아서…”  


  퇴근하는 딸과 저녁을 먹으러 가던 길이었다. 

  김치냉장고를 샀다는 말을 듣자마자 미양이 속사포처럼 신경질을 쏟아냈다. 화숙이 뭐라 변명할 틈도 없었다. 쩌렁쩌렁한 미양의 목소리에 지나가던 사람들이 힐끔거리며 그녀를 쳐다봤다. 측은한 그들의 시선이 무섭게 다가왔다.      

  화숙은 부끄럽고 창피했다. 울컥 솟구치는 화도 참을 수 없었다. 이러다 길거리에서 딸의 뺨을 후려칠 것 같았다. 그녀는 침울한 얼굴로 돌아서서 택시를 잡았다. 그제야 상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미양이 화숙을 붙잡았다. 이미 그녀의 마음은 꽁꽁 얼어붙었다. 

  택시에 몸을 실은 화숙은 딱히 갈 곳이 없었다. 집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무작정 남편 회사로 갔다. 남편이 보고 싶었다. 야근해야 하는데 귀찮게 한다고 신경질을 부려도 남편과 저녁을 먹으며 마음을 풀고 싶었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화숙은 남편의 여자를 보았다. 

 택시에서 내리던 그녀는 회사 앞에 서 있는 남편을 보았다. 혹시, 미양이가 남편에게 미리 전화를 한 것일까. 화숙은 괜히 들뜬 마음에 가슴이 뛰었다. 


  “여보.”


  남편을 부르는 그녀의 목이 살짝 메어왔다. 그와 동시에 은회색 아우디가 부드럽게 다가와 남편 앞에 섰다. 기다렸다는 듯이 남편이 차에 올랐다. 운전석에 앉은 여자가 안전띠를 매는 남편을 사랑스럽게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여자가 장난스럽게 남편의 코를 비틀었다. 남편은 껄껄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여자의 차가 떠났고, 화숙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한참을 그러고 있던 화숙이 부르르 떨리는 손으로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았다. 대신 문자가 왔다. 지금 야근 중이라 바쁘니까 급한 일이 아니면 집에서 이야기하자는 내용이었다.     


  “당신은 여자 만나면서 야근해요?”


  화숙의 말에 잔뜩 가시가 돋쳤다. 남편은 뻔뻔한 얼굴로 거래처 사장과 야근을 나갔다고 했다. 거래처 여사장의 비위를 맞추어 준 것뿐이라고 변명했다.  


  “큰일 앞두고 웬 소란이냐?”


  시어머니가 끼어들었다. 화숙이 남편에게 말도 안 되는 시비를 건다며 화를 냈다. 시어머니 자신이 누명을 쓰고 의심을 받은 것처럼 불쾌해했다. 전세가 기울었다. 시어머니는 집안의 대를 끊어놓고 뭘 잘했다고 남편을 투기하느냐며 화숙을 나무랐다. 


  “최 씨 집안 남자들은 시앗도 보지 않는다. 네 남편, 내가 그렇게 아들 타령을 해도 밖으로 눈 한번 안 돌리는 위인이야. 그런데 바람을 피운다고?”


  시어머니의 호령에 화숙은 움찔했다. 어쩌면 남편 말이 맞을지도 몰랐다. 그녀가 오해한 것일 수도 있다. 더구나 딸의 결혼식이 코앞이었다. 괜한 오해로 분란을 일으키다가 남편의 체면을 구겨서는 안 될 일이었다. 딸은 물론이고 사위와 사돈댁에서 안다면 두고두고 흉을 잡힐 일이었다. 

  화숙은 과감하게 의심의 꼬리를 잘라냈다. 지금까지 살면서 남편이 보여준 성실함을 생각했다. 최고는 아니었지만 그만하면 좋은 남편이었다. 밖에서라도 아들을 낳아오라는 시어머니의 막장 같은 요구를 단칼에 무시한 사람이었다. 표현은 잘 안 해도 그녀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 반듯한  사람이니까 더는 그를 의심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20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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