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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심한 삘릴리 Jul 10. 2021

따로 또 같이 프로방스를 걷다

21편

  “미안하다. 어미야.”


  차갑게 식은 전복죽을 본 시어머니는 말없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화장을 다시 고쳤으나 화숙의 두 뺨에는 희미하게 눈물 자국이 남아있었다. 


  “늙은이 욕심 때문에 어미, 널 많이 힘들게 했어. 정말 미안하다. 변명 같지만… 난, 그 아이가 싫었어. 그런데 너는 처음 보는 순간부터 우리 집 식구다 싶더라.”

  “그런데 왜요? 왜 그렇게 저를 힘들게 하셨어요?”


  화숙의 목소리가 서러움으로 갈라졌다. 


  “다 내가 못난 탓으로 생각하자. 미안하다. 그렇지만 어미야… 아범이 가정을 깰 정도로 무책임한 위인은 아니란다. 그건 너도 잘 알게야. 그 아이와는 헤어진다고 했으니 그냥 묻어두고 살자. 앞으로 내가 더 잘하마.”     


  잘하겠다던 시어머니는 수술을 받다 돌아가셨다. 가족들에게는 간단한 심장 시술이라고 했지만, 위험한 상태였다. 정신없이 상을 치르는 중에도 화숙은 계속 명치끝이 답답하고 아려왔다. 남편의 일을 묻어두자던 시어머니의 당부는 결국, 유언이 되었다. 끝까지 외아들을 감싸 안은 뻔뻔한 모정이었다. 

  모두가 떠난 빈집에 혼자 버려진 것처럼 허탈했다. 딸을 시집보냈을 때도 이렇게 가슴이 헛헛하지 않았다. 남편과 눈도 마주치기 싫었다. 두려웠다. 자신의 인생을 훔쳐간 남편을 용서할 수 있을지, 시어머니의 유언대로 모든 것을 덮어두고 살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남편은 화숙의 속이 지옥 불처럼 끓고 있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 장례식이 끝나자 모든 뒤처리를 그녀에게 맡겨놓고 미국으로 출장을 떠났다. 


  화숙은 남편을 정리하지 못했다. 남편에게 여자 이야기를 꺼낼 자신이 없었다. 그 여자 이야기가 나오는 순간 남편과의 모든 관계를 끝내버릴 것 같아 두려웠다. 화산이 폭발하듯 억울했던 그녀의 인생이 쏟아져 나와 돌이킬 수 없는 길로 접어들 것 같았다. 돌이킬 수 없는 길. 그것은 나약한 화숙이 두려워하던 실체였다.      

  시어머니 유품을 정리하려고 문갑을 열자 곱게 포장한 봉투가 나왔다. 그 안에는 화숙의 이름으로 된 통장과 도장 그리고 시어머니가 쓴 메모가 들어있었다.      


  ‘미안하고 고마웠다. 이건 내 마음이니 받아다오. 이제부터는 꼭 너를 위해서 살렴.’     


  시어머니다운 반전이었다. 통장에는 꽤 많은 돈이 들어있었다. 평생 화숙의 인생을 짓밟은 대가처럼 넉넉한 돈이었다. 마지막으로 남편을 위해 조용히 살라고 무언의 압력을 넣는 돈이기도 했다. 

  시어머니를 향한 분노가 불길처럼 솟아올랐다. 시어머니가 아끼던 물건들을 박살 나도록 집어던지며 포악을 떨어도 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화숙은 분풀이하듯 시어머니 유품을 모두 꺼내서 쓰레기봉투에 담았다. 하나도 남김없이 시어머니를 지워버리고 싶었다. 

  쓰레기봉투를 들고나가다 미양과 마주쳤다. 미양은 놀란 눈으로 화숙을 막아섰다. 


  “엄마. 그거 할머니 밍크코트 아니야?”

  “맞아.”

  “뭐야. 할머니 폐물도 있잖아? 그걸 다 버리려고?”

  “응.”

  “엄마. 미쳤어? 이 멀쩡한 것들을 왜 버려?”

  “끔찍해서. 내 눈앞에서 모두 사라졌으면 좋겠어서.”

  “이게 엄마 본심이야? 할머니 앞에서 착한 며느리인 척하더니, 할머니를 빨리 몰아내고 싶은 게 엄마 본심이었어?”


  미양은 진저리를 치며 화를 냈다. 


  “아무리 사람이 싫어도 그렇지. 어떻게 할머니 유품을 전부 버릴 수 있어?”


 미양의 말투가 날카로웠다. 화숙은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기를 주저했다. 서글펐다. 너무 멀어져 버린 모녀 사이 때문인지, 남편의 자존심을 지켜주려던 그녀의 마지막 사랑 때문인지 모르겠다. 

  미양의 다그침에 화숙은 침묵했다. 터질 것 같은 가슴을 열어 보여주고 싶었다. 동시에 모든 것을 묻어두자던 시어머니의 유언이 그녀를 압박했다. 출처를 알 수 없는 분노가 그녀의 목을 졸랐다. 화숙은 악을 쓰듯 소리를 지르며 딸에게 시어머니의 폐물과 밍크코트를 집어던졌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그녀는 아팠다. 출장에서 돌아온 남편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그녀를 대했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화숙은 몇 번이고 여자 이야기를 꺼내려다 삼켰다. 

  판도라의 상자를 열고나서 뒷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머리로는 당장 진실을 밝히고 남편과 헤어질 것을 생각하지만 그럴수록 그녀의 가슴은 남편을 원했다. 화숙은 바보 같은 자신이 싫었다.

  미움도 정이고 사랑이었다. 화숙은 껍데기뿐인 남편을 쉽게 떠날 수 없었다. 남편과 함께했던 세월이 자꾸 그녀에게 손짓했다. 돌이켜보면 힘들었던 날들만큼 즐겁고 행복했던 순간도 많았다. 이제 와서 모든 것을 버릴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남편 곁에 남는 일도 고통스러웠다. 감당할 수 없는 아픔과 두려움이 그녀를 짓눌렀다. 너무 아파서 남편이 출근하고 난 뒤, 집안이 떠나가도록 통곡하기도 했고, 미친 여자처럼 울면서 산을 뛰어다니기도 했다. 

  가슴은 나날이 허해졌다. 병원에 다녀도, 병원에서 준 약을 먹어도 소용없었다. 이대로 이렇게 살다가 죽어버릴 것 같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자신이 싫었고, 정말로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그때 문득 프로방스가 생각났다. 

  화숙은 프랑스 유학원을 찾아가서 상담을 받았다. 학생비자를 신청하고 엑상프로방스에 있는 어학원과 연결되는 프로그램에 가입했다. 어학연수 준비는 차곡차곡 진행됐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출국날짜가 남편의 출장과 겹쳤다. 

  화숙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떠나기로 했다. 어차피 남편과 딸이 알아도 반대할 것이 뻔했다. 계획했던 건 아니었지만 이로써 그들에게 통쾌한 복수를 했다는 쾌감도 들었다.


<2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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