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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심한 삘릴리 Jul 09. 2021

따로 또 같이 프로방스를 걷다

20편

                                            16

                              5월 24니스     


  화숙은 쥬디가 일광욕을 즐기던 알롱제 의자에 피곤한 몸을 기댄다. 새벽하늘에는 보석을 뿌려놓은 듯 별들이 가득하다. 화숙은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별들을 바라보다가 크게 심호흡을 한다. 차가워진 공기가 기분 좋게 상쾌하다. 

  파티는 이제 주최자의 손을 떠났다. 쥬디와 앙투완은 점점 늘어나는 손님을 감당하지 못해 근처 호텔로 도망갔다. 화숙도 수영장 쪽으로 몸을 피한지 오래다. 그나저나 파티 뒷정리는 또 언제 할지 모르겠다. 화숙은 질끈 눈을 감는다.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눈을 뜬 화숙은 주위를 둘러본다. 알롱제 의자에서 깜박 잠이 들었나 보다. 화들짝 놀라 일어나는데 그녀를 감싸고 있던 두꺼운 점퍼가 툭 떨어진다. 미셸의 점퍼다. 파티가 끝났는지 소음 같던 음악도 들리지 않는다. 

  화숙은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따라나선다. 희미한 불빛 아래서 미셸이 빈 술병들을 치우고 있다. 화숙과 눈이 마주치자 미셸이 어깨를 으쓱하며 겸연쩍은 미소를 짓는다.

  찡하니 마음 끝이 저려온다. 미셸은 이런 사람이다. 남들이 귀찮아하는 일을 내 일처럼 묵묵히 하는 사람. 


  “나도 도울게요.”

  “잘됐다. 혼자 심심했는데.”


  미셸이 햇살처럼 환하게 웃는다. 순간 화숙은 정신이 번쩍 든다. 잘못하다 그동안 그를 피해 다닌 일이 수포로 돌아갈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뒷정리를 끝낸 화숙과 미셸은 수영장에 나란히 놓인 알롱제 의자에 잠자리를 마련했다. 방과 거실은 이미 만취해서 잠든 앙투완 친구들로 가득하다. 새벽이 되자 기온이 더 내려간다. 방에서 이불을 가져다 덮었어도 으스스 몸이 떨린다. 

  미셸이 춥다고 엄살을 부리며 알롱제 의자를 화숙과 가깝게 붙인다. 금방 곯아떨어질 것처럼 피곤했던 화숙이 화들짝 놀라 일어선다. 남편이 아닌 남자와 이렇게 가깝게 눕기는 처음이다. 


  “왜 그래요?”

  “잠이 안 올 것 같아서요.”


  화숙이 둘러대며 말했다.


  “그럼 우리 바닷가로 놀러 갈래요?”


  미셸은 화숙의 대답도 듣지 않고 주섬주섬 짐을 챙긴다. 덮고 있던 담요와 먹을 것을 차에 싣고 그녀의 손을 잡아끈다.  


  “안 잡아먹어요. 갑시다.”


  어둠 속에서 파도소리만 들린다. 미셸이 준비해온 장미 향초에 불을 붙인다. 은은한 장미향이 바람을 따라 살금살금 다가온다. 생각보다 춥지 않다. 온화한 프로방스 날씨를 만들어주는 지중해 바람 탓인가 보다.  


  “그거 알아요? 여기서 새벽이 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거?”

  “어떤 소린데요?”

  “직접 들어봐요.”


  미셸이 보온병을 열고 뜨거운 차를 따른다. 참 부지런하고 손이 빠른 남자다. 


  “당신이 왜 솔직하지 못했는지… 생각해 봤어요.”


  하마터면 뜨거운 차를 쏟을 뻔했다. 화숙은 놀란 얼굴로 미셸을 보았다. 


  “당신이 등을 돌릴 때, 당신의 눈을 봤어요. 나를 원하는 눈빛을.”


  마음을 들킨 창피함보다 솔직하지 못한 수치심이 더 강했다. 화숙은 아무 말 못 하고 어두운 바다만 바라본다. 


  “왜 그렇게 심각해요?”

  “뭐가요?”

  “당신. 그리고 당신이 사는 세상이 답답해 보여요.”


  맞아요. 나도 내가 답답해요. 답답해서 미칠 것 같아요. 화숙은 울컥 치솟는 말을 삼킨다. 말을 아껴야 한다. 마음을 들키고 나면 지금처럼 그를 외면하기 힘들어진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미셸은 화가 잔뜩 난 사람처럼 입을 꾹 다물고 칠흑 같은 바다만 바라본다.  


  “남편과 헤어지고 싶어서 프로방스로 왔어요.”


  화숙이 지루한 침묵을 깬다. 


  “많이 아팠겠군. 남편 앞에선 아프다는 말도 못 했지요?”


  미셸이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물었다.


  “내가 좀 바보 같잖아요. 당신도 알다시피.”

  “그때도 솔직하지 못했군요. 그런 게 동양 여자들의 미덕, 뭐 그런 건가요?” 


 화숙은 길게 한숨을 쉰다. 그녀도 자신에게 솔직해지고 싶다. 무엇보다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지고 싶다. 


  “뭐가 두려워요?”

  “네?”

  “나랑 연애하는 게, 뭐가 두려워서 망설이는지 알고 싶어요.”

  “아직 남편을 떠나야 할지 결정하지 못했어요.” 

  “이미 떠나 있는 건 아닌가요? 내가 보기엔……”


  미셸이 말끝을 흐리며 화숙의 어깨를 잡는다. 파르르 어린 새처럼 화숙의 몸이 떨렸다. 미셸의 깊은 눈이 화숙을 들여다본다. 부드럽게 마음을 관통하며 예리하게 빛나는 눈빛에 화숙은 저항할 수 없는 힘을 느낀다.


  “만약에, 만약에 말이에요. 내가 여기서 사는 동안… ”


  화숙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린다. 


  “연애하고 싶으면… 당신한테 갈게요.”


  화숙을 바라보던 미셸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번진다. 그리고 못 말린다는 표정으로 화숙을 와락 끌어안는다. 어휴, 이렇게 천진하고 한심한 여자를 어떻게 하라고. 그가 답답한 한숨을 토해내며 읊조리듯 말한다. 화숙은 그의 품에서 겨우 안도의 숨을 쉰다. 아슬아슬하게 우정을 지킨 친구의 품이 따뜻하다. 


  “당신이 입은 상처, 내가 낫게 해 줄게요. 연애 안 해도 좋으니까, 나를 외면하지 마요.”


  미셸이 그녀의 등을 다독이며 말했다. 남편도 예전에는 이렇게 좋은 사람이었는데… 화숙의 코끝이 찡하다.




  병실 앞에 서자, 남편의 격앙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모두 어머니 탓이에요. 어머니가 윤주를 반대해서 이렇게 된 거라고요.”


  화숙은 그 자리에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시어머니 목소리도 카랑카랑했다. 입맛이 까다로운 시어머니를 위해서 전복죽을 끓여온 화숙은 조용히 숨을 죽였다. 


  “윤주랑 헤어지고 제가 어떻게 산 줄 아세요? 어머니 때문에 제 인생이 얼마나 꼬인 줄 아시느냐고요?”

  “그래서 나한테 복수하려고 그랬니?”


  복수라는 단어가 목에 걸렸다. 남편에게 여자가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시위라도 하려고 여상 출신에 가난한 여자를 데려온 거냐고?”

  “여기서 집사람 얘기는 왜 하세요? 그 사람이랑은 상관없는 일이잖아요.”

  “왜 상관없어? 미양 어미가 네 성에 안 차니까 윤주 만나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았니? 이제, 나 죽으면 얼씨구나 같이 살겠구나.”

  “아이 참! 몇 번을 말씀드려요. 헤어질 거예요. 곧 헤어진다고요.”


  그날, 화숙은 전복죽을 끌어안고 하염없이 걸었다. 

  남편에게 인생을 고스란히 사기당했다. 허탈했다. 남편이 약속을 어기는 바람에 대학을 못 간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인생 최대의 사기였다. 시집살이가 힘들 때마다, 남편과 사이가 틀어질 때마다, 애틋했던 연애 시절을 떠올리며 견뎌왔는데, 그것마저도 거짓이었다. 미칠 것 같았다. 남편과 결혼을 이야기하던 순간만큼은 진실로 뜨겁게 사랑했고, 사랑받았다고 믿었는데 아니었다.  

  허망했다.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혀도 이렇게 아프지 않을 것 같다. 화숙이 그 여자의 존재를 느꼈을 때, 남편은 솔직해야 했다. 딸의 결혼식을 핑계로 그녀를 속이고 역성을 드는 시어머니 뒤로 숨지 말았어야 했다. 

  화숙은 더는 남편을 참아낼 수 없었다. 새삼 남편의 껍데기만 붙잡고 전전긍긍하며 살았던 자신이 비참해서 죽고 싶었다. 


<21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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