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편
14
5월 22일, 앙티브
피카소 미술관을 나서던 쥬디가 엄마에게 보낼 그림엽서를 산다. 피카소의 작품이 인쇄된 엽서들은 그 자체가 예술품이다. 쥬디는 그림엽서들이 모두 마음에 들어서, 어떤 걸 엄마한테 보내야 할지 모르겠다며 행복한 고민에 빠져든다.
화숙은 그런 쥬디를 바라보며 미양에게 보낸 엽서를 떠올린다. 간지러운 햇살이 쏟아지던 마라보 거리 카페에 앉아 음악을 듣던 날이었다. 울컥하는 감상에 빠져서 엽서를 썼다. 괜히 치기 어린 엽서를 보낸 것은 아니었을까 잠시 후회가 된다.
5개월 전, 화숙은 프로방스로 떠나오면서 모든 인연을 끊으려 했다. 그 누구와도 연락하지 않았다. 이메일도 확인하지 않았다. 가끔 가족들이 보고 싶어도 모질게 참아냈다.
남편을 마음으로 정리할 때까지 모든 관계를 원점에 두고 있었다. 그런데 어쩌자고 미양에게 엽서를 보냈는지 모르겠다. 이미 결혼해서 남의 식구가 된 딸. 살가운 대화보다 툭툭 거리고 싸우기만 했던 딸이다. 그래도 보고 싶은 마음은 숨길 수 없었나 보다.
그랬다. 화숙은 처음으로 미양을 느꼈던 날, 그날의 애틋함을 아직도 잊지 못했다. 화숙에게 미양은 절망의 끝에서 만난 삶의 희망이었다.
화숙의 배가 불러오면서 시집살이도 누그러졌다. 손주에 대한 욕심이 시어머니를 부드럽게 변화시켰다. 은근히 아들 손주를 원했지만, 화숙이 딸을 낳았다고 실망하거나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화숙의 산후조리를 해주겠다고 나섰다.
“말씀은 고맙지만, 몸조리는 친정에서 해야지요.”
“아닙니다. 우리 집안일인데, 당연히 저희가 해야지요.”
친정엄마는 시어머니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가난한 집안에서 딸을 시집보낸 자격지심 때문이기도 했다.
시어머니는 특유의 부지런함으로 화숙과 아기를 보살폈다. 애지중지 손녀를 씻기고 먹이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산후조리가 끝난 뒤에도 시어머니는 온종일 손녀를 품고 살았다. 며느리가 집안일을 하는 사이에 손녀를 봐준다는 핑계였다. 화숙이 아이를 차지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은 젖을 먹일 때뿐이었다. 손녀를 향한 할머니의 사랑은 나날이 깊어갔다. 더불어 집안에 웃음꽃이 가득했다. 미양은 존재 그 자체로 기쁨이고 행복이었다.
미양이 가져온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우리 미양이 하는 짓이 꼭 남동생을 볼 상이야. 어미야, 빨리 둘째도 낳아야지?”
미양의 돌 잔칫날, 시어머니는 노골적으로 아들 손주 욕심을 드러냈다. 남편은 못 들은 척 고개를 돌렸다.
그날 이후, 아들 손주를 향한 시어머니의 집요한 채근이 시작됐다. 시어머니의 성화 때문이 아니라도 화숙은 둘째를 갖고 싶었다. 그런데 미양을 낳은 후로 임신이 되지 않았다. 불임클리닉을 다녀도 효과가 없었다. 이런저런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수많은 검사와 시도를 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시어머니 입에서 며느리가 잘 못 들어와서 대가 끊어졌다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아기를 못 갖는 것이 며느리만의 잘못이 아닌데, 모든 미움과 책임은 오롯이 화숙의 몫이었다. 며느리의 자존심을 지켜준다며 아무도 모르게 가해지던 시집살이가 담장 밖을 넘기 시작했다.
남편은 화숙이 당하는 시집살이를 못 본 척 눈감아버렸다.
“할머니 미워! 매일매일 엄마만 구박하고. 할머니 정말 미워! ”
화숙의 고된 시집살이를 보다 못한 미양이가 울음을 터트렸을 때, 남편은 시어머니 편을 들었다. 남편은 늘 그랬다. 화숙을 방패로 삼아 시어머니로부터 도망치고, 존재하지 않을 아이 문제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다.
쥬디가 엄마에게 보낼 엽서를 쓰는 동안 커피가 다 식었다. 그녀는 차갑게 식은 커피를 마시면서 연신 싱글벙글한다. 엄마가 앙티브 우체국 소인이 찍힌 엽서를 받고 기뻐할 모습을 상상만 해도 즐겁단다. 화숙은 싱그러운 해바라기처럼 활짝 웃는 쥬디를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본다.
“숙! 네 딸도 나랑 나이가 비슷하다고 했던가?”
“응. 너보다 세 살 어려. 근데 너처럼 착한 딸은 아니야.”
“칫! 우리 엄마도 나를 못된 딸이라고 하는 걸? 그래도 내가 앙투완이랑 사랑에 빠졌을 때, 제일 먼저 지지해주셨어. 사랑을 찾아가라고 내 등을 떠민 사람도 엄마였으니까. 하하하”
화숙은 노란 우체통에 엽서를 넣고 돌아서는 쥬디를 바라보며, 자신은 어떤 엄마였을까 생각해본다. 딸의 아픔조차 함께 나누지 못했던 자신이 새삼 부끄럽다. 점점 악화하는 딸과의 관계를 무력하게 보고만 있던 엄마였다. 딸과 속내를 털어놓지 못하는 사이가 된 것도 돌이켜보면 화숙의 책임이었다.
화숙은 딸의 아픔을 넓은 가슴으로 품어주는 엄마가 되고 싶었다. 딸과 친구처럼 마음을 나누는 엄마이고 싶었다. 권위를 내세우기보다 딸이 자신의 길을 찾기를 기다려주는 대범한 엄마고 싶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은 어떤 엄마였던가. 14년 전의 기억이 새삼 아프게 다가온다.
화숙은 미양을 키우며, 언제일지 모르는 딸의 첫사랑을 내심 기다리고 있었다.
어린 딸이 자라서 사랑앓이를 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가슴 두근거리는 추억을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딸의 첫사랑은 프로방스에서 만난 가장 큰 복병이었다.
엑상프로방스 기차역에서 딸을 보았을 때, 그녀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조각상처럼 잘생긴 남자의 손을 잡고 선 딸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사랑의 열병에 휩싸인 여자의 얼굴이었다. 화숙은 몸을 숨기고 딸과 그 연인을 바라보았다.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속설이 떠올랐다. 미양이 만난 첫사랑은 너무 가혹했다. 남편도 그랬지만 그녀도 딸의 첫사랑을 감당하지 못했다. 자신이 없었다. 왜 하필… 화숙은 사춘기 딸이 프로방스에서 첫사랑을 만날 줄 몰랐다. 더구나 외국인과 사랑에 빠지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또래보다 늦되고 남자 친구는 물론이고 연예인에게도 관심을 두지 않던 딸이었다. 입버릇처럼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을 가고 난 뒤, 남자 친구를 사귀겠다던 야무진 딸이었다.
남자와 헤어지는 미양의 표정은 꼭 실연당한 사람 같았다. 화숙은 얼른 인파 속으로 뛰어들며 딸의 이름을 불렀다. 미양이 화들짝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곧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미양은 엄마를 부르며 화숙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녀는 상처로 끝날 딸의 첫사랑을 예감하면서 힘껏 미양을 안아주었다.
<18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