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디에고 Mar 18. 2020

헨리 키신저 이야기

<Kissinger: a Biography> 그리고 월터 아이작슨

시골 뜨기 농부를 만난 헨리 키신저(Herny Kissinger). 혼기가 찬 그의 아들에게 어울릴 만한 여인이 있다고 말한다. 아들 일에 간섭하기 싫다며 망설이는 농부에게 키신저는 말끝을 흐린다. "로스차일드 가의 딸인데..." 농부는 덥석 받아들인다. 이윽고 로스차일드 경을 찾아가 키신저. 그의 딸에게 걸맞은 신랑감이 있다고 제안한다. 딸이 너무 어리다고 거절하자 키신저는 아쉽다는 듯 내뱉는다. "세계은행 부총재인데..." 로스차일드 경 역시 추천을 받아들인다. 둘 사이의 결혼을 성사시킨 키신저, 이젠 세계은행 총재에게 나선다. 그가 부총재 감을 하나 소개해주겠다고 하자, 총재는 이미 부총재는 충분하다며 사양한다. 그런 그에게 키신저가 말한다. "로스차일드 경의 사위인데..."


헨리 키신저의 협상 능력을 패러디한 우화(p. 554)다. 세계 최고의 외교관 중 하나이자 협상의 귀재로 알려진 그는 20세기 굵직한 국제적인 사건들을 만들어냈다. 미국에 아픈 손가락이던 베트남 전쟁을 종식시킨 것을 필두로 소련, 중국과의 데탕트, 이집트-이스라엘의 캠프 데이비드 협정 등 냉전 시기 치열한 외교 싸움에서 미국의 입장을 세계에 관철시켰다. 현실주의자라면 부득불 안고 가야 할 짐더미 중 하나인 윤리적인 측면에서 십자포화를 맞았지만, 그는 명실상부 20세기 최고로 영향력을 행세했던 외교관 중 하나였다.


<스티브 잡스 평전>을 썼던 월터 아이작슨(Walter Issason)은 이러한 헨리 키신저의 인생을 책 <Kissinger: a Biography>에 담았다. 이른바, 헨리 키신저 평전. 독일의 한 시골 마을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나 미국의 우주대스타가 되기까지의 행적을 담았다. 897 페이지에 달하는 책 군데군데엔 키신저가 현실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흔적들이 묻어 있었다. 정의냐 질서냐에서 당연히 질서를 택하겠다(p. 76)는 키신저st 현실주의의 바탕을 그의 인생에서 확인할 수 있다.




What America means to the rest of the world is the hope for people everywhere that they shall be able to walk with their head erect. And our resopnsibility as Americans is always to make sure that our purpose transcend our differences (p. 704)


헨리 키신저의 어린 시절은 나치로 얼룩져 있었다. 축구를 좋아했던 소년은 나치로 인해 인종차별이 심해지자 축구장도 제대로 들어가지 못하는 신세가 됐다. 유대인은 마을 소년들이 행진을 할 때도 곁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으며,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오롯이 견뎌야 했다. 갈수록 나치의 영향력은 거세졌다. 어머니인 파울라 키신저(Paula Kissinger)는 아들들에 대한 차별이 심각해지자 독일에선 제대로 성장시킬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 길로 키신저 가족은 미국으로 향한다. 남는 걸 택한 키신저의 친척 12명은 홀로코스트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학창 시절, 미국 생활을 주제로 에세이를 쓰란 숙제에 헨리 키신저는 위와 같은 글을 남겼다. 익숙한 환경과 친구들을 두고 떠난다는 게 쉽지 않았지만, 당당히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있었던 곳은 미국이었다고. 유대인 출신으로 독일에서 차별을 겪었던 그는 본인이 미국인이 된 것을 자랑스러워했으며, 서로 다름을 초월한 미국 사회를 지향했다. 동시에 나치 치하에 있던 시절 겪은 힘의 관계를 잊지 않았다. 약자들의 고통을 몸소 느낀 경험을 바탕으로 강자 맞춤형 국제정치이론인 현실주의(Realism)의 세계로 다가선 것이다.

 



국제정치 이론에 있어 현실주의는 국가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여긴다. 쉽게 생각해서 정의나 도덕을 추구하는 이상주의와는 결이 다르다고 보면 되겠다. 국가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선 기본적으로 강한 군대가 있어야 한다. 그들이 바라보는 세계는 힘에 의한 균형 유지(balance of power)로, 한쪽이 너무 세면 남은 여럿이 뭉쳐 견제를 함으로써 질서가 유지된다고 한다. 이 균형을 유지하는 단계에서 신뢰도 중요하다. 냉전시기 힘의 균형은 자유민주주의 진영의 미국과 공산주의의 소련이 중심이었다. 이들 사이에 낀 국가들로서는 생존을 위해 어느 편에 서야 할지 중요했다. 미국과 소련은 이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군사력과 더불어 약자들이 그들을 믿을 수 있을 수 있도록 믿음직스러움도 뽐내야 했다.


이러한 현실주의를 바탕으로 헨리 키신저는 세계사에 남을 만한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뽑아낸다. 가장 논란이 될 만한 건 베트남 전쟁이겠다. 그의 철저한 현실주의적 인식이 반영됐기도 했고, 미디어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전쟁의 참혹성이 알려져 그의 윤리적 결함이 고스란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키신저가 국가안보보좌관으로 나랏돈을 먹기 시작했을 당시 베트남 전쟁은 -ing였다. 남베트남 정권의 연이은 실패와 달리 북베트남은 국민삼촌 호찌민(Ho Chi Minh)과 호전적인 레 주언(Le duan)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미국이라도 승기가 보이지 않았다. 당장 베트남 내 여론이 '외세'인 미국이나 종교 탄압 및 부패로 얼룩진 남베트남 정권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이에 키신저는 미국 여론에 따라 군대는 감축시킴과 동시에 남몰래 비행 폭격은 늘리면서 윈윈할 수 있는 협상(남베트남 빼고)을 끌어낸다. 막바지엔 북베트남이 고집을 부리자, 하노이 부근에 전투기 B-52를 출격시켜 폭탄을 떨어뜨리기도 했다. 그렇게 협상에서 미국의 체면치레에 성공하자, 베트남에서 미국은 빠진다. 남베트남은 2년 후 북베트남에 흡수통일된다.


Woe to the statesman whose reasons for entering a war do not appear so plausible at its end as at its beginning (p. 488)


전쟁을 시작한 타당성이 종국에는 전과 같지 않다는 게 정치인으로서의 고민이다. 헨리 키신저가 존경했던 비스마르크의 격언이다. 키신저로선 베트남 전쟁에서 우아하게 발 빼는 게 중요했다. 베트남에서 미국은 이미 할 만큼 했었다. 20년에 가까운 전후 복구지원은 물론, 8년간 수많은 미군이 희생당했음에도 제대로 된 정부를 세우지 못한 것은 남베트남이었다. 동남아시아 내 공산주의 확대를 막겠다는 일념은 베트남 전쟁이 아닌 다른 방도로 가능해졌다. 키신저가 발품 판 덕에 중국은 물론 소련과도 데탕트가 이뤄져 원활한 관계가 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요리보고 조리 봐도 미국이 베트남 전쟁을 이어갈 이유가 없었다. 미국만 보고 자유민주주의를 따른 남베트남은 그렇게 버려졌다.


Covert action should not be confused with missionary work (p. 653)


이는 미국이 앞세우던 가치인 자유를 지키기 위해 이라크에서 싸우던 쿠르드족을 1975년에 지원하지 않기로 한 방침과 일맥상통한다(트럼프가 떠오른다!). 미국이 힘을 보태주는 건 자선 사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실주의에서 미국의 최종 목적은 자국의 이익이었다.




이렇게만 묘사하니 헨리 키신저가 굉장히 인간미 없고 냉혹한 인물로 그려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그의 자세는 정책을 그릴 때만이 아니라 회사에서도 그러했다. 그는 부하가 보고서를 써올 때면, 네가 쓸 수 있는 최고의 보고서냐고 다그쳤다. 여러 번 비슷한 반응을 보이자 부하는 역정을 냈고, 키신저는 그제야 보고서를 받아들였다. 자기가 읽어 볼만 하겠군이라는 말을 덧붙이면서(p. 195).  


성공적인 학계 생활 및 공직자로 인기를 얻자 할리우드 스타에 버금가는 인기를 얻기도 했다. 그가 성사시킨 회담들에 미국인들은 열광시켰다. 타임지 표지에 다수 등장했으며, 미국인이 뽑은 짱짱 정치인 1위로 뽑히기도 했다. 대통령인 닉슨을 밟고 올라 선 거라 닉슨은 물론 추후 모실 포드 대통령의 질투를 사기도 했다. 이런 인기를 발판 삼고, 특유의 유머감각을 무기로 여러 여인들과 데이트에 나서기도 했다. 이미 이혼을 한 상태기도 했고, 추후 부인이 될 낸시 키신저는 썸 탈 당시에 뉴욕에선 자기만 만나면 되고 나머지는 상관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세계적인 언론인 오리아나 팔라치(Oriana Fallaci)와의 인터뷰(p. 477)에선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I think that my playboy reputation has been and still useful because it served and still serves to reassure people. To show them that I'm not a museum piece. (... ) For me, women are only a diversion, a hobby. Nobody spends too much time with his hobbies. 


전형적인 구세대적 발상으로 점철된 인터뷰다. 그나마 변호할 게 있다면 헨리 키신저는 호색한은 아니었다. 키신저에게 여자들이 빠져드려고 하면 선을 그었다. 그 선을 넘을 수 있는 여인은 오롯이 낸시 키신저뿐이었다. 그는 학계 및 공직자의 딱딱한 이미지를 여러 여성들과의 데이트를 통해 상쇄시킴으로써 반전 이미지를 세우고, 대중의 관심을 즐겼다. 




논쟁적인 요소만 다루다 보니, 헨리 키신저의 부정적인 색채를 괜스레 돋보이게 한 것 같다. 그러나 키신저는 이것만으로 판단하기 아쉬운 인물이다. 중국, 소련과 정상회담을 갖게 한 것만이 아니라 데탕트를 통해 냉전 종식의 기초가 되는 군사비용 협정의 초석을 다졌다. 그리고 이집트-이스라엘 캠프 데이비드 협정을 통해 중동 내 오랜 갈등을 해소시킬 수 있는 발판을 깔아 놓기도 했다. 퇴직 후엔 글로벌 컨설팅 회사로 돈을 끌어 모으기도 했다. 그의 화려한 면모는 많지만, 개인적으로 여러모로 부족한 필력이 아쉬울 뿐이다.


한편, 헨리 키신저의 현실주의st 정치관 뒤엔 윤리 부족이란 오명이 늘 뒤따라 다녔다. 베트남 전쟁을 끝낸 것을 이유로 노벨 평화상을 받을 당시에도 그러했다. 이전 수상자는 그가 대학살을 일으켰는데 수상을 했다며, 분개했다. 그러자 키신저는 홀로코스트를 겪을 뻔한 어린 시절과 12명의 친척이 죽임을 당한 것을 시작으로 자신의 이야기(p.766)를 꺼냈다.


It was easy for human right crusaders and peace activists to insist on perfectionism in this world. But the policymaker who has to deal with reality learns to seek the best that can be achieved rather than the best that can be imagined. It would be wonderful to banish the role of military power from world affairs, but the world is not perfect (...) Those with true responsibility for peace, unlike those on the sidelines, cannot afford pure idealism. They must have the courage to deal with ambiguities and accommodations, to realize that great goals can be achieved only in imperfect steps. No side has a monopoly on morality. 


사람들이 평화를 말하는 건 쉽지만, 정책결정자는 최선을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최선을 만들어내야 한다. 군대가 없으면 당연히 좋지만, 세상은 완벽하지 않다. 이상을 꿈꾸는 사람들은 목표는 불완전한 과정을 통해 이룩할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달아야 한다.


나치의 구박과 홀로코스트의 문턱에서 빠져나온 헨리 키신저는 어린 나이 때부터 경험으로 세상이 완벽하지 않다는 걸 터득했다. 그리고 미국으로 건너가 당당히 고개를 들 수 있는 자유를 만끽하면서, 다름을 인정하는 것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힘이 있으면 질서를 세울 수 있었고, 신뢰가 있으면 다른 이를 우리 질서로 끌어들일 수 있다는 현실주의st 국제정치이론을 개인적으로 몸소 배운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키신저로 인해 죽음을 당한 혹은 희생을 한 사람들을 거론하며 돌을 던졌다. 키신저는 이들을 향해 말한다. 자신의 선택으로 많은 이들이 죽은 것은 맞지만, 그로 인해 많은 부모들이 무사히 집에서 아들들을 맞이할 수 있었고, 오늘도 우리는 평화롭게 발을 뻗고 누울 수 있었다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