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빵을 좋아한다. 이유는 모른다. 사무실이 유명 빵집 근처에 있어서 오래 다녔다. 금요일이면 퇴근길에 꼭 빵집에 들렀다. 휴일이란 느낌과 보상심리가 엮여서 빵이 좋아졌는지, 단순히 설탕에 중독된 건지 분간이 안 된다. 집에 빵을 좋아하는 사람도 없는데 혼자 애달파한다. 몇 년 전 건강검진 후 병원에 다시 불려 나갔다. 공복혈당이 심각하게 높은 탓이었다. 잔뜩 긴장한 나와 달리, 병원은 "검진 전날 뭐 드셨죠?"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나는 전날 공지대로 공복을 유지했었다. 찝찝한 맘을 뒤로한 채 집으로 돌아갔다. 이후 이상한 일이 종종 일어났다. 갑자기 눈앞이 점멸하다 사라졌다. 눈을 떴을 땐 바닥에 누운 채였다. 온몸이 감전된 듯 경련을 일으켰다. 스스로가 좀 웃기다고 생각했는데, 엄마 앞에서 쓰러진 뒤로는 웃지 못했다.
그 후로 홀로 다시 병원을 찾았다. 빈혈이나 여러 검사를 받았지만 혈압이 조금 낮고 기립성저혈압이 보일 뿐 모두 평균이었다. 안심하고 집으로 돌아온 날 또 바닥에서 눈 떴다. 밭에서도 몇 차례 쓰러졌다. 원인은 모르지만 쓰러지는 빈도가 잦아졌다. 딱히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은 맘은 없었지만 엄마 표정이 맘에 걸렸다. 일단 운동을 늘렸다. 스쿼트를 하면 혈당조절에 도움이 된다는 말에 하루 500개씩 했다. 새벽마다 등산하고 틈마다 자전거를 탔다. 이번엔 허리가 아팠다. 정형외과에서 처음 내 뼈와 마주했다. 의사가 아래쪽을 툭툭 가리키더니, 한쪽 뼈가 크게 타고나서 본래 잘 삐는 허리라고 했다. 그러니 어딜 가든 꼭 이걸 갖고 다니라며 허리보호대를 꽉 조여줬다. 아무래도 불편해서 결국 몇 번 착용하고 박아뒀더니 또 허리가 말썽이었다. 허리에 좋은 운동은 모르겠어서 윗몸일으키기를 시작했다. 뱃심이라도 길러볼까라는 귀찮은 맘 때문이었다.
나이가 들면 살기 위해 운동을 한다더니, 어째 운동을 해도 나아지질 않았다. 오히려 아픈 곳이 늘어나는 듯한데, 해서 이 정도만 아픈 건지, 뭔가를 잘못한 건지 감이 안 왔다. 그러면 어디 트레이닝이라도 받으러 가야 맞지만 한정된 공간에서 같은 동작을 반복하는 행위가 지루했다. 산은 몇 시간이라도 타겠는데, 실내 자전거나 운동은 십 분만 해도 질렸다. 뛰라고 해서 뛰기도 싫었다. 버티는 힘도 적어서 금방 몸을 풀었더니 기구에 부딪힐 뻔했다. 고약한 성격과 수줍은 성정이 겹쳐서 여럿이 한 공간에 있는 상황도 불편했다. 결국 나는 새벽 일찍 산으로 향했다. 계절마다 달라지는 풍경을 보고서야 직성이 풀렸다. 인적 드문 새벽 산에는 새가 많았다. 노란 꾀꼬리도 보고, 호랑지빠귀 울음도 듣고, 다람쥐도 봤다. 그게 너무 재밌어서 멈출 수 없었다. 산 중턱 공터에서 맞는지 틀렸는지 모를 운동을 혼자 하고 적당히 만족하며 내려왔다.
식단조절을 병행했다. 처음에는 토마토나 야채를 주로 먹고 빵은 완전히 끊었다. 과자도 먹지 않았다. 의도치 않게 몸이 가벼워졌다. 간사하게도 좀 나아지니 다시 빵을 찾았다. 내 딴에는 두 개 먹을 걸 하나로 줄였는데, 혈육이 묘한 표정으로 나를 봤다. 차마 말하진 않지만 눈에 '당 줄인다고 하지 않았니?'라고 쓰여 있었다. 눈치를 보면서도 먹는 걸 포기하지 못했다. 나름 생각해서 통밀이나 호밀빵만 먹었다. 그것도 빵이긴 한데, 아무튼 건강하지 않냐고 변명했다. 그렇게 하나 둘 사 먹으니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심지어 원하는 빵을 판매하는 가게도 멀었다. 성분도 명확하지 않았기에 결국 직접 만들기로 했다.
통밀을 구매해서 인터넷 레시피대로 반죽했다. 오븐은 없으니 에어프라이어로 구웠다. 결과는 처참했다. 레시피대로 했는데도 안쪽이 익지 않고 떡처럼 뭉쳤다. 조금씩 방법을 바꾸며 몇 차례 시도했지만 나아지진 않았다. 조금만 더 하면 성공할 듯한 맘에 포기하질 못했다. 그렇게 반복하다 목적이 바뀌었다. 빵을 만들어야 하는데 반죽이 좋아졌다. 찰흙 같은 촉감은 물론 발효로 부푼 토실한 모습도 좋았다. 구수한 효모 냄새, 밀대에서 가볍게 떨어지는 느낌, 손 안에서 둥글게 바뀌는 모양이 재밌었다. 두 시간 넘게 정성껏 발효하고 예열한 에어프라이어에 넣고 나면 마음이 완전히 떠났다. 빵이 잘 구워졌는지 맛있는지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결과를 보기 싫은 성정 탓인지, 좀체 나아지지 않는 현실을 외면하고 싶은 탓인지, 정말 반죽만 즐거웠는지 모르겠다. 실패나 성공은 내게 상관이 없었다. 그저 반죽이 재밌고, 등산이 즐거우면 그만이었다. 아무래도 철들긴 그른 듯싶다.
한동안 매일 빵을 만들었더니 금방 질렸지만, 이상한 도전 의식 때문에 또 밀가루를 꺼냈다. 뒤에서 지켜보던 혈육이 "맛있는 빵집이 가까이 있는데 사 먹는 게 어때?"라고 물었다. 산책 겸 걸어서 다녀오든지라고 혼잣말처럼 제안했다. 마침 휴일이었고, 미루던 원두가 저렴하게 나와 구매한 참이었다. 몇 번 갈등하다, 결국 원정에 나섰다. 그날은 태풍 끄라톤 경로로 뉴스가 시끄러웠다. 바깥은 스산한 바람이 불었다. 어둑한 하늘을 보다가 지하로 향했다. 여름내 더러워진 자전거를 꼼꼼히 닦았다. 자물쇠를 풀고 페달을 밟는데 바퀴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앞뒤 바퀴 모두 납작하게 바닥에 붙어 움직이질 않았다. 포기해야 하나, 하는데 머리에 전날 상상한 크로와상이 떠올랐다. 역시 선선한 가을에는 산책을 해야지, 라며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걸은 지 40분, 하늘에서 쿠르릉 소리가 났다. 아직 빵집은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공원을 벗어나니 길인지 도로인지 모를 골목이 이어졌다. 비좁은 길은 더럽고 냄새가 났으며 오가는 차량과 뒤섞여 불쾌했다. 서늘한 바람에도 땀이 배어 나왔다. 이렇게까지 빵을 먹어야 하나 싶다가도 가까워지는 거리에 고조됐다. 11시가 되어 도착한 빵집은 아직 빵을 굽는 중이었다. 식빵과 바게트는 아직이었지만 매대 대부분이 채워져 있었다. 구매할 빵은 정했지만 매장을 한 바퀴 빙 돌았다. 노란 불빛 아래 발갛게 익은 빵이 노릇한 향을 풍겼다. 식욕을 억누르고 몽블랑과 어니언 베이글만 사서 나왔다. 휴일 분위기를 만끽하며 가게에 나온 순간 또 길 같지 않은 길을 마주했다. 집으로 가는 길은 3.5km, 아직 1시간 거리였다.
12시가 조금 넘어 도착한 뒤로 청소하고, 빨래하고, 샤워했다. 순식간에 준비를 마치고 봉투에서 봉긋하게 솟은 몽블랑을 꺼냈다. 패스츄리로 겹겹이 쌓아 올린 결, 버터가 잔뜩 스며들어 반짝이는 표면, 향긋하고 달달한 냄새가 오감을 자극했다. 갓 내린 커피를 잔에 나눠 담고 결 따라 뜯어낸 조각을 베어 물었다. 2만보의 여정이 아깝지 않았다. 아니, 빵을 먹기 위해 그 정도 거릴 걸으면 운동도 되고 빵도 먹으니 도랑치고 가재 잡기 아닌가 싶었다. 이미 다음번 여정도 계획했다. 그게 뭐라고 생각만으로 두근댔다. 동시에 아직 완치되지 않은 몸이 떠올랐다. 한숨이 나왔다. "다음 생에는 췌장 큰 서양인으로, 기왕이면 주식이 빵인 국가에서 태어나고 싶다"고 하자 혈육이 "그렇게 빵이 좋냐"고 물었다.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다가도, 납득하는 걸 보면 나는 역시 빵이 좋은가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