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나의 집에는 책이 거의 없었다. 아이가 읽을만한 건사슴 밤비 이야기가 있는 동화전집 1질, 퀴리 부인 등 스무 명의 역사적 인물을 그린 만화 위인전 1질,그 정도가 전부였다. 그나마 다 얻어온 책들이었다.
우리 집은 가난했고, 어른들은 과수원 농사를 짓느라 바빴으며 아이들 교육이나 삶의 질 같은 것에는 큰관심이 없었다.
그리고 나는 책 읽기를 좋아했었다.
책을 볼 때는 심심하지도 않고 외롭지도 않았다. 커서는 친구 덕에 도서관을 알게 되어 학교가 일찍 끝나는 토요일이면 종종들러책을 고르는 즐거움을 누렸다.
마땅히 읽을 게 없으면 달력 아래의 광고 글씨들, 벽에 붙어있는 포스터에서 탄저병같은 사과병 이름과 다이센 엠같은 농약 이름을외울 정도로 들여다봤고.교차로 신문이나 가계부 구석구석에 인쇄된 생활 정보, 굴러다니던얇은 잡지에 실린 우습거나야릇한 이야기들도 몇 번이고 읽었다.
몇 안 되는어른 책 중에는 시집간 고모가 남겨둔 <로미오와 줄리엣>이 있었다. 오래된 문고판의 작고 도톰한 책에 깨알만 한 글씨들이 빼곡히 쓰여있었다. 셰익스피어라는 이질적인 발음의 작가가 쓴 이것이야말로 진짜 책이라고 느꼈다.어린 내가 보기에 우리 집에서 가장 고급진 물건이었고, 지적인 어른의 상징 같았다.그래서 정작 그 책은 읽지를 않고 늘 바라만 보았다.
나중에 고등학생쯤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을 읽고서내친김에로미오와 줄리엣도 당시새 책으로 읽었는데, 막상 유치한 사랑 이야기여서 조금은 실망스럽기도 했다.
다만 고모가 읽은 책을 내가 커서 같이 읽다니 좀 묘한 느낌이 있었다.
고모는 왜 이 책을 샀을까,어떤 생각을 했을까, 혹시 이런 비극적인 사랑을 동경했을까 궁금하기도 하고.
지금 우리 집 거실의 한 면은 전부 책장으로 되어있다.
소위 책 육아라는 것을 선호해서도 아니고, TV가 없어서도 아니다. 계속 꺼내봐야 하는 전공서가 많아서 책 놓을 공간이부족하기 때문에 거실을 활용하고 있는것뿐이다.
아래쪽에 아이들 책도 있지만, 전체 책장의 절반 이상은 어른들 책이다.전공서 외에 나는 소설과에세이, 육아서가약간 있고, 남편은 역사서와 존경하는 인물의 자서전등을 가지고 있다.(만화책은 별도 보관 중이고.)
이렇게 늘 보는 곳에 책이 나와 있으니 아이들이 언젠가 크면 엄마인 나의 책에 관심을 보일지 가끔 궁금해진다.내가크면서 <로미오와 줄리엣>을 우러러보고 특별하게 여겼던 것처럼, 혹시 그럴지...
난 은희경 작가님의 작품에 담긴 냉소적인 느낌이 좋은데 딸도 그런 취향을 선호할지... 아니 아들이 좋아할 수도 있겠지... '삶은 농담'이라는 말을 가지고 서로 의견을 나눌날이올까? 그 시간이 기대만큼 풍요로울까?
어느 날, 다 큰 아이가 <채식주의자>나<상실의 시대> 같은 책을꺼내 읽으려고 하면 어쩌지?
워낙 유명하고 문학성 면에서 극찬하지만, 일부적나라하고 짙은 그 묘사들을 읽으면?
김애란작가님도식물을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그 책을 시누이에게 빌려주고는 형부와 처제의 이야기 때문에 아차 싶었다고했는데...
그렇다고 <소년이 온다> 같은 시의적작품이라해도또 어찌읽히겠는가.
읽고 나서 3일은 꼬박 심장이 조여왔는데.
읽으면 끔찍한역사가 생생하게 다가오는 충격을받을텐데 어떻게 지켜보지?
아직은 내 책 중에서 테두리가 노랗게 변한<어린 왕자>에 관심 갖는 딸이라 다행이다.새 책도 있는데 굳이 옛날 책을 가져가더니만, 어른들을 위한 동화라 그런지 아이는 아직 별 감동 못 느끼고 돌려주더라만.
쓰고 보니 쓸데없는 고민 같기도 하다. 나야 자라면서 부모님과 책 한 권을 같이 읽지 못했지만, 우리 아이들은 다른데... 더 어려서는그림책을 함께 보았고, 요즘에는 장편 동화책을 가끔 같이 읽듯이, 앞으로도 자연스럽게 우리의 독서는 이어질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