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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아보다 Oct 15. 2019

언론과 대중의 폭력


어제와 다르지 않은 오늘


1990년대 어느 연예인은 동료 연예인과의 결별 소식이 전해진 후 대중에게 사과해야 했고, 2000년대 초 어떤 연예인은 열애설이 터지자 기자회견을 해야 했다. 2000년대 중반에는 연예인들의 극단적 선택 소식이 줄이었다. 표현의 자유는 고사하고 사생활조차 보호받지 못하는 것이 연예게 환경이었다.


오래된 이야기 같지만, 사실은 작금의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연예인에 대한 인식은 개선되지 않은 채 오히려 인터넷을 통해 ‘연예인을 갖고 노는 문화’가 확장됐다. 아는 사람만 알던 연예계의 뜬소문들은 인터넷을 통해 불특정 다수에게 배달됐고, 대중은 이를 소비할 뿐만 아니라 생산하기도 했다. 인터넷 문화가 발달한 뒤, 연예인들이 헛소문이나 악성 댓글로 상처받는 사례는 셀 수 없다. 수많은 이들이 떠났고, 그때마다 언론 보도 문화와 인터넷 댓글 문화에 대한 논의가 줄이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언론의 사생활 꼬투리 잡기와 선정적 보도는 인터넷 기사 조회 수 상위권을 차지했고, 비난 · 비아냥 · 폭언 또한 전혀 줄지 않았다.


예전보다 조금은 나아졌다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은 ‘연예인들의 직접 고소’ 정도이다. 그 전에는 ‘이미지 악화’를 우려해 참아내야 했던 것이 현실이다. 연예인으로서의 생명을 부여하는 대중을 연예인들은 떠받들어야 했고, 불특정 다수의 대중은 힘을 얻었다는 듯 그들 위에 군림했다. 연예인들은 누구보다 잘 보이는 사람들인 동시에 사람으로 여겨지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고소는 해결책이 아니다. 명예훼손죄와 모욕죄로 악플러들을 고소하면 된다는 사실을 연예인들은 누구보다 잘 안다. 자신에 대한 악성 댓글로 인한 스트레스, 소송 준비 및 진행 과정의 피로감, 대중으로부터 외면받을지 모른다는 불안감 등은 고소를 통해 해결할 수 없다. 고소에 대한 기사가 나면 그 아래에는 ‘나도 고소해보라’는 식의 조롱이 뒤따른다. 그것이 지금 인터넷 문화의 민낯이다.




언론의 경거망동과 대중의 폭력


악성 댓글로 인한 후유증으로 한 차례 활동을 중단했던 연예인에 대해 다룰 때에도 여전히 언론은 자극적인 보도를 일삼았다. 비슷하게나마 표현할 수도 없는 선정적 어휘들을 남발해가며 대중의 이목을 끌고 조회 수를 높였다. 말의 앞뒤를 잘라 해당 연예인에 대한 온라인 집단 린치를 유도했고, 사안의 맥락을 제거해 슬픔과 화를 표출하는 연예인들의 건방진 행태를 문제 삼았다. 소셜 미디어에 게시된 그들의 글 한 줄, 라이브 방송에서 이루어진 말 한 마디에 대해 언론은 빠짐없이 보고해댔다. 사안의 경중을 따지지 않고 퍼나르기 바빴고, 불리하면 언론의 자유를 들이대며 남의 살을 깎아댔다. 마치 연예인들의 목숨이 자신에게 있기라도 한 듯, 연예인이란 으레 그래야만 하다는 듯 취재력을 낭비하고 한국기자협회 정관 및 ‘자살보도 권고기준 3.0’ 등은 너무도 쉽게 무시했다. 여전히 언론은 반성과 성찰의 의무를 악플러들에게 떠넘기고 있다.


언론이 가볍다면 대중은 폭력적이다. 언론이 ‘언론의 자유’를 들먹였다면, 악플러들은 ‘표현의 자유’를 끌어 왔다. 표현의 자유는 분명, 타인의 삶을 침해하지 않고 국가 법질서를 위해하지 않아야 한다는 조건은 지금도 철저히 무시되고 있다. 본인이 듣고 싶지 않을 말들을 본인들은 너무도 쉽게 했고, 다른 사람에 대한 판단을 너무 쉽게 해댔다. 연예인에 대한 자극적 · 선정적 기사들을 비판하는 대신, 조회 수 상위권으로 올려 주었다.


물론 개인이 어떤 사람을 좋아하거나 좋아하지 않는 것은 자유의 영역이 맞다. 모든 연예인을, 모든 사람을 좋아하라는 뜻은 전혀 아니다. 그러나 단순히 싫어하는 것과, 그것을 표현하는 것은 분명 구분되어야 한다. 이른바 ‘소신’ 발언이나 행동, 즉 본인의 심기에 거슬리는 언행의 뒤에는 어김없이 악성 댓글이 줄을 이었다. 그것들은 분명, ‘정당한 비판’으로 보호받을 수 없는 것들이 대다수였다. 악성 댓글로 고통을 호소한 이들 중 대다수는 중범죄자도 아니고 심각한 윤리 의식을 위반한 경우도 아니었다. 자신의 악플 작성은 표현의 자유이지만 연예인의 사생활과 발언은 표현의 자유가 아니라는 식의 이중 잣대, 힘있는 사람은 비판하지 못하고 애먼 연예인을 상처낸 다음 그 상처를 조롱하는 추악한 민낯이 기어코 한 사람을 죽였다.


이에 그치지 않는다. 언론은 악플러들에게, 악플러들은 사방의 다른 사람들에게 책임을 전가하기 바쁘다. 선정적이고 비인간적인 기사의 조회 수를 올려주고, 악성 댓글에 좋아요를 누르던 이들은 전부 어디로 갔는가. 그러한 현실에서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기에 스스로도 그렇게 떳떳하지는 못하지만, 최소한 말 한 마디와 글 한 줄에서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지 않는 언행은 한 적이 없다. 글 한 줄의 무서움을 직간접적으로 겪어 본 입장에서, 사람을 여전히 무서워하는 입장에서 최소한 ‘사람은 사람으로 대접하자’는 것이 일종의 신조가 되었다. 이번 사안에서도 여전히 반성해야 할 일을 찾고 있는 중이며, 사회 구성원으로서 도의가 무엇인지 스스로 끊임없이 되묻고 있다. 그런데 진짜 책임 있는 사람들은 왜 서로 떠넘기기 바쁜 것인가?





스트레스 관리


조금 다른 시각도 필요해 보인다. 결국 근본적인 문제는 악성 댓글과 언론의 여론몰이이지만, 연예인의 정신질환에 대한 인식 또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많은 연예인들이 정신질환 진단과 처방된 약물 복용을 언급하는 것은, 일종의 살려달라는 신호와 같다. 아직도 치부 정도로 취급되는 정신질환을 내놓고 언급해야만 그 고통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그런 연예인들에게 ‘너도 공황장애냐’라며 악성 댓글이 달린다. 이는 분명 자신의 스트레스나 정신질환을 관리하지 못하거나, 이러한 행위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는 이들의 행위이다. 악성 댓글을 다는 행위나 그런 사람을 비호할 생각은 없지만, 그들이 왜 그러는지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데, 대부분 자존감과 스트레스가 주 원인으로 지적된다. 자신의 스트레스를 감당하지 못하거나, 자신의 정신질환 여부를 인지하지 못한 이들이 악성 댓글을 단다. 타인의 목숨이 오가는 행위를 ‘놀이삼아’ 즐기는 것인데, 타인에게 위해를 가하는 행위가 사회 생활에의 부적응임을 인지하지 못하는 단계에 이른 것이다. 이들 자체도 또한 적절한 치료와 대처가 필요한 수준이지만, 현 사회에서는 방치되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 스트레스 관리 미비, 정신질환 경시 풍조, 대처 시설과 체계의 미흡이 또 다른 정신질환자를 양산하고 있으며, 이들은 자신이 정신질환을 앓고 있거나 그럴 위험이 크다는 걸 인지하지 못한 채 다른 이들을 끊임없이 괴롭히고 있다.





내일은 사람이 사람으로 대접받을 수 있을까


연예인들은 누구보다 잘 보이는 사람들인 동시에 사람으로 여겨지지 않는 사람들이다. ‘연예인도 사람이다.’라는 문장 아래 모 온라인 매체의 폐지 주장이 일기도 했지만 이내 그쳤다. 연예인들은 여전히 ‘즐길 거리’ 이상의 대우를 받지 못하며, 동료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에서조차 악성 댓글을 마주해야 한다. 누군가의 지적처럼, 사람들은 엄청 화가 나 있고, 자극과 분노가 임계치에 도달했다.


알 수 없으니 함부로 동정할 수 없다고 말하던 어느 영화가 생각난다. 철저히 눈에 보이는 것들로만 평가되는 연예인들이지만, 함부로 동정할 수 없듯 함부로 판단할 수 없다. 언제나 웃는 모습이 사진으로 남아서, 악성 댓글에도 어떻게든 대처해내던 모습이 보여서, 악성 댓글을 읽는 프로그램의 진행자를 맡아서, 소셜 미디어에서 밝은 모습이 보여서, 그리고 많은 이유로 그 사람에 대해 함부로 판단했던 대중은 뒤늦은 사과를 하려 한다.


자타에 있어 인격을 언제나 동시에 수단으로 대하지 않고 목적으로 대우하는 내일이 올 수 있을까.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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