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잃지 않으면서 상대에게 맞추는 방법
상대방에 맞춰서 상대방의 입장/상황/관점을 이해하고 가치를 전달한다는 것은 합리적인 이야기이지만 어떻게라는 질문이 항상 따라옵니다. 질문이 항상 따라올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군가와의 커뮤니케이션 과정에서 매번 실패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의도를 상대방이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니고 딱 맞게 이해시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과거의 내가 한 일을 오늘의 내가 보면 허점이 보이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보면 상대방의 마음에 들게 딱 맞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확한 지점을 맞는 것을 목표로 하면 인생이 피폐해집니다. 매일의 내가 다르듯이 상대방의 상황/감정/이해 등 모든 것이 매일 달라집니다. 흔들리고 보이지 않은 과녁을 정확히 맞히려고 하면 아무리 화살을 쏴도 맞출 수가 없습니다. 우연히 한번 맞추더라도 재현성이 없기 때문에 그 이후에는 반복되는 좌절만 겪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로 결정을 못하고 갈팡질팡하며 이러면 이것이 문제고 저러면 저것이 문제라는 무한 걱정의 궤도에 오르게 됩니다.
직장인의 현실적인 이야기로 말하자면 상대방에게 가치를 전달하기 위한 글(보고서/메일/구두보고 등)을 쓸 수가 없습니다. 걱정이 많으면 방향성이 분명하지 못하고 방향성이 분명하지 못하면 깊게 들어갈 수 없습니다. 내용은 많은데 분명하지 못하고 뭘 이야기하는지 모르는 글이 됩니다. 걱정을 해소하고자 얇고 넓게 쓴 글이 논리의 허점이 되어 비수로 다시 돌아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돌파구는 다시 근본으로 돌아와 기획의 목적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상대방에게 가치를 전달하기 가장 용이한 목적을 핵심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우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하나의 기획은 다양한 효과를 낼 수 있습니다. 이때 메인이 되는 효과를 목적으로 설정하고 나머지를 기대효과로 표현하는데, 목적이라는 가장 큰 방향성을 상대방에게 맞추는 것이 방법입니다.
가령 본래 50개의 개별 프로젝트의 의사결정을 받았던 것을 한 번의 의사결정으로 통합하는 기획을 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통합의사결정에는 다양한 효과가 있을 수 있습니다. 관련된 프로젝트를 함께 보고 결정함으로써 전략적 판단을 잘할 수도 있고, 중복되거나 누락된 과제를 찾아낼 수도 있습니다. 또한 의사결정의 수가 줄어들면서 그것을 준비하기 위한 공수를 줄이고 기간을 단축할 수도 있습니다. 뿐만이니라 다양한 부서의 이해관계를 조정하여 시너지를 높이는 용도도 있습니다. 해당 영역에 소요되는 전체 비용이 너무 커지지 않도록 한 번에 보면서 어느 정도 수준아래로 통제하는 효과도 있습니다.
이때 만약에 상대방이 뭔가 성과를 내야 되는 상황이고 조직도 성장하고 있는 상태라면, 통합 의사결정의 전략적 기능을 목적으로 강조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상대방이 현재 일을 확장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일이 잘못되는 리스크를 줄이는 것이 중요하고 조직도 성장이 정체되었다면, 통합 의사결정의 비용통제/절감효과를 강조할 수도 있습니다.
이때 상대방에게 맞지 않는 목적을 앞으로 내세우는 순간 가치의 전달은 성공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방향이 맞다면 세부 정확한 지점이 맞지 않더라도 그것은 어떻게든 보완할 수 있습니다. 같은 자리에서 걱정만 하고 뱅뱅 도는 것이 아니라 한걸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지요. 또한 모든 상대방은 너무 바쁘기에 큰 방향성이 맞다면 디테일은 그냥 넘어가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나하나 챙겨서 이야기하기도 어렵기도 하고 좋게 말하면 디데일은 담당자가 챙겨야 할 영역으로 권한위임을 해줍니다.
기획의 많은 효과 중에서 핵심 목적을 상대방에게 맞추는 방법은 실무적으로도 큰 장점이 있습니다. 상대방에게 맞추는 과정에서 기획의 본질이 흔들리고 내용이 전부 바뀌는 것이 아니라 표현하는 방식만 바꾸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면 기획서를 전부 갈아엎는 것이 아니라 맨 앞의 목적과 맨 뒤의 기대효과의 순서만 바꾸는 것입니다.
이는 실무적인 효용도 있지만 더 중요한 장점은 나의 중심을 잃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포장지는 바꾸지만 그 안의 내용물이라는 나의 생각의 정수는 유지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내용물까지 상대에 맞추려고 하면 어느 순간 원래 내가 하려고 했던 기획의 시작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더 심각한 상황은 주체성을 잃어가며 결국 엄청난 감정노동의 늪에 빠지게 됩니다.
나의 주체성과 본질을 유지하면서도 상대방에 맞추는 것이 이 글에서 소개한 작은 팁의 가장 큰 효과입니다. 동시에 이 글을 기획한 목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