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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지영 Nov 10. 2019

탈진한 채 오른 메라 피크

내 안의 답을 찾기 위해...

메라 피크(Mera Peak)는 네팔의 사가르마타 지방에 있는 산이다. 

 히말라야 산맥의 일부로 높이는 6,476m로 트레킹 봉우리 즉, 피크(peak)로 분류된다. 초등은 1953년 5월 20일 지미 로버츠(Jimmy Roberts) 대령과 세르파 센 텐징(Sen Tenzing)으로 알려졌다. 네팔 정부가 지정한 33개의 피크 중 가장 높은 봉우리로 정상에 오르면 에베레스트와 로체(Lhotse), 초오유(Cho Oyo)를 비롯한 히말라야 연봉들이 눈에 들어온다. 고도에만 적응하면 기술적으로 오르기 쉬운 산이기 때문에 등반 경험이 없는 트레커들도 도전할 수 있다.

 따뜻한 봄의 시작을 알리는 랄리그라스가 만발한 사가르마타 국립공원의 아름다움을 뒤로 하고 남체바자르를 거쳐 루클라로 내려와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임자체를 함께 한 가이드가 지도 하나를 툭 던지고는 옆에 앉는다. 뭔가 하고 펴보니 ‘메라 피크’라고 적혀 있다. 6,476m. 임자체를 다녀와 채 하루도 되기 전에 또 다시 어딜 가자는 것인가 묻는 내게 유창한 영어로 하는 말이 “너는 고소 없이 피크를 잘 마쳤고, 시간도 된다 하니 메라 피크를 해보자.”

 “메라 피크나 한 번 가볼래?” 가이드의 친구가 카레에 장비 렌탈까지 해줄 수 있으니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였고 당시 무사히 임자체를 마치고 온 나에게는 정말 달콤한 유혹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 해보자.” 마음을 다잡고 가이드가 준 지도를 펼쳐보았다. 임자체와는 달리 처음부터 내가 전혀 가보지 않았던 새로운 여정이라 더더욱 가고 싶었다. 임자체 때처럼 망설이거나 하지 않고 무료 렌탈이라는 꿀떡을 넙죽 받기로 하고 서울의 가족에게 뻔뻔하게 자금 원조 요청을 하고 다시 한 번 피크 준비를 시작했다.

임자체 다녀와 제일 먼저 한 것이 목욕이었는데 이번에도 또 언제 씻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롯지 사우니에게 핫샤워 비용을 내고 깨끗이 목욕을 했다. 베이스캠프에서 먹을 음식을 챙기기 위해 루클라의 이곳저곳을 다니며 말린 과일, 견과류, 한국 라면 (너무 비싸다ㅠㅠ) 등을 사며 등반을 준비했다. 꼼꼼하게 준비를 마치고 짐까지 다 챙겼다. 문제는 돈이었다. 제일 중요한 게 돈인데, 서울에서 보냈다는 돈을 은행에 가서 찾으려 해도 이상하게도 없다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한국과 네팔의 휴일이 기묘하게 맞물려서였다. 반나절을 더 기다려서야 돈을 찾을 수 있었다. 결국 새벽부터 짐을 챙겨놓고는 점심 먹을 무렵에야 길을 떠났다.

루클라에서 제일 유명한 텐징 힐러리 공항 쪽 자그마한 불교 사원으로 가는 계단을 올라 병원과 학교를 지나 5km 정도 가니 들꽃이 만발한 추탕가(3,125m)가 나왔다. 이미 봄이 성큼 다가와 들꽃들이 우리를 맞이하였다. 따뜻한 느낌의 4월, 익숙한 에베레스트의 봄이다. 그때는 몰랐다. 4월의 밤이 그렇게 추울 수 있다는 것을. 

저녁을 먹기 위해 모인 자그마한 부엌에 모였다. 그날 만난 3팀이 전부였으며 열악한 시설 덕분인지 가이드도 게스트도 모두 한데 모여 달밧을 먹으며 자신의 여행담을 쏟아내느라 여념이 없었다. 티벳식 부엌에서 불을 떼기에 바쁘던 여주인이 갑자기 큰 통을 들고 나와 보여주었는데, 놀랍게도 네팔에서는 처음 보는 김치였다. 게다가 네팔 여인인 사우니가 직접 만든 것이라며 자그마한 접시에 덜어주며 맛보란다. 그 당시 약 두 달이 넘게 네팔에 있던 내게는 금쪽 같은 김치였다. 사실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시큼하게 익은 김치는 정말로 내 스타일이라 네팔식 달밧에 나온 싹(달밧에 함께 나오는 네팔 채소 볶음)과 함께 많이 먹었다. 그렇게 잘 먹는 나를 만족스레 웃으며 지켜보더니 부엌에 있는 항아리에서 하얀 액체를 그릇에 덜어 난로 위에 얹어 데우더니 컵에 따라주며 마셔 보란다. 네팔 말로 창이란다. 


평소 곡주를 먹으면 탈이 나곤 해서 조심스레 입에 대어 보니 막걸리와는 달리 시큼한 맛이 나며 묘하게 뒷맛이 깨끗하여 감칠맛이 났다. 즐겁게 저녁 식사를 하고 잘 시간이 되어 방으로 간 나는 깜짝 놀랐다. 나란히 방이 3개 있는 건물이었는데 방과 방 사이의 벽이 간이 테이블 덮개로 쓸 듯한 두터운 비닐 벽이었던 것이다. 옆 방 사람이 뒤척이는 소리, 잔기침 소리가 마치 바로 옆에서 자는 것처럼 큰 소리로 들려 밤새 추위와 소음으로 숙면을 취하기 힘들었다. 그동안 내가 갔던 롯지들 중 가장 시설이 열악했다. 임자체의 텐트보다 못했다.

둘째 날, 3,000m대의 추탕가에서 아침 일찍 출발 급경사를 이동하여 4,077m의 키르키탱으로 이동하였다. 야크 떼가 뜯기 좋을 정도의 수풀이 우거진 급경사를 오르다 작은 집들이 몇 개 붙어 있는 모습이 보였다. 롯지는 대여섯 개 뿐이었지만 양지 바른 곳의 탁자에는 이미 유럽인 서너 명이 모여 앉아 레몬티를 홀짝이며 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가장 큰 롯지에는 이미 사람들이 들어차 있어 들어가기 싫었던 나는 그 옆의 작은 롯지로 들어갔다. 롯지 여주인이 반갑게 우리를 맞이하며 차를 권하여 차 한 잔을 기울이며 이제는 익숙해진 달밧을 주문하였다. 물론 ‘소금 조금 넣고 싹 많이 주세요’를 서툰 네팔 말로 하자 함박웃음을 지으며 알았단다.


밥을 기다리며 밖으로 나가 본 키르키탱의 주변도 이전에 가본 에베레스트의 모습과는 달리 상업적인 느낌보다는 정감이 가는 모습이다. 주변을 서성이며 사진도 찍고 햇볕을 쬐고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안개가 자욱하게 발아래로 깔리며 분위기가 음산해진다. 걱정하며 안에 있던 가이드와 사우니가 나와 어여 들어와 밥 먹으란다. 점심으로 나온 달밧은 그동안 내가 먹어본 그 어떤 달밧보다 맛이 있어 깜짝 놀란 나는 처음으로 밥을 더 달라 청해 더 먹었다. 이제는 나도 네팔 음식에 완벽 적응된 걸까? 아니면 이 사우니가 음식을 잘하는 걸까? 그렇게 앉아있다 조금 늦게 들어온 유럽 손님들과 이번에도 저녁을 함께 하고 방을 달라고 청했더니, 아니 이게 웬일인가? 거실 같이 생긴 방에서 다 같이 모여 자는 거란다. 다른 사람들은 익숙한지 몰라도 그동안 항상 개인룸에서 잠을 자곤 했던 나는 깜짝 놀랐지만 깜깜한 밤에 다른 롯지에 간다고 할 수도 없어 사우니가 마련해 준 공간에 나의 구스 침낭을 깔고 입은 옷 그대로에 이만 겨우 닦고는 자리에 누웠는데 여러 명이 모여 있는 공간에 부엌에서 나오는 열기까지 더해져 생각보다 아늑하였다. 


셋째 날, 걱정과는 달리 날씨가 맑아 이른 아침을 먹고 이젠 익숙해진 고양이 세수에 초간단 양치를 한 컵으로 끝내고 입던 옷 위에 겉옷을 겹쳐 입고는 출발을 서둘렀다. 키르키탱에서 살짝 올라간 자트랄라 패스가 있어 잠시 들러 패스를 상징하는 곳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다시 고도를 낮춰 내려간 툴리카르카까지는 비교적 수월했다. 하지만 여기서도 역시 추운 밤은 나를 힘들게 하였으나 뜨거운 물을 넣은 병을 끌어안고 겨우 잠들 수 있었다.


다음날도 아침 일찍 일어나 쿠얼라강을 끼고 난, 길 같지 않은 길을 지나자 강에서 피어난 물안개 때문인지 시야가 어둡고 흐린 지형을 지나야 했다. 여기부터는 유럽에서 온 단체 팀이 나타나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다. 유럽인들이 천천히 걷는 모습을 보며 우리 가이드는 “베이비 워킹” 하고 웃으며 말한다. 맞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고산을 지날 때 오버페이스하지 않는 유럽과 일본인들의 아기와 같은 워킹을 배워야하지 않을까. 이들은 가는 동안 비록 느리지만 대그룹에서 흔히 일어나곤 하는 단체 고산증을 보이지 않는 것 같다.

  강을 따라 난 커다란 돌을 뜀뛰기 하듯 건너뛰며 재미있게 가다 보니 어느 새 고테 입구가 보인다. 이곳은 그나마 메라 피크를 지나는 중 본 롯지들 중 제일 나은 시설이었는데 짐을 풀고 나오니 다이닝룸에는 아까 본 대그룹이 한가득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동안 여러 번 트레킹을 경험하며 낯가림이 많이 나아졌다고 생각하며 안심하고 있었는데 이런 대그룹 속에서 늘 혼자인 나는 오늘따라 유난히 외로움을 느끼게 된다. 섞이지 못하고 앉아 있다가 참기 힘들어 주변을 돌아보기로 하고 나갔다. 바로 옆에 색색의 빨래가 널려 있고 핫 샤워 시설이 잘 되어 있는 건물로 다가가니 그곳이 바로 트레커들이 꼭 지나가야 하는 체크 포스트다.

 주변을 더 돌다보니 누가 키우는지 모르지만 염소 가족이 나와 풀을 뜯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빤히 나를 바라본다. 한국이었다면 도망갔으리라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빙그레 웃음이 나온다. 다시 롯지로 돌아오자 유럽인들이 더 많이 나와 내가 앉았던 자리까지 점령하고 있다. 그 모습을 본 가이드가 키친에서 나오더니 손짓하며 안으로 들어오란다. 멈칫거리며 들어가자 그곳에서는 여러 명의 가이드가 롯지 사우니의 지휘 하에 감자튀김을 하고 있었다. 우리나라 80~90년대에서나 봤을 듯한 기름 버너에 불을 붙이고 그 위에 기름을 넣고 튀기는데 신기하고 어디서도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그렇게 대그룹의 저녁 준비가 끝나자 나의 달밧이 나왔는데 먹고 있는 내게 롯지 주인 사우지가 미안했는지 퉁바(수수로 만든 발효주로 도수가 낮음) 한 개를 담아 젓가락처럼 생긴 쇠빨대 하나를 꽂아서 준다. 그렇게 고테에서 하루를 보내고 호젓한 당나에 도착하였다. 이곳은 자그마한 마을 느낌이다. 꽤 넓은 운동장이 있어 마을 사람들이 모여 공차기도 하고 동네 선술집 같은 곳에서는 당구대도 있고 탁구대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몇 개 있는 롯지 중 하나인 나의 롯지에도 평소보다 나를 보러온 듯 한 사람들로 분주하다. 이 곳은 안나푸르나와는 다르게 여인들도 지나가다 들러 차 대신 툭바를 나눠 마시며 그간의 정담을 나누는 등 다소 좀 센 인상을 느낄 수 있어 또 다른 묘미가 느껴진다. 내가 많이 추워하자 나무를 더 넣어주며 창을 권한다. 쿰부 지방에서 유난히 술을 조금씩 즐기는 이유는 아무래도 추위가 아닌가 싶다. 나도 식전에 창 한 잔을 기울이며 주문한 달밧을 기다려 먹고는 조금 지나면 있을 피크를 준비해 본다. 이때까지도 내게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고 나의 컨디션 관리에 주력하고 있었다.


“정수기 필요할까?” “아니!” 다음날 아침 일찍 서둘러 자고 일어나 이젠 일상이 된 침낭 꾸리기를 한 후 썬크림과 립밤을 찍어 바르고는 열심히 카레까지 이동하였다. 카레에 도착하니 입구부터 큰 롯지들이 계단식 논밭처럼 경사진 곳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위쪽에 있는 롯지에 들어가니 가이드의 친구인 롯지 사우지는 피크 클라이밍 가이드를 하러 가고 일하는 젊은 여자 하나가 우리를 반긴다. 주인 사우지는 다소 레벨이 높은 클라이밍 전문 가이드로 찾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도착하자마자 가이드의 독촉에 클라이밍 물품을 고르러 갔다. 가이드말로는 다른 사람이 와서 좋은 것을 가지고 가기 전에 우리가 먼저 골라야 한다는 것이다. 대부분 남자들이 많은 이곳에서 상대적으로 몸이 작은 나는 모든 것이 다 컸다. 특히 빙벽화는 너무 커서 두터운 울 양말 2개를 겹쳐 신어야 겨우 걸을 수 있었다. 그렇게 몸에 맞지 않는 장비들을 챙겨두고 그동안 빨지 못했던 속옷과 양말 등을 빨래터에 가서 빠른 속도로 빨아 널고는 양지바른 곳에 널어 놓은 나의 침낭 아래 그늘에 누우니 천국이 따로 없다. 다이닝룸에서 다음날 함께 갈 쿡포터와 인사를 하고 두고 갈 짐과 가지고 갈 짐을 나누고, 가져갈 음식을 챙겨 체크 포스트에 신고를 한다. 신고 양식에 어떤 음식을 가지고 가는지 또 그 양은 얼마인지 신고를 하고 정식 클라이밍 퍼밋을 가지고 왔는지 확인한다. 가이드의 역량이 중요한데 적절치 않은 가이드일 경우 입산을 금지하므로 트레커들은 이점을 꼭 알아두어야 한다. 




저녁으로 친숙해진 달밧을 주문했는데 이 젊은 처자, 친절은 한데 음식 솜씨가 영 별로다. 이렇게 맛없는 음식이 있나 싶을 정도다. 저녁에 일찍 잠자리에 들려고 하는 나에게 가이드가 내일부터는 힘드니 몸보신하란다. 평소 고기를 싫어하는 나는 그래도 6,500m 가까운 높이를 가야 하니 가이드의 말을 듣기로 하고 염장해 말린 야크 고기와 야채를 볶아주는 음식으로 단백질 보충을 하고 진저티 한 잔을 마신 후 추워지기 시작하는 카레의 창밖을 내다본다. 또 눈이 오기 시작했다. 오후가 되면 시작되는 높은 고도에서의 눈. 내일 등반을 해야 해서인지, 유난히 걱정스럽다.

다음날 아침, 역시 밤사이 내린 눈으로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해 있다. 남다른 마음으로 아침을 챙겨먹고 짐을 꾸려 이동하였다. 평소 혹시 몰라 펌프식 정수기를 가이드에게 보여주며 필요해? 물었다. 필요 없단다.


‘포기할까’ vs ‘끝까지 가야겠어’
메라 피크를 향해 출발했다. 카레는 4,415m, 하이캠프는 5,805m이다. 카레에서 2~3시간 가자 베이스캠프가 하나 있어 이곳인가 했는데 아니란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곳까지 하면 하루가 더 소비되므로 그냥 패스했단다.) 그곳을 조금 지나자 갑자기 눈 쌓인 설사면의 급경사 길이 나온다. 이곳부터는 그냥 오르기 힘들어 빙벽화까지는 아니지만 크램폰을 끼고 오른다. 중간 중간 오르기 쉽게 고정 로프가 있어 잡고 오르기를 여러 번, 갑자기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사방에 시야가 막혀 1m 앞도 가늠하기 힘들다. 대부분의 짐을 가이드가 메고 나는 10kg 남짓한 작은 배낭에 헬멧만 달고 가는데도 눈길을 가기란 쉽지 않았다. 그렇게 여러 시간을 가니 드디어 높은 곳에 빛바랜 주황색 텐트 군락이 보인다. 어찌나 반갑던지 뛰어가고 싶었으나 몸이 허락하지 않는다. 아침에 조금 늦게 출발하긴 했지만 그래도 도착한 시간이 5시가 다 된 시간이니 지금 생각하면 강행군이었던 것 같다.





탈진한 내게 가이드가 급히 누룽지를 끓여준다. 입맛이 없어 먹고 싶지 않아 밀어내니 안 된다며 강경하게 입에 넣기를 권한다. 할 수 없이 한 그릇을 밀어 넣었는데 차를 가지고 와 또 먹으란다. 그 이후에도 꾸준히 이것저것 먹기를 권유하며 괴롭히기에 나도 열심히 먹으며 피크를 준비하였다. 그렇게 잔뜩 먹고 9시경 자리에 누워 잠을 청하여 12시 반경 텐트를 두드리는 소리에 잠을 깬 나는 한 번에 일어나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가누기 힘든 몸을 추슬러 텐트의 지퍼를 겨우 내리다 솟구쳐 나오는 이물감에 구토를 했다. 그런 나의 상태를 보고 가이드는 따뜻한 블랙티를 따라준다. 조금 누그러진 나를 보고 갈 수 있겠냐고 묻는다. 고개를 끄덕이며 가지고 있는 모든 옷을 겹쳐 입고는 등산화를 신고 가이드와 포터 사이에서 걷기 시작했다.

몸 상태가 안 좋은 나를 배려해 가이드와 포터가 짐을 들고 이동했다. 처음 만난 경사로, 급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몇 걸음 뗄 때마다 나오는 구토에 당장이라도 주저앉을 것 같았다. 그 누구도 말하지 않았지만 다들 ‘아!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고산증이…’ 생각하는 듯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고산이라 하기에는 너무 이상했다. 두통도 없었고 전조 증상도 전혀 없었는데 피크를 시작하는 내내 먹은 것을 다 토해내고 상단 부분에서는 더 이상 나올 것이 없는지 형광색 액체까지 토해 내었고, 마지막에는 더 나올 것이 없는데도 구토증이 나와 가슴이 으스러지는 듯한 고통을 느낄 정도였다. 그렇게 힘들게 이동하며 나와 함께 해주는 가이드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만 포기할까?’ 그때 같은 루트로 함께 이동해왔던 한국 분이 나를 보며 “에구, 여기나 피크나 뷰는 똑같으니 그만 내려가요” 한다. 그래서였을까? 포기하고 싶던 마음이 꿈틀대다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끝까지 해내겠다는 투지가 용솟음쳤다.


고소보다 무서운, 물
이를 악물고 주위 풍경은 하나도 보지 못한 채 앞만 보고 기를 쓰고 걸어갔다. 위 상단에서는 가이드가 안자일랜으로 연결된 로프의 줄을 끌어당기며 나를 끌어 올려주었다. 드디어 정상. 오르자마자 선글라스 안의 눈에서는 눈물이 차올랐다. 그 어떤 느낌도 없었다. 그냥 해냈다, 이제 끝났다. 하지만 인생은 영화가 아닌 것, 정상에서의 짧은 기쁨의 순간은 잠시 다시 내려가야 하는 먼 길이 남아 있었다. 햇볕이 뜨거워지면 눈사태 위험이 있어 빨리 내려가야 한다는 가이드의 독촉에 맨 위 상단에서부터 미끄럼 타듯 빠르게 내려갔다. 그렇게 한참을 오던 길을 내려가서 텐트를 보자마자 겉옷을 채 벗지도 못하고 누웠다. 그 모습을 보고 쿡포터가 차를 따뜻하게 끓여왔다. 기운을 차리려 입에 대자마자 가라앉았던 속이 다시 뒤집어질 듯한 고통을 느끼며 곧바로 토해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가이드는 먹는 것을 중지하고는 쿡 포터에게 물을 정수했는지 묻는다. ‘노’. 아, 어떻게 그런 일이! 나의 구토는 고소증세가 아니라 물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서야 알고 또 한 번 울고 싶었다.
우리는 서둘러 이곳을 내려가는 것이 먼저라는 판단을 하고 서둘러 짐을 챙겨 카레로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음식물은 가지고간 초콜릿이나, 정수된 물만을 섭취하며 카레까지 펑펑 내리는 눈을 맞으며 내려갔다. 도착하자마자 쓰러지듯 침상에 누웠는데 정상에서 나의 모습이 이상해 걱정했다며 한국 분이 가지고 있던 누룽지를 깨끗한 물에 끓여 주신다. 침낭 안에 웅크린 채 움직이지 않고 아파하는 나를 보고 쿡 포터가 미안해했다. 고생은 했지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쿡 포터가 무슨 잘못일까 싶어 부지런히 먹고 차도 열심히 마셔가며 기운을 차려 일어났다. 그제서야 포터가 이것저것 음식을 챙겨주었다. 덕분에 기운도 빨리 차릴 수 있었다. 그렇게 카레에서의 밤을 보내고 다음날 아침 일찍 서둘러 루클라로 가며 뒤돌아 본 카레의 모습은 지금도 나의 눈에 선하다.


내 안의 답을 찾기 위해


얼마 전 내가 갔던 임자체에 남편과 함께 갔던 동생에게 전화가 왔다. 언니 보고 용기 내어 시도했는데 크램폰 존까지 가서 포기하고 내려왔다며 “언니 아기 낳는 게 힘들어요? 임자체 가는 게 힘들어요?” 한다. 그만큼 힘들었다는 것인데, 나는 정답을 얘기하지 못했던 것 같다. 아니 지금도 답하기 힘든 것을 보면 그만큼 쉽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나는 왜 계속 그 고통을 잊고 다시 도전하는 것일까? 난 그 답을 찾기 위해 오늘도 또 다른 걸음을준비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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