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들면 결혼하여 사는 게 바람직하다고 여겨지는 사회에서 홀로족으로 살아가는 S는 맥이 풀릴 때가 많다. 그럴 때마다 힘을 충전해야 할 필요성이 느껴지고, 혼자 사는 것의 긍정적인 면을 부각한 책을 찾아서 읽는다. 이번 겨울에는 『고독의 창조적 기쁨』(펜턴 존슨 지음, 김은영 옮김, 카멜북스)을 집어 들었다.
사랑해서라기보다 고독이 두려워 우리는 얼마나 많은 관계를 이어가고 있는가.(243쪽)
짧은 문장이지만 몇 페이지 분량의 내용을 함축하고 있다. 이 문장을 읽으면서 S는 가슴속에서 깊은 울림이 진동하는 게 느껴진다. 자신이 그러지 않았던가. 늘 사랑을 갈구했지만, 기실 고독에 대한 두려움이 더 컸다. 혼자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해서 술자리가 있으면 빠짐없이 나갔고, 여자를 만나게 되면 하루라도 빨리 육체적으로 접속하기 위해 애달아했다. 돌이켜보건대 주객이 전도된 삶이었다. 혼자 있는 시간을 충실하게 지내는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사랑이 싹트는 관계를 맺어야 하는데, 혼자 있는 시간을 공허하게 여기며 그 빈 공간을 그 누구와든 서둘러 채우려 했다. 그러니 관계가 오래도록 지속될 수 없었고, 그럴수록 빈 공간은 더 크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고, 혼자 있는 시간이 더욱 공허하게 와 닿을 수밖에 없지 않았던가.
고독과 금욕은 관련이 있지만 서로 반드시 필요한 전제조건은 아니다. 나는 파티에 열광하는 독신주의자를 알고 있고 성적으로 문란한 독신주의자도 알고 있다. 다만 육체적 관계를 삼가려는 의식적인 노력은 고독을 강력하게 보여 준다. 온전히 독신으로 살겠다는 것은 시간이 얼마나 되든지 규율을 지키겠다는 결심, 깊이 있는 자아 탐색이라는 남다른 장기적 목표를 위해 농탕질의 매력과 가벼운 만남의 즐거움과 같은 쾌락을 포기하겠다는 결심을 보여주는 것이다.(237쪽)
S는 한때 ‘농탕질의 매력과 가벼운 만남의 즐거움’ 속에 풍덩 빠져 허우적거렸었다. 남자들끼리 만나서 술을 마시고 노래방이나 가요주점 같은 곳에 가서 ‘도우미’를 불러 노는 것. 돈을 매개로 하여 여자는 남자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애쓰고, 남자는 마음껏 호기를 부리며 자유를 만끽하는 시간. 그러나 정해진 시간이 끝날 때마다 얼마나 공허하고 허무하게 느껴졌던가. 그 공허와 허무감을 어쩌지 못하여 다시금 ‘농탕질의 매력과 가벼운 만남의 즐거움’이 주어지는 시간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그 헛된 수레바퀴에서 빠져나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고, 후유증이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지 않았던가.
이제 진정한 고독의 시간을 살아야겠다고 S는 다짐한다. 단기적인 쾌락에서는 눈을 돌리고 ‘남다른 장기적 목표’를 가슴에 품은 채 살아야겠다고. 그러기 위해서는 고독을 삶의 기본 바탕으로 기꺼이 받아들이는 마음의 방향 전환이 우선되어야 하리라. 그런 다음 고독을 통해 무엇을 어떻게 창조할 것인지 궁구하고 또 궁구해야 하리라.
우리는 모두 고독을 피하려고 하며 대다수는 고독이 싫어 결혼으로 자신을 구속한다.(205쪽)
환한 빛 속에 살면서 용기를 내지 못하거나 용기 내지 않는 누군가와 기쁨을 타협하는 것보다 온전한 기쁨 속에 혼자 사는 것이 낫다.(14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