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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룸 Feb 06. 2022

어쩌다 보니 10년 넘게 독수공방

  나이가 들수록 시간처럼 무서운 게 없다고 S는 생각한다. 어쩌다 보니 벌써 10년도 넘었다. 쉽지 않은 일을 이룩했으니 기념 파티라도 성대하게 벌여야 할까. 처음부터 자발적 의지를 지니고 이리 됐으면 모르되 그야말로 어쩌다 보니 이리 되었다. 


  왜 이리 된 걸까. 혹시 내 무의식에 결혼에 대한 거부감이나 독신에 대한 호감이 자리 잡고 있는 건 아닌가, 하고 S는 고민에 휩싸인다. 어렸을 적 부모님의 싸우는 모습이 마음속에 강하게 각인되어 영향을 미친 걸까. 사춘기가 시작되기 얼마 전부터 가족과 떨어져 지내게 되었는데, 그것이 외롭게 살아가는 데 결정적인 작용을 하게 된 건가. 스무 살 때 어떤 모임에서 ‘독신으로 사는 게 멋있다’는 종류의 말을 내뱉은 기억이 있는데, 말이 씨가 된 건가. 그땐 정말이지 뭣도 모르고 깊이 생각해 보지도 않고서 툭 내뱉은 말이었는데…… 그래서 무의식인 건가.


  S의 첫 경험은 스무 살 때였다. 얼마나 서툴렀던가. 얼마나 달콤했던가. 처음 맛본 그 열락의 세계에만 잠겨 있고 싶어 얼마나 애달아했던가. 군대에 갔다가 첫 휴가를 나왔을 때 관계가 어긋났다. S는 과거에 머물러 있는 반면 여자는 새로운 세계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군에서 제대하고 나서는 혼란의 시기가 이어졌다. 사랑을 갈망했지만 찾을 길이 없었다. 욕망만이 주체할 길 없이 고개를 쳐들었다.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에서의 라스꼴리니코프와 같은 자아중심적인 사고에 빠져 허우적거린 나날이었다. 욕망이 앞설수록 사랑의 세계로부터 자꾸만 멀어져갔다. 


  삼십대가 되어 S는 두 명의 여자를 사귀었다. 돌이켜보건대, 사귄다는 것은 서로가 결핍된 것을 상대방에게서 구하고, 그것이 만족을 줄 때 관계가 이어지는 것 같다고 S는 생각한다. 그런 욕구나 기대가 어긋남을 느끼게 되면 관계가 삐걱거리기 시작한다고. 상대방에게서 더 이상 만족을 얻을 수 없거나 자신의 욕구나 기대에 부합한다고 생각되는 새로운 대상이 나타나면 관계는 끝을 맺게 된다고. 삼십대 중반이 되었을 때 S는 배를 갈아탔다. 초반에 만난 여자보다 중반에 만난 여자가 자신의 욕구나 기대에 더 들어맞는다는 판단을 내렸다. 처음엔 순조로운 항해인 듯싶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가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이 다르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고, 그리하여 배는 자꾸만 위태롭게 요동을 쳤다. 결국 배는 부서졌고, 각자 보트를 타고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S는 사십대라는 이름의 보트 위에 몸을 내맡긴 채 망망대해에 떠 있었다. 노화가 진행되는 걸 확연히 느끼게 되고 인생무상이라는 단어를 온몸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나이가 되었다. 여자를 만날 가망성은 갈수록 줄어든다. 그런 채로 시간은 잘도 흘러간다. 거울을 보면 낯선 남자가 보인다. 너 누구냐! 거부하고 싶다. 그러나 받아들여야만 한다. 지금의 처지와 상황에 적합한 정체성을 지니고 살아가야 한다. 


  결혼하지 않았거나 못한 상태에서 끼어들어갈 모임은 갈수록 줄어든다. “나이 사십이 넘어서도 혼자 산다는 건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이다.” 누군가 S에게 대놓고 말한 적도 있었다. S의 어머니도 S에게 충격적인 말을 한 적이 있다. "나이 사십 넘어서 혼자 살면 고자 소리 듣는다." 물론 자극을 받아 빨리 결혼하라는 말이었겠지만 말이다. S는 자극을 크게 받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하고나 아무렇게나 결혼할 수는 없지 않은가.

  결혼한 사람들 중에서 간혹 혼자 사는 게 더 낫다고 S에게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가정을 이루고 살면 자유가 사라지고 의무와 책임 속에서만 살아야 한다며. 대개 다른 큰 뜻을 마음에 품고 있거나 부부관계가 좋지 않을 경우에 그런 말을 했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자식에 대한 애정만큼은 다들 강했다. 그런 걸 보면 결국 사랑이니 결혼이니 하는 것들은 자신의 유전자를 세상에 계속 남기고 싶어 하는 본능의 문화적 형태가 아닐까, S는 생각한다.


  S는 이제 오십대라는 나이를 살아가고 있다. 이십대 땐 까마득하게 멀게만 느껴졌던 사십대가 당도하고는 훌쩍 지나가더니, 직접 살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오십대를 살아가게 되었다. 나이가 들수록 욕망이 줄어드는 대신 지혜가 늘어나는 법이라는데, 과연 그러한지 의구심이 인다. 자꾸만 초라해지고 고립되는 느낌에 사로잡힌다. 외로움. 시간이 흐르면 익숙해질 법도 하건만 결코 익숙해지지 않는다. 익숙해져서 자유롭고 초연한 경지에 이르렀으면 싶지만, 그리 되지 않는다. 익숙해지기보다는 깊어가기만 한다. 

  이제 변해야 한다, 고 S는 생각한다. 그것만이 살 길이다. 어찌 보면 다수의 힘과 논리에 주눅 들고 움츠러들었던 시간들이었다. 다수의 힘과 논리에 따라 사회의 일반적인 기준은 마련되고, 그 기준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알게 모르게 압력을 행사한다. 그러나 일반적인 사람은 지닐 수 없는, 일반적이지 않은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힘이 분명 있다. 이제 어깨를 활짝 펴고 떳떳하고 당당하게 그 힘을 발휘하며 살아야겠다고, 그 힘이 무엇인지부터 찾아보아야겠다고 S는 마음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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