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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스크로 가는 기차

- 프리츠 오르트만

by 이룸


나는 그녀를 객차로 끌어올리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뿌리쳤다.

“안락의자를 승강장에 버리고 갈 수는 없어요!”

“사람 말 못 알아듣겠어? 여행에 안락의자를 가져간다는 건 얼마나 정신나간 짓이냐고!”

“당신한테는 아무 가치가 없겠죠.” 그녀가 말했다. “하지만 나는 이 안락의자를 위해 일했어요. 이걸 가지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다고요.”

“정말 말이 안 통하는군! 제발 정신 좀 차려, 여보.” 나는 애원했다. “안락의자를 뭐에 쓴단 말이야. 중요한 건 곰스크에 가는 것이라고!”

“내 걱정은 말고 혼자 가세요.” 그녀가 말했다. - 프리츠 오르트만, <곰스크로 가는 기차> 중에서 -


이 소설을 읽다 보니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가 떠오른다.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고도’라는 존재. 그러나 그 존재를 기다리며 살 수밖에 없는 게 인간 삶의 조건이라고 느끼게 해준 책이다. 이 소설에서도 곰스크에 가려는 ‘나’의 희망은 지연되고 또 지연되어 결국 마음속에 간직한 세상으로만 남겨진다.


꿈은 마음속에 있을 때만 꿈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그 꿈이 현실이 되는 순간 또 다른 꿈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흠모하는 배우나 가수와 결혼하면 죽어도 원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거라고 본다. 기적이 일어나서 그 배우나 가수와 결혼을 하게 되면 처음에는 날아갈 듯한 기분이겠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동안 만나왔던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존재라는 걸 깨닫게 되리라.


곰스크로 가려는 꿈에 사로잡혀 사는 ‘나’와 달리, 아내의 관심사는 ‘안정된 삶과 예측 가능한 미래’다. 연인을 만나 똑같은 꿈을 향해 나아간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을 확률이 월등히 높다. 거기서 갈등이 생기고, 양보하고 타협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상대방의 꿈을 무시하고 나의 꿈만을 고집한다면 갈라서는 수밖에 없다.


꿈을 잠시 밀쳐두게 되는 계기가 ‘아이’라는 존재의 탄생이다. 리처드 도킨스가 말한 ‘이기적 유전자’의 영향력에 모든 생물은 고분고분해질 수밖에 없다. 인간 또한 예외가 아니다. 그래서 ‘잠시’ 밀쳐두었던 꿈은 점점 아득해진다. 생활이 꿈을 압도해간다.


어렸을 때 아버지로부터 ‘멀고도 멋진 도시 곰스크’ 얘기를 들으며 자란 ‘나’는 이제 자신의 아이에게 똑같은 얘기를 들려주며 늙어갈 것 같다. 그리고 ‘연로한 선생님’이 “그 모든 순간마다 당신은 당신의 운명을 선택한 것이지요. 당신은 이것이 당신의 운명이라는 생각에 맞서 들고 일어났죠. 나도 오랫동안 그렇게 반항했어요. 하지만 이제 알지요, 내가 원한 삶을 살았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을 깨달은 이후에는 만족하게 되었어요.”라고 말하는 것처럼, ‘나’도 삶의 과정을 운명으로 받아들일 것 같다.


한용운 시인은 ‘만족’이라는 시에서 “만족은 잡을래야 잡을 수도 없고 버릴래야 버릴 수도 없다/만족을 얻고 보면 얻은 것은 불만족이요 만족은 의연히 앞에 있다/만족은 우자(愚者)나 성자(聖者)의 주관적 소유가 아니면 약자(弱者)의 기대뿐이다”라고 했다. 그러다가 “아아 나는 만족을 얻었노라/아지랑이 같은 꿈과 금실 같은 환상이 님 계신 꽃동산에 둘릴 때에 아아 나는 만족을 얻었노라”라고 시를 끝맺는다. 꿈과 환상만이 만족을 줄 수 있다고 한다. 죽는 날까지 꿈을 간직하고 살아야 할 이유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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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곰스크로 가는 기차

지은이 : 프리츠 오르트만

옮긴이 : 안병률

펴낸곳 : 북인더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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