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
혹시 눈치를 채신 분도 계실지 모르겠지만, 식물 디자이너는 저의 '부캐'입니다. 여러 사람이 함께 결과를 만들어 가는 회사 업무와 달리, 이 일은 제가 시작점이고 중간 관리자이며 최종 결정자입니다. 일이 힘에 부치고 속도가 나지 않을 때 회사에선 어떤 방식으로든 흔들어 깨워줄 사람이 있습니다. 서로 무엇을 하고 있나 확인도 하고 회의도 열립니다. 하지만 혼자 처음부터 끝까지 해내야 하는 이 프로젝트는 다릅니다. 제 기복에 따라 모든 일정을 뒤로 미뤄버리기도 하고 반대로 브레이크가 고장 난 것 마냥 과속을 하기도 합니다.
어느 땐 좀처럼 속도를 내지 못하는 스스로를 책망하며 의지박약이 아닌가 진지하게 고민한 적도 있습니다. 손가락 몇 번만 움직이면 누가 뭐하나 들여다보기 쉬운 세상이니 남과의 비교도 참 간단합니다. 나만 빼고 모든 사람이 쾌속 직진하는 느낌을 늘 느끼고 산다고 할까요? 다른 사람의 작업물을 보면 어쩔 수 없이 그 나무를 볼 때 잔상이 남는 것 같아 되도록 보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인스타그램을 잘 들어가지 않는 이유인데, 실은 스스로 속도를 비교하게 되는 것도 하나의 이유입니다. 저 사람은 어떻게 저런 걸 기획해서 저렇게 빨리 실행할까? 어떻게 저렇게 작업량이 많지? 생각하다 보면 제 자리는 그냥 우직하게 여기인 것만 같습니다.
그래도 올해는 부쩍 강해진 느낌입니다.
올해 저는 네이버 스마트 스토어를 개설했고 제 작업물들을 전문 사진작가님께 맡겨 프로필 사진을 촬영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새로운 채널을 열어 글도 연재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1년은 고민한 일들을 실행한 것이라 제 자신에게 그렇게 큰 이벤트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1년 전의 저와 비교해보니 참 많은 게 달라져있었습니다. ‘나는 왜 제자리인가’라는 생각이 남과의 비교에서 나왔다면 ‘나 많이 달라졌네’라는 비교는 제 자신과의 비교에서 나왔다는 걸 몸소 알게 되었습니다.
누구와 비교해선 느릴 수 있지만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속도로 나아가고 있다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식물을 보며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봄이 오고 다른 애들은 다 새잎을 틔우는데 얘는 왜 무소식일까? 조금만 더 있으면 겨울이라 실내로 들일 건데 왜 이렇게 활발하지? 작년엔 3송이 피었는데 올해는 꽃이 얼마나 필까? 옆에서 누가 보채도 빨리 가는 법이 없고 느리게 갔으면 해도 묵묵히 제 속도로 갑니다. 기대가 소용 없는 일이 태반이지만 기대하지 않았던 일도 자주 일어납니다. 각자의 계절, 각자의 '봄'이 있습니다. 환경을 탓하지 않고 묵묵히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제 속도로 할 뿐입니다. 호들갑 떨지 않는 성격인 저도 식물의 변화 앞에선 크게 동요하는 편인데, 그럴 때마다 식물은 ‘뭘 그런 걸 가지고’라고 말하며 바라보는 것만 같습니다.
물론 이런 시각의 변화가 있다 해도 깊은 웅덩이에 앉아 있는 듯한 기복이 아예 오지 않는 건 아닙니다. 여전히 계절에 한 번은 계속 제자리걸음 같아 자책하는 때가 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기복이 와도 '어 또 왔어?' 싶은 마음으로 맞이합니다. 금방 지나갈 걸 잘 알기도 하고 이제는 제가 감당 가능한 속도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비교와 반성은 접어두고, 그저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하자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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