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전엔 내가 꽤 부지런한 사람인 줄 알았다. 한 손으론 머리 감고 한 손으론 양치하며 머리로는 그날 할 일을 복기하는 게 하루의 시작이었다. 걸음은 축지법, 일은 멀티태스킹, 비어있는 시간은 칼같이 찾아서 서류정리라도 했다.
저게 내 '본성'이 아니었다는 건 은퇴한 후에야 알게 됐다. 빨리빨리 효율쟁이 인생은 워커홀릭 조장하는 한국에서 나고 자라 밴 '습관'이었던 게 분명하다. 그게 아니고서야 뒹굴거리고 게으름 피는 은퇴 후 일상이 이리 착착 감길 리 없다.
아무것도 안 하기, 불멍 물멍, 하늘 구경 새 구경하며 시간 보내기, 누워서 웹툰 보며 노닥거리기, 한 시간 동안 느리게 밥 먹기, 산책 나가 밴치에 앉아 공상하기,... 셀 수 없이 많은 소소하고 나른한 일들이 좋다. 너무 좋다.
돈 부자는 못 됐지만 시간 부자의 여유는 아낌없이 만끽 중이다.
시간 부자로 사색할 시간, 나를 돌아볼 시간이 생기니 바쁠 땐 모르던 많은 것들을 조금씩 깨닫게 된다. 돈, 돈, 돈만 생각하던 과거의 좁은 시야도 넓어지고 있다. 내 상처나 지친 구석을 들여다보고 보듬어주는 여유도 누린다. 올바른 삶, 성숙한 삶, 인간미 있는 삶에 대해 고민하고 구상하고 철학하게 된다.
어른도 더 어른다워질 수 있더라. 열심히 성찰하며 조금씩 더 성장하는 사십대를 보내는 중이다.
전엔 거의 못 했던 취미 생활도 실컷 하고 있다. 시대가 좋아져서 요즘은 큰돈 안 들이고도 즐길 거리가 많아 다행이다. 새 지인 만나기도 쉽고 뭘 배우기도 수월하다.
한달 만 원 조금 넘는 돈으로 실컷 전자책을 읽을 수 있고, 영화 드라마 감상도 무제한이다. 광고 없이 유튜브에서 온갖 정보를 보고 배울 수도 있다. 이런 시대가 아니었다면 소박한 자산만 들고 은퇴해서 꽤나 심심할 뻔했다.
나는 동네 문화센터와 이민자센터 등을 통해 수영, 요가, 줌바, 각종 댄스, 캠핑, 당구, 탁구, 미술, 음악 활동을 거의 무료로 해오고 있다. 비슷한 취향의 친구를 쉽게 만날 수 있는 건 덤이다. 어울려 즐기고 배우고 노닥거리는 재미를 살면서 처음으로 누리는 중이다. ‘호와-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거였어?’
한정적인 은퇴 자산을 안정적으로 굴려야하기 때문에 경제 공부, 투자 공부도 열심히 한다. 매일 두세 시간씩 규칙적으로 공부하고 조사하며 날을 갈고 있다. 그래도 은퇴 전 일하던 노력에 비하면 이 정도는 일도 아니다.
은퇴 뒤엔 명목상 무직이지만, 사실상 내 자산 운용을 위한 투자가가 되는 셈이다. 이젠 월급이 없다. 한정적인 돈을 잘 굴리고 불려서 살아가야 한다. 돈 공부를 열심히 해서 능력 있는 투자자가 돼야 하는 이유다.
새 꿈도 생겼다. 나이 오십에는 멋진 춤 선생이 되어 영어 쓰며 수업하겠다는 꿈.
서른쯤에 <댄싱 위드 더 스타>를 보며 언젠가 라틴 댄스를 배우고 싶단 마음을 품었다. 은퇴 뒤 시간 부자가 됐으니 실행에 옮겼다. 댄스 학원과 문화센터를 다니며 몇 년째 배우며 즐기고 있다.
작년에는 캐나다 동부의 한 댄스 갈라쇼에서 팀 공연도 했다. 학원강사일 때도 무대 체질이었는데 춤출 땐 더 대단했다. 비디오를 보니, 비록 춤은 아마추어지만 표정은 한 삼십 년 고수처럼 여유롭게 대단히, 느끼하다.
캐나다 댄스 갈라쇼, 20-50대 다양한 나이의 아마추어 댄서들이 팀을 이뤄 공연했다. 가운데가 작가
아무리 춤이 좋아도 이젠 빡빡한 스케줄을 만들어가며 뭘 하진 않는다. 취미 생활에서까지 성과 내는 게 우선이면 즐기기가 힘들다. 시간 부자 은퇴자답게 천천히 여유 부리며 배울 생각이다.
느리지만 계속 성장 중인 나의 사십 대가 즐겁다. 오십 대, 육십 대, 또 그 이후에는 어떤 모습으로 행복을 추구하고 있을지 궁금하고 기대된다. 돈 부자 되기를 놓아버리고 택한 시간 부자 인생, 이거 이렇게 좋은 거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