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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밤 Oct 17. 2020

10개월 아기와 한라산

1년 뒤에, 둘째 날부터 쓰는 제주 여행기

여행 둘째 날, 오늘의 일정은 한라산 등반이다. 원래 계획은 첫째 날 아침 일찍 일어나 백록담에 오르는 것이었으나 도착하자마자 열이 오른 나와 우리 아이 오빈이로 인해 오늘로 미루어졌다.

 열이 오를 만도 했다. 저녁 비행기가 더 싸다는 이유로 남편의 퇴근길에 김포공항에서 만나기로 했던 것이 사건의 시작이었다. 우리는 아주 생각이 짧았다. 퇴근 시간에 등산 배낭과 10개월 아기를 앞뒤로 메고 캐리어를 끌며 그 사람 많다는 9호선 급행을 타고 공항에 와야 한다는 것을 나는 지하철에 타면서부터야 깨달았다. 그렇게 도착한 제주도에서 그래도 기분을 낸다고 밤 12시까지 회와 소주를 홀짝였으니 체온계가 39도까지만 올라간 것이 다행이었다.


 어쨌든 이러이러하여 오늘의 일정이 한라산 등반이 되었다. 숙소를 한라산 입구에 잡아 놓은 덕에, 이유식을 먹이고 퇴실 준비를 하는 동안 우리만 빼고 모든 등산객들이 한라산 입구로 오르는 것을 지켜보았다. 우리가 한라산 입구에 도착한 것은 한참이 지난 9시. 오후 1시에 길목이 막히는 백록담은 아쉽지만 무리였다. 희망을 계속 놓지 않는 남편을 끌어다 지도를 보며, 중간지점인 사라오름을 목표로 잡았다.

 우리 남편 이삭은 9kg 체급의 10개월 아기를 태울 수 있는 등산 캐리어를 메고, 나는 기저귀와 물티슈, 우리의 도시락과 오빈이의 이유식, 그리고 세 번 먹을 분유를 담은 50L 배낭 메었다. 아이 없이 등반하는 사람들보다 어깨는 더 무겁고, 힘은 더 들고 속도도 느리겠지만 우리에게는 우리만의 재미가 있었다.

 등산의 에티켓 상, 남편 이삭이 오빈이와 앞서 나가고  내가 뒤따라가며 걸었다. 그러다 보니 만나는 등산객들마다 아기를 멘 젊은 아빠에 대한 칭송을 하나씩 던졌고, 뒤따라가며 나는 그것들을 주워다 낄낄거리며 이삭에게 전해주었다. (나중에는 이게 너무 재밌어서 일부러 일행이 아닌 척 따로 걷기까지 했다.) 좀 더 적극적이신 분들은 한 마디씩 건네셨다. 두 스님은 아빠 엄마 덕분에 아기가 호강한다는 말씀을, 한 부부는 젊을 적 아들을 데리고 산에 올랐던 경험을 나눠주셨다. 거기에 나무껍질을 작은 손으로 만지는 오빈이의 모습과, 이삭이 살짝 뛸 때마다 꺄르르 웃는 오빈이의 웃음소리는 안 그래도 아름다운 한라산 등반길을 반짝반짝 빛나게 했다.

 이삭과 내가 짐을 나눠 메고 오르듯이, 오빈이도 제 몫에 열심이었다. 우리가 물을 마실 때 따라서 수분 보충을 하고, 우리가 도시락을 먹을 때는 이유식을 냠냠 먹었고, 산을 오르고 내려가는 동안 거의 칭얼대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오빈이는 등반시간 8시간 동안 참다가 내려와서야 대변을 봄으로써 자신의 몫을 다해주었다.

 그 날의 하늘은 10월의 하늘 중에서도 빛났다. 사라오름의 조그마한 호수에서 오빈이도 우리도 양말을 벗고 발을 담갔다. 오빈이의 짧은 다리는 물에 채 닿지 않아서 담근다기보다는 우리가 물을 뿌려줘야 했지만.


열감기 때문에 첫날은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아기와 함께하는 제주여행 필수코스라는 본태박물관과 카멜리아 힐을 돌았다. 추천받은 맛집에서 밥도 먹고, 평소에 입지 않던 원피스도 차려입었지만 생각만큼 신이 나질 않았다. 인스타에서 보던 대로 포토존에서 사진도 여러 장 남겨보았지만 사진 속 우리의 웃음은 조금은 어색했다.

 

수유실 하나 없는 산에서 바위 위에 패드를 깔고 기저귀를 갈아야 했고, 오르내리는 동안 그 기저귀들은 점점 더 배낭을 무겁게 했으니 '아기와 함께하는 제주여행'이라는 키워드 검색에 한라산이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산 후에도 다른 등산객들처럼  깔끔하게 저녁식사를 하고 숙소로 돌아가 쉬는 대신,  똥 싼 오빈이를 세워 안고, 코를 막아가며  숙소에서 아이를 씻긴 뒤, 다시 식사하러 나갔다 돌아오느라 우리는 그야말로 녹초가 되었다.  

 하지만 사라오름 꼭대기에서 땀에 절은 채로 바람을 맞으며 찍은 사진 속에서, 우리는 그야말로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3박 4일의 여행에서 남은 것은 이틀. 그날 밤 우리의 사진을 보며 앞으로 어떤 이틀을 보내야 할지 확실해졌다. 우리 다운 제주여행은 그제야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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