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을 하면서 떠오르던 생각들
오늘 일간지 아시아투데이에서 주최한 제2회 사회공헌 마라톤 대회를 나갔다.
10km, 1시간 13분 42초.
7분 22초의 런린이 페이스.
5년 만에 나간 생애 두 번째 마라톤.
대회 장소는 월드컵 공원. 집에서 걸어서도 갈 법한 거리지만 부실한 체력을 아끼고 싶어 버스를 탔다. 주관사는 되도록 1시간 전에 오라고 문자를 보냈는데 일찍 가니 생각보다 할 일이 없었고 준비운동보다는 공원 구경을 하고 싶어 졌다. 달리기 전 먹을 간식으로 챙겨 온 초코바를 야금야금 먹으며 타는 듯한 붉은색, 주황색, 명랑한 노란색으로 물든 단풍들을 실컷 보고 늘어진 수양버들이 멋진 연못가 벤치에 앉아 스트레칭을 하면서 주변 사람들을 곁눈질 한다. 공원 가득한 사람들이 어쩐지 다들 나와 비슷해 보인다. 배에는 번호판을 달고, 팔다리를 휘저으며 몸을 풀거나 가볍게 달리기를 하고, 간단히 싸 온 음료나 요깃거리를 먹으며 다들 발그레한 표정으로 9시가 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문득 그간 달리기를 하며 듣던 플레이리스트가 10km를 달리기에는 좀 짧다는데 생각이 미쳤다. 되도록 밝고 경쾌하면서 가사가 잘 들리는 노래로, 생각나는 몇 곡을 더해 내 예상 달리기 시간인 1시간 반짜리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었다. 힘들고 처질 때 노래가 다리를 움직이게 해 줄 테니까.
하늘은 적당히 흐려서 햇빛 쨍하지 않아 좋고, 온도도 15도. 춥지도 덥지도 않아 달리기에 딱 좋다. 시간이 거의 다 되었다. 8시 57분, 58분, 59분, 9시….! 우와~~ 함성과 함께 달려 나가…는 걸로 생각했는데, 조용했다. 주관 업체에 마이크가 있기는 한데 무대가 멀어 출발선 근처에서는 들리지 않았다. 진행자 분들이 앞뒤로 돌아다니며 그룹별 인솔을 하셨다. 출발선 가장 앞쪽부터 길게 늘어선 그룹들이 모두 출발하려니 시간이 제법 소요되어 다 함께 함성! 하며 출발! 하기에는 그룹별로 출발 시간이 많이 달랐다. 하프 선두그룹, 후발그룹, 10km 45분 이내 그룹, 1시간 이내 그룹등이 떠나고 1시간 이후 그룹의 가장 뒤편, 5km 그룹과 맞닿은 지점이 내 출발점이었다. 9시 15분, 드디어 달리기 시작이다.
앞뒤옆대각선 사방에서 사람들이 함께 뛰니 비슷한 속도로 달리게 된다. 어? 내 평소 페이스보다 훨씬 빠른데? 조금 속도를 줄인다. 하지만 어느 정도는 주변에 맞추고 싶다. 이 정도면 힘들지 않다, 싶은 정도의 오버페이스로 달린다. 분명 오버페이스지만 나는 평소 몸을 많이 사리는 사람이니까, 할 수 있을 것 같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어. 귓가에선 세븐틴이 새 신발을 신고 두근두근 데이트 꽃길 가는 노래를 아주 NICE! 하게 부르며 응원해 준다. 편안하게, 가보자고!
5년 전에는 분명 헉헉 숨을 몰아쉬며 달린 구간들이 제법 있었다. 지금보다 다섯 살이나 어렸는데, 뭐지. 그날은 날이 더 더웠던가? 혹시 설마 나 그때보다 체력이 좋아진 건가? 스스로 느끼기에 들숨날숨이 안정적이다. 물론 속도는 느리지만.. 아니, 평소보단 빠른 걸! 나는 확실히 몸을 사리는 사람이 맞는 것 같다. 이대로, 이 속도로 계속 갈 수 있을 것 같다. 2.5km 지점에 첫 번째 급수대가 있었지만 그냥 지나가기로 한다. 물은 반환점에서 한번 마시면 될 것 같아. 주변과 비슷한 속도로 달리다 보니 오늘 이 순간 처음 만나 함께 달리고 있는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 어쩐지 친근한 마음이 든다. 앞에는 남자분이 여자분 속도에 맞춰 함께 달리는 듯한 커플이 세 커플이나 있다. 뛰다가, 걷다가를 반복하면서도 나보다 살짝 페이스가 빨라 아주 조금씩 멀어지는 커플을 보니 아.. 체력과 젊음이 부러워요.. 행복하시길. 한 편에는 친구인 듯한 둘이 달리는데 오른쪽은 달리기에 구력이 있어 보이고, 왼쪽은 살짝 숨이 헐떡헐떡 한다. 조건은 다르지만 한쪽은 속도조절을 하며 친구와 보폭을 맞추고, 한쪽은 오늘 해낸다는 마음가짐인지 계속 힘을 내서 함께 달린다. 뒤에서는 아빠와 딸이 함께 달리고 있다. 초등학교 3학년쯤 되었을까? 우다다 한바탕 달려 나갔다가 좀 걷다가 하면서 에너지를 발산하는 중이다. 아빠와 10km를 뛰는 초등학생이라니, 대견하고 또 부러워진다. 함께 달리는 즐거움이 좋아 보여. 오늘 결승선에서 아이들이 엄마를 기다리고 있다면 내년엔 가볍게 5km 정도 함께 도전해 보는 게 어떨지 얘기해 봐야겠다.
한동안 같이 달리고 있다 생각한 주변 사람들이 조금씩 앞서나가다 완전히 앞으로 달려 나가 사라지기도 하고, 조금씩 뒤로 거리가 벌어지다 다른 그룹이 되기도 한다. 그러는 사이 먼저 출발한 10km 선두 그룹은 벌써 반환점을 돌아 결승선을 향해 반대방향으로 달리고 있다. 가위날처럼 착착 벌어지는 다리에 나와는 비슷한 듯 참 다른 신체구나 싶다. 나도 5km 반환점에 도착했다. 물 한 모금을 입에 물고 커브를 돌아 달려온 길을 되짚어간다. 플레이리스트는 살짝쿵 2000년대로 거슬러갔다. 룰라의 고잉고잉이 뛰어봐뛰어봐뛰어봐 고잉고잉고잉을 외치고 있다. 네, 룰라를 들으며 힘을 내는 사십 대입니다. 벌써 5km라니, 이제 좀 다리가 피곤하지만 그래도 다음 급수대인 7.5km까지만 힘을 내서 달린다면 그다음에는 좀 더 속도를 내서 막판 스퍼트를 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가, 별생각 없이 머리를 비우고 달리기도 하고, 앞으로 달려 나갈 때는 보지 못했던 풍경을 눈에 담아도 본다. 잔디는 여전히 푸르지만 곳곳에 누런 기운이 감돌고, 사이프러스 나무들도 아직 붉게 물들기 전이라 짙푸른 빛으로 드문드문 서 있다. 한강변을 달리는 줄 알았는데 코스가 좀 바뀌었다더니 성산대교의 붉은색 트러스가 언뜻 보여서 한강 옆이구나, 하고 알 수는 있지만 강물은 아주 빼꼼히 보일 뿐이다. 그 사이 7km. 다리가 아프긴 하지만 무릎은 다행히 아직 괜찮다.
다들 살짝 힘들어지는 구간인가 주변에서 다 같이 속도가 조금 느려진 기분이다. 그럼에도 모두 멈추지는 않는다. 걷거나 뛰거나 하여간 모두 돌아갈 곳을 향해 가고 있다. 배번호 판 외에 무언가 문구를 적은 종이를 등판에 매달고 달리는 분-안타깝게도 내 눈은 나쁘고 글씨는 작아 알아볼 수 없었다, 지긋한 어머니와 대학생인 듯한 아들, 아까 우다다 달리던 여자애만큼이나 우당탕탕 달려 나가는 남자아이, 훤칠하게 키가 크신 시각장애인 남자분과 이 분을 가이드하는 여자분, 오른 다리가 불편한 듯하지만 너무나 잘 달리시는 남자분, 할머님과 할아버님… 함께 달리는 모습을 보며 다들 인생을 이런 달리기로 본다면, 싶어졌다.
함께 달린다. 대강 함께 출발선을 떠나 같은 결승선으로 돌아온다. 빨리 갈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의 페이스대로 빨리 가고, 천천히 달리는 사람은 자신의 페이스대로 천천히 달리면 된다. 선두자리에서는 좀 경쟁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내가 정한 페이스에 따라 나와의 싸움, 혹은 자기만족 같은 달리기를 하는 것이다. 함께 달리는 주변사람들과 동질감을 느끼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서로 페이스 메이커가 되어주기도 하고, 서로 도울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돕기도 해 가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달린다. 결승점으로 돌아오면 맛있는 간식이 우리 모두를 기다린다. 탁월한 실력으로 앞서 들어온 실력자분들은 영예를 얻고, 부상은 기부영수증. -오늘 대회 1-5위 수상자에게 주어지는 부상이 금액별 기부영수증이었다-. 사회적 약자를 위한 나눔은 이렇게 미리 정리된 규칙에 따라 이뤄진다. 기대감으로 시작한 이벤트를 나에게 뿌듯함과 건강함을 더하는 것으로 마친다. 이상적인 이야기지, 싶지만 오늘의 달리기는 나에겐 실제로 제법 이상적이었다.
7.5km 지점 급수대에 도착했다. 힘들다. 물대신 새파란 파워에이드를 한 모금 머금었다. 남은 2.5km를 아까 생각마냥 막판 스퍼트로 달리는 건 무리다. 남은 돌아가는 길에는 곡선과 오르막도 있다. 지금의 속도를 유지하는 수준에서 부지런히, 멈추지 않고 달리기만 해도 훌륭하다 생각을 고쳐먹는다. 비좁은 오르막 구간을 지나 평화의 광장에 들어선다. 이제 1km가 남았다. 발바닥은 아프지만, 아직 힘이 다 떨어진 건 아니다. 그럼 좀 더 속도를 내서 달려볼까? 다리가 잘 벌어지진 않지만 그래도 보폭을 넓혀본다. 시계를 보니 10시 30분. 이 시간이면 남편과 아이들이 결승선에서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라. 마지막 힘을 내보자고! 달리고, 달린다. 이제는 별 생각이 없다. 그저 어서 결승선을 통과해 아픈 다리를 쉬고 싶다. 결승선 앞 직선 구간. 막판 스퍼트를 살짝 해보며 스스로를 칭찬한다. 힘이 남아있다니! 장하다! 바쁘게 눈알을 굴려 어린이들이 혹시 나와있을지 살펴보지만, 잘 보이지 않는다. 결승선 통과! 아, 오늘 아침 일정이 무사히, 기쁘게 끝났다. 뉴진스의 How sweet이 오늘 달리기의 마지막 플레이 곡이었다. 마침표는 달콤하구나. 어린이들은 5분 늦게 도착했다. 내가 이렇게 빨리 통과할 줄 몰랐단다. 응, 나도 생각보다 빨리 들어올 줄 몰랐어. 둘째가 나도 달리기 하고 싶어요! 종알종알 외친다. 우리 내년에는 다 함께 5km 달리기 할까? 어, 난 10km 하고 싶은데요? 오~~~ 좋아 그럼 그렇게 하자. 내년에는 다들 더 쑥쑥 커서 엄마보다 더 빨리 더 오래 달릴지도 몰라.
이렇게 함께 달리는 즐거움을 예약한다.
내년의 그날도 오늘 같기를.
해보자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