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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엔젤라권 Dec 05. 2022

포토그래퍼

Kenny Mathieson

2022년 11월 25일.

어느새 10여 년의 세월이 쌓이며 잊지 않고 생일을 챙겨주는 마음 따뜻한 언니에게서 한 사진작가의 도록을 선물 받았다. 

'한' 사진작가라는 표현은 맞지 않다. 어쩌면 언니의 최애 작가인지도 모를 그의 작품과는 수개월 전 언니 집에 방문했을 때 이미 안면을 텄으며 작가에 대한 설명도 들었으니 말이다.

'그' 사진작가의 작품은 편안하고 따뜻하며 상상력을 자극했다. 테마도 좋고 구도도 좋지만 나의 눈이 그의 작품에 오래 머무르는 이유는 색감이었다. 후작업을 최소화한다는 언니의 설명을 들으면 더 경이롭게 느껴지는 그의 작품들은 그렇게 표현이 불가능한 색으로 충만하며 포만감을 안겨줬다. 

사진평론가가 남긴 서평의 내용 중, '기억은 상상력의 순간이다. 과거의 어떤 것이 그대로 투영되는 것이 아니라 영화처럼 투영되는 것이기에 꿈같다...'는 글을 읽으며 나의 기억은 축제 테마 단편영화의 조각모음을 시작한다.




케니를 언제 어디서 처음 만났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20년이 훌쩍 넘어가는 에든버러 축제의 기억 속에 그는 한 해도 빠짐없이 등장한다.

때때로 캐주얼한 저녁 약속을 할 때도 있었고, 몇몇 해에는 미리 연락해 공연의 포토콜을 부탁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는 약속 없이 만나게 되는 횟수가 더 많았다. 케니와 나는 어느 순간부터 약속하지 않고도 축제기간 어디에선가 반드시 만난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가 어디에나 출몰하는 건지, 내가 그런 건지, 어느 쪽으로 설명하는 게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와는 매년 한 번의 예외 없이 반드시 마주쳤다. 

어느 날은 어셈블리 갈라의 프레스 틈에서 그를 발견했고, 어느 날은 축제 거리 로열 마일에서 큰 소리로 불리는 내 이름에 화들짝 놀라 걸음을 멈췄다. 어느 날은 공연을 보러 서 있는 줄 사이에서 서로를 발견했고, 어느 날은 다른 약속으로 방문한 이태리 식당에서 마주쳤다. 

어느 순간부터 '우연한 만남에 대한 놀라움'이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게 되었다. 나의 이름을 부르는 그의 인토네이션은 다른 친구들과 확실한 차별성을 가지고 있어 관광객으로 가득 찬 올드타운의 골목골목에서도 '엔-젤라-'라고 부르는 그의 주파수를 구분할 수 있었다. 

우연한 만남이 당연하다는 듯 반가움 마음만을 가득 담아 커다랗게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건 어느새 우리의 루틴이 되었다.


축제 거리인 로열 마일에는 자신들의 공연을 홍보하기 위해 10분~15분의 하이라이트 공연을 선보이는 공연팀과 서커스, 마술, 음악, 살아있는 조각상 등을 선보이는 스트리트 아티스트들, 그리고 캐리커처, 타투, 페이스페인팅을 하는 팝업샵 등 사진에 담을 소재가 넘쳐난다. 

케니는 벽돌을 넣고 다니는 건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로 무거운 카메라 가방을 메고, 긴 스트랩에 매달린 카메라를 쌍권총처럼 크로스로 걸치고, 손에는 또 하나의 카메라를 들고, 4~5개의 패스를 목에 걸고 축제 거리와 공연장을 종횡무진한다. 

180cm가 넘는 키는 마른 체형 때문인지 더욱 커 보이고, 카메라를 들고 있는 가늘고 긴 손과 대화를 나눌 때 눈높이를 맞춰주느라 구부정해지는 그의 등, 그리고 사진을 찍을 때 외에는 유난히 느린 그의 움직임 때문인지 나는 그가 가끔 착한 거인 같다는 생각이 든다. 타고난 곱슬머리와 사진을 찍을 때와 사진이야기를 할 때 외에는 초점을 자주 잃고 방황하는 그의 진한 그레이 눈동자는 그의 얼굴에 천진난만한 아이의 표정을 담아낸다.   


케니의 본업은 IT 기술자(였)다. 

그의 직업에 대해서 내가 기억할 수 있는 건 'IT분야, 엔지니어' 딱 두 단어뿐이다. 

나의 귀는 ‘내가 모르는 분야’의 이야기를 단기적으로 블락block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20여 년간 우리가 나눈 대화 속에 그의 일에 대한 내용이 분명히 있었을 텐데, 안타깝게도 나에게는 'IT, 엔지니어=내가 모르는 분야'라는 기억만이 남아 있다. 

내가 기억하는 그와의 순간은 '새로 장만한 카메라와 렌즈의 브랜드와 제품명 등 디테일을 나열하며 새로운 장난감에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아이처럼 반짝이는 눈으로 자랑을 늘어놓는 그'와 '친구의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며 한국 공연의 포토콜에서 멋진 사진을 담아내는 열정적인 그', '어셈블리 갈라의 프레스 라인에 서서 진지하게 순간순간을 기록하는 그'와 '로열 마일에서 거리의 아티스트들의 모습을 가장 멋지게 담아내려 집중하는 그'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기억 속 장면은 '식사자리에서나 우연히 마주친 거리에서 불쑥 카메라를 들이밀며 자신이 찍은 수천 장의 사진을 끝까지 보여줄 기세로 설명하는 그'의 모습이다. 

나는 나의 모습을 볼 수 없으니, 앞서 언급한 서평의 글처럼 나의 기억을 상상력으로 끌어올려 말하자면, 그와 함께 한 순간들에 나는 '우쭈쭈 모드를 장착하고 내가 모르는 장비 얘기를 끝까지(는) 들어주며 영혼 없이 감탄하거나', '그가 담아낸 공연과 아티스트, 공간, 오브제 그 외의 수많은 이야기가 담긴 작품을 영혼을 듬뿍 담아 공감하며 감탄하거나', '내가 공연에 대해 설명할 때 갈 곳 잃은 눈빛으로 영혼 없이 공감하는 그를 보면서도 끈기 있게 할 얘기를 다 하거나', '사진작가인 그에게 온전히 맡겨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꾸역꾸역 공연의 어떤 장면은 어떻게 담아 달라고 예의 없이 요구하거나' 하는 모습이다.    




몇몇 한국 공연의 성공적인 유치로 해외공연팀에게도 에든버러 축제 참가에 대한 문의를 받고 있던 2000년대 중반, 너무나 아름다운 이태리 공연에 마음을 빼앗겨 덜컥 프리젠터 계약을 진행한 나는 예외 없이 케니에게 사진 촬영을 부탁하고 있었다. 

이 이태리 공연과의 인연은 나에게도, 케니에게도 특별했다. 


2005년 8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커피와 수다 타임을 진행하던 닐스에게서 이태리 프로덕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 해 축제에 참가한 공연이 아니었기에 직접 볼 수는 없었지만 ‘이탈리아 리듬체조 국가대표로 구성된 댄스 씨어터’란 그의 설명은 흥미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2006년 1월, 닐스에게서 나의 이메일 주소를 받았다며 이태리 공연팀의 프로듀서 시모네에게서 연락이 왔다. 자신들의 작품 중 하나로 에든버러에 참가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성격 급한 그는 닐스에게 나의 한국 사무실 주소까지 물어본 후 그 주소로 DVD를 보냈다고 했다.

당시 1월에는 뉴욕에, 2월에는 런던에서 머물 계획이었던 나는 한국에 우편물이 도착해도 공연 영상을 바로 확인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고 회신한 후 그의 스케줄을 물어보았다. 

 

“너는 1~2월에 어디에 있을 계획이야? 어딘가에서 만나서 영상도 보고 얘기도 나누면 좋을 것 같은데.” 

 

시모네에게서 뉴욕에 갈 수 있을지 일정을 조정해 보겠다는 회신이 왔다. 그 와중에도 내가 자신들의 공연에 대해 조금이라도 빨리 정보를 가지고 전화 통화로라도 대화를 했으면 좋겠다며 자신들의 홈페이지에 이전에 공연한 3개 작품의 짧은 영상을 올리겠다고 말했다. 

다음날 확인한 공연 홈페이지에서 보게 된 영상은 닐스가 설명한 그대로였다. 이태리 공연은 기존의 신체극이나 무용공연과 확실한 차별성을 가지고 있었고 매력적이며 아름다웠다. 


이태리 프로덕션의 풀네임은 ‘카타클로 아뜨레틱 댄스 씨어터 컴퍼니Kataklo Athletic Dance Theatre Company’로, 안무가이자 연출인 쥴리아 스타치올리 Giulia Staccioli에 의해 1995년 설립되었다. 그녀는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과 1988년 서울 올림픽에 출전한 이태리 리듬체조 국가대표 선수였다. 전 세계 운동선수들의 공통된 고민인 선수생활 이후의 삶에 대해 고민하던 중 뉴욕으로 날아가 무용을 공부했고, 이후 자신의 프로페션인 리듬 체조와 무용으로 신체극에 도전하며 유독 선수 생명이 짧은 리듬 체조선수들의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대안을 마련했다. 

 

그녀에겐 서울 올림픽 출전 이 외에도 한국과 특별한 인연이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이태리 조각가 마우로 스타치올리 Mauro Staccioli로 88 서울 올림픽을 기념해 1987년 올림픽공원에 그의 거대한 조형물이 설치되었다.

올림픽 선수들이 비상하는 듯한 동작을 연상시키는 그의 작품은 대리석이나 브론즈가 아닌 시멘트, 철근, 나뭇가지 등을 이용하여 간결한 형태로 제작되었다. 그는 작품이 설치될 장소에 직접 찾아가 지형과 역사에 대한 정보를 확인하고 작품이 설치될 곳에서 직접 제작함으로써 현장에서 받은 느낌을 작품에 담아내는 작가로 유명하다. (한국에서는 올림픽공원 외에도 SBS 목동 사옥,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여의도 일신방직 본사 등에서 그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한국문화를 알리겠다는 명분으로 시작한 해외 프로모션이라 타국의 작품을 프로듀싱하지 않던 시절이지만 이태리 공연팀과의 만남은 가장 신뢰하는 친구의 소개에 쥴리아 부녀의 스토리까지 더해지며 마치 운명처럼 다가왔다. 이미 그들의 매력적인 작품에 마음을 빼앗긴 이후라 쥴리아의 한국에 얽힌 스토리와 애정은 공연을 맡겠다는 결정에 명분 한 스푼을 올리는 정도였다. 

 

쥴리아의 아버지인 마우로의 작품은 수직적이면서도 수평적이고, 높으면서도 낮으며, 곡선이면서도 직선인 열린 형태로 움직임과 정지 사이에서 의미를 만들어냈다. 차가운 철재를 사용한 작품이지만 그 모양은 누군가 가슴을 편 채 하늘을 향해 팔을 활짝 벌리고 있는 것 같아 따뜻하고 희망적이다

그녀의 작품 또한 그러했다.

무대 중앙에 마법처럼 떠 있는 철재 프레임 위에서 인간의 몸으로 표현하는 탄성을 자아내는 움직임과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조명은 신성하다는 느낌이 들면서도 매 순간 누군가를 안고 있는 것처럼 인간적인 따뜻함을 뿜어냈다.

마우로가 자신의 작품을 ‘개입하는 조각’이라 불렀다면, 쥴리아는 생동감 있는 무대언어로 상호 개입하는 인간의 모습을 만들어냈다. 부녀의 같으면서도 다른 작품은 올림픽이라는 동일 테마에서 그려낸 도전하는 인간의 창조적 고뇌가 묻어났다. 

 

나는 쥴리아에게 축제에서 상연할 공연의 제목이 그녀의 프로덕션 명인 <카타클로KATAKLO>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스 고어에서 그 유래를 찾았다는 이 단어는 "나는 나의 몸을 구부리고 뒤틀며 춤춘다"라는 뜻을 품고 있다. 그들이 지난 작업에서 테마를 나눠 붙인 작품명 Indiscipline(무질서), Kataklopolis(카타클로 도시), UP(업), Livingstone(리빙스톤) 등의 단편적인 단어는 그들의 아이덴티티를 표현하는 데에 부족하다고 느껴졌다. 프로덕션 명인 ‘카타클로’만이 사진처럼 강하게 각인되는 이미지를 남기는 그들의 공연을 명확하게 표현했다. 공연의 제목과 메인 이미지, 공연을 소개할 글들을 함께 정리해 가는 동시에 나는 이 작품을 가장 잘 품어낼 공연장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나의 파트너 공연장인 어셈블리는 22개의 공연장에 다양한 장르의 다채로운 공연을 선정하여 선보이는 것으로 유명하지만, 어셈블리 공연장 중 한 곳에서 작품을 상연한다면 원 오브 뎀One of Them으로 집중받기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용전문 배뉴인 댄스베이스는 스튜디오가 작고 층고가 낮아 작품을 담아낼 수 없었다. 

축제의 메인 스트림을 조금 벗어난 뉴타운의 세인트 스테판 교회St.Stephen's Church는 2001년부터 울프강에 의해 오로라 노바Aurora Nova라는 이름의 배뉴로 사용되고 있었다. 엄선한 인터내셔널 신체극과 무용 공연을 올리는 이 공연장은 2004년 가디언The Guardian으로부터 베스트 배뉴로 선정되어 수상하였고, 그가 프로그래밍한 공연들은 축제에서 가장 역사 깊고 명망 있는 프린지 퍼스트, 해럴드 엔젤스, 토털 씨어터 어워즈 등의 메이저 시상식에서 몇 년 새 상을 휩쓸고 있었다. 

흔치 않게 공연장 자체로도 '반드시 봐야 하는 Must-See', '오로라 노바에 가라. 어떤 공연이든 봐라. 만족할 것이다.'라는 리뷰를 받으며 당시 대중과 평단의 사랑을 온몸으로 누리고 있던 아름다운 공연장이었다.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솟은 굴뚝 모양의 시계탑과 다이아몬드 모양의 독특한 내부는 마치 카타클로를 위해 일부러 지어진 공연장처럼 공연과 완벽한 조화를 이뤘다.   

2006년, 카타클로는 유료 객석 점유율 98%를 기록하며 축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우리는 2% 콤프 티켓 (Complimantary Ticket/초대권)으로 프레스와 프로모터를 초청해야 했기에 그 해 그 어떤 공연팀도 하지 않은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나는 당시 유명 포토그래퍼가 아니었던 케니에게 애정 하는 공연의 사진 작업을 전적으로 맡겼다. 2000년대 초반 취미로 시작한 그의 사진은 어느새 작가의 혼이 담긴 작품으로 빛나고 있었고, 나는 그가 아름다운 신체극의 순간순간을 온전히 작품으로 만들어 줄 것이라 믿었다.  


사진 작업은 작가가 원하는 완벽한 순간을 포착해내야 한다는 점에서 동일하지만, 공연 사진은 작가에게 최악의 조건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공연에 맞춰 변화하는 조명은 빛이 중요한 사진 작업에 더할 나위 없는 악조건으로 작용하며, 작가가 퍼포머들의 모든 동선을 파악하고 작업하는 게 아니기에 공연 사진은 사진작가에게 엄청난 순발력을 요구한다. 공연은 시작과 함께 정해진 끝을 향해 달려간다. 사진작가뿐 아니라 그 누구도 개입할 수 없다. 스튜디오에서의 작업처럼 '다시 한번 갈게요~'를 외칠 수 없다. 기회는 단 한 번이다.


사진작가가 사진을 찍는 이유는 다양하다. 

누군가는 함축적이고 조형적으로 현실의 상황을 기록하고 싶다고 말하고, 누군가는 우리의 현실 안에 존재하지만 미처 보지 못한 풍경을 담아내며 새로움을 창조하고 싶다고 말한다. 누군가는 사진이 자신의 감각과 심리를 대변해주는 매개체라 말하고, 누군가는 마음에 드는 장면이 있을 때 셔터를 누르게 되고 그게 기쁨이라고 말한다.

세상의 모든 것은 태양이 그리는 그림이라고 말하는 작가도 있다. 나는 시적인 그의 대답이 마음에 든다. 

심플하게 ‘사진은 기록이다’로 설명을 마치는 이도 있다.

사진을 찍는 사람도, 공연을 만드는 사람도, 조형물을 만드는 사람도, 축제를 만드는 사람도, 모두 각각의 이유로 자신이 선택한 작업에 진심을 담는다. 같으면서 다른 우리는 각각의 이유를 존중하며 서로에게 선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같으면서 다른 우리는 연대하며 마음으로 의지한다.  

사진과 공연, 사진과 축제, 사진과 전시 이외에도 수많은 관계에서 우리는 서로가 필요하다. 


케니가 찍은 카타클로 공연 사진은 지금까지도 공연팀의 메인 포스터와 홈페이지 공연소개 이미지로 사용되고 있다. 사진 중 일부는 이듬해 캐나다 밴드의 음반 커버에 사용되었다. 

2006년 그가 축제에서 찍은 사진은 일간지 이브닝 뉴스Evening News의 사진대회에서 2등상을 수상하였다. 

2008년 3월 그의 공연사진은 전 세계 81,000장의 작품이 출품된 'Photographer of the Year 2007'의 디지털카메라 흑백사진 부문에서 3위에 선정되었다. 

같은 해, 스코틀랜드 국립 초상화 미술관Scottish National Portrait Gallery이 주최한 사진대회에서 그의 작품은 1등상을 수상하였다. 

공연과 축제 전문 포토그래퍼이자 여행사진작가로 점차 이름을 알리게 된 케니는 매년 더 바빠졌다. 

그의 작품이 알려지는 만큼 그를 찾는 사람이 많아졌고, 그의 목에 걸린 패스의 수도 늘어났다.  


백 마디 말보다 한 장의 사진이 그를 더 잘 표현해 줄 것이라 생각되어 그의 사진을 기쁜 마음으로 소개한다. 

 

KATAKLO by Kenny Mathieson


2022년 8월. 우연히 만난 우리

P.S/ 2022년 8월. 케니와 나는 당연한 듯 약속없이 로열마일에서 마주쳤다. 팬데믹도 깨지 못한 우리의 운명같은 우연에 감사하며... 

그의 직업 이외에도 나의 귀가 단기적으로 블락한 그의 카메라에 관한 디테일을 혹시 모를 사진애호가분들을 위해 남겨본다.

"Having relied on my trusty Olympus OM-20 for many years, I started to 'play' with digital photography in 2003, courtesy of a Minolta DiMage F300. In 2006, I took the plunge and bought a Canon EOS-5D, and it's a superb camera. More recently, I retired my Minolta and bought a Canon Powershot G9 as my new 'carry around' camera. 

I've since acquired a 5D Mark II and (inevitably) a 5D Mark III." 


                     


by 엔젤라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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