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끝난 이야기다.
굽슬굽슬한 머리카락 대신 찰랑거리고 윤기 나는 머리카락은 불가능하다.
`작은 키로 태어났는데도 불구하고 큰 키어야만 한다는 세상이 야속해 더이상 자라지 않는 키가 싫어 절망했던 시간이 있었다. 작은 키로 태어나고 싶었던 것도 아닌데 왜 내가 잘못하지 않은 일을 두고도 반성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까? 하얗고 투명한 피부가 될 수 없는 거무스름하고 탁한 얼굴빛을 가졌는데 효과 만점의 미백 크림을 수시로 발라주고 식단을 관리하고 더 나아가서는 일정한 간격으로 피부과 시술을 받아보라는 sns의 광고가 홍수처럼 쏟아져 일상을 덮친다. 있는 그대로 타고난 특징 그대로 살아가면 게으르고 못난 사람이 되는 세상이라니 이걸 두고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보다는 열심히 몸매를 가꾸고 피부에 투자하고 유행에 따른 패션으로 겉모습을 꾸미는 사람이 훨씬 많다. 마치 잘못된 교육제도에 항의하는 대신 허리가 부러지도록 일하며 사교육을 시키는 부모처럼. 거대 자본 앞에선 어떤 것도 있는 그대로 존재하기 어려운 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가 되고 싶은 사람은 있다. 거대자본에 굴복하지 않고 그렇지만 세상을 바꾸지는 못한 채.
나는 평생 내 머리카락을 당연시하고 산 것과 비슷하게 거의 평생 수줍음과 함께 살아왔다. 내 머리카락은 예나 지금이나 곧고 가늘다. 내가 설령 굵고 굽슬굽슬한 머리카락을 갖기를 바라더라도, 머리카락의 신들은 내게 그 대신 지금의 머리카락을 주었다. 마찬가지로, 내가 설령 자신감 있고 사교적이고 외향적인 사람이 되기를 바라더라도, 성격의 신들은(유전학자, 뇌 화학자, 환경론자로 구성된 팀인 듯하다) 나를 조용하고 내성적인 사람으로 만들기로 결정했다. 어쩔 수 없는 현실이고, 끝난 이야기다.(명랑한 은둔자, 캐럴라인 냅)
어떤 사람들과도 잘 어울리고 웃고 떠들고, 만나면 즐거운 이야기를 가득 안고 나타나 주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외향형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이미 끝난 이야기라고 선포하는 작가 앞에서 자기를 아는 사람의 당당함이 떠올랐다. 극도의 내성향인 작가는 아무리 노력해도 되지 않는 일이 있음을. 이미 신들이 그리 정해두었으니 끝난 이야기라고 선을 그어 버린다. 용감했다. 멋졌다. 스스로를 잘 아는 사람은 남들이 결점이라 지적하는 그것을 결점만으로 여기지 않는다. ' 내가 좀 그렇지. 그런데 그럼 좀 어때? 완벽한 사람은 없는 걸'할 줄 알게 된다. 자기 이해를 넘어 자기 공감으로 넘어간 거다. 그렇게 스스로를 잘 아는 사람이고 싶다. 작가처럼 극 내향형 인간이라면 쉬울 텐데, 사실 나는 그 중간 어디쯤에 서 있다. 내향인이 되었다가도 갑자기 외향인처럼 행동하고, 수줍어서 어쩔 줄 모르다가도 많은 이들 앞에서 전혀 떨지 않았던 적도 있으니까. 내속에 너무 많은 '나'는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을까? 한 가지 분명한 건 엄마의 엄마의 엄마의 엄마를 통해 수많은 유전자들이 나에게 전달되었다는 사실이다. 내 속에 너무 많은 나는 그 유전자들의 통합이 아닐지. 잠정 결론을 내려본다.
내향인이 가진 섬세함과 조용함 그리고 자기만의 세계에 몰입하는 힘, 누군가와 함께 있지 않아도 행복할 줄 알고, 혼자만의 시간을 즐겁게 소비하는 지혜를 우리가 볼 수 있다면.
통통하고 땅달 맞은 몸을 가진 사람의 앙증맞고 귀여운, 말랑하고 토실한 볼 같은 아름다움을 우리가 볼 수 있다면, 작고 소소한 것이 주는 행복과 꾸미지 않은 밋밋한 얼굴이 주는 순수함과 조금씩 깊어지는 주름의 지혜와 오래되고 낡은 것이 품고 있는 소박함과 경이를 우리가 볼 수 있다면, 자본주의가 강요하는, 사회가 억압하는, 문화가 질식시키는 획일성과 일반화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을 텐데. 더 아름답고 싶고, 더 예뻐지고 싶고, 더 소유하고 싶고, 더 인기 있고 유명해지고 싶은 욕망이 우리를 눈먼 봉사가 되게 했으니 보아도 보지 못할 것이요. 들어도 듣지 못할 것이란 말은 바로 이런 일을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
지금껏 만나왔던 동네 엄마들과 친구들과 거래처 사람들과 잠시 스쳐간 이웃들은 다 자기만의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자세히 바라봐주고 섬세하게 들어줄 때 그 사람만이 가진 아름다움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나이 들수록 그런 아름다움을 찾고 볼 일이다. 해서, 잃어버린 시력을 되찾고 싶다. 몰랐던 것을 더 많이 알아가고 싶다.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기 전 태초의 인류가 되어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때서야 비로소 나는 볼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