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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이 있는 일상 Nov 15. 2024

마음은 어디든 갈 수 있지.

휴식을 위해 꼭 어딘가를 찾아가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가령 아침 저수지에 산오리들이 내려와 천천히 수면에 미끄러지는 풍경을 상상해 보라. 시원한 폭포 아래 앉아 있는 나를 상상해 보라. 제주도 오름들을 바라보고 있다고 상상해 보라. 우리의 마음은 어디든 갈 수 있고, 그것이 어디든 내가 원한다면 돌아오지 않고 오래 머무를 수 있다. 이것이 마음의 놀라운 능력이다. <느림보 마음, 문태준>


아파트 정원은 온통 가을이다. 퇴근길 주차장이 화려해 차에서 내리는 순간 나는 조금 초라해진다.  푸르기만 했던 나무들이 여름 내내 품고 있던 마음의 색을 마음껏 세상으로 들어내 보석처럼 반짝일 때면 그보다 더 아름다운 게 있을까 싶을 정도로 황홀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생명체를 뽑으라면, 그건 나무라고 생각한다던 어느 작가의 문장에 격하게 공감하는 요즘이다. ​아침엔 구름이 덕지덕지 하늘을 가리더니 비가 내렸다. 빛이 없는 나무는 영혼을 잃은 모습이었지만 퇴근길엔 열린 하늘로 빛이 사방으로 쏟아지자 다시 찬란해졌다. 그 길을 따라 곧장 팔봉산으로 가고 싶었다. 퇴근 후 해야 할 일 따위는 잊어버리고 마음껏 나무 안에 머물 수 있는 산속으로 도망치고 싶었다. 가을이면 꼭 방문하고 싶은 선운사 생각도 간절했다. 새벽녘에 혼자 차를 몰고 다녀와볼까? 막내언니를 꼬셔서 같이 가자고 해볼까? 남편에게 더 애걸해 볼까? 하면서. 그 모든 일은 머릿속에서만 맴돌 뿐. 차는 정해진 코스대로 집을 향했고 똑같은 주차장에 세워졌다. 아쉬운 마음이 들어 단풍잎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네고 조심스럽게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 이제 곧 떨어질 나뭇잎 하나를 살며시 잡으니 자연스럽게 떨어져 나왔다. 먼 곳에 가기 어렵다면 아파트 정원이라도 한 바퀴 돌면서 가을을 와락 껴안은 나무들을 구경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우선 무거운 짐은 집에 두고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에 도착하는 순간, 나무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이 순위로 물러나고  짐을 내려놓자마자 청소기를 집어 들었다. 정리되지 않았던 빨래를 정해진 옷장에 넣으며 구석구석 청소기를 돌리는 데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도착했으니 내려오라고. 시댁에 가야 했다. 1년 동안 먹을 김장을 하기 위해서. 청소도 마무리 짓지 못하고, 아파트 정원 구경은 꿈도 꾸지 못한 채 서둘러 집을 나섰다. 그리고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늦은 밤을 데려다 놓았다. 하고 싶었던 일은 역시나 못하고 해야 할 일들만 끙끙대며 마무리한 하루다 보니 지쳤다. 쉬고 싶다는 마음의 소리가 크게 들렸다. 날 좀 내버려 둬!라는 외침 같은 것도 곁들어서. 그럴 때 만난 문장이다. 우리 마음은 어디든 갈 수 있고 원한다면 돌아오지 않고 오래 머물 수도 있다는 말이 카페라테의 고소하고 부드러운 향을 떠올리게 했다. 아. 따뜻하다. 포근하다.


가을다웠던 내장산을 떠올려 본다. 돌아보는 길이 너무 예뻐서 '우와~' 탄성을 내질렀었지. 바라보 풍경이 눈 안 가득 채워져 돌아온 후에도 며칠간  그것들을 선명하게 재현해 내곤 했다. 살며시 부는 바람인데도 낙엽은 가볍게 땅으로 떨어져 설렘을 선물했었지. 두 손을 펴고 떨어지는 낙엽을 붙잡으려고 했다. 의 낙화와 내 손이 만나는 우연을 만들고 싶어서. 그 안에 머물며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래도록 머물고 싶다. 드라마에서 나오는 케리우먼처럼 하루 종일 전화하고 회의하고 회신 메일을 작성하고 계획하고, 문제점을 해결한다는  k양(직책이 PL이시라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진심 어린 말이 슬펐다. 그럴 땐 마음의 힘을 믿어보는 것도 좋겠다.  마음에게  전하고 싶다. 마음껏 떠나라고, 되도록 오래 머물다 오라고. 네가 충분하다고 여길 때까지.


이 밤. 마음을 보낸다. 우거진 숲으로, 낙엽이 가득한 수목원으로, 햇살이 눈부신 갈대밭으로, 국화가 만발한 들판으로, 은은한 음악이 흐르는 야외 커피숍으로,  양 옆으로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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