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언니와 함께 청양의 고운 식물원에 다녀왔다. 관람로를 따라 쭉 걷다 보면, 둥그런 화원이 나오고 그 위로 계속 가다 보면 작은 놀이터 속에 나무로 된 탁자와 의자가 놓인 아담한 쉼터가 나온다. 쉼터 모퉁이 끝에 자리 잡은 작은 나무 그네를 보면 누구든 다가가 앉아 잠시 쉬었다 가고픈 마음이 들 테다. 언젠가부터 그네는 나의 베스트 장소가 되었다. 두 발을 굴러 그네를 탄다. 세상 전부가 왔다 갔다 움직이는 풍경이 되고 눈을 감으면 마음속 모든 것들이 가만히 그 흔들림을 만끽한다. 수목원을 걷는 것도 좋지만 그렇게 앉아 나무를 바라보고 하늘을 올려다보고 근처에 심어진 꽃에도 눈길을 주는 시간만큼 즐거운 시간은 없는 것 같다. 흔들흔들 그네 속에서 그냥 나무를 봤다. 언니와 오고 갔던 대화는 생각나는 게 없지만, 햇빛에 반짝이는 나무들과 놀이터 가장자리를 장식하고 있던 보라색 화분들의 단아하면서도 화려했던 모습은 생생하다. 지난해 봄 혼자 그곳을 갔을 때는 새소리도 들렸다. 할 이야기가 그렇게 많이 쌓여 있었던 걸까. 아니면 나에게 무슨 말이라도 걸어보고 싶었던 걸까? 나는 그들의 알 수 없는 언어를 음악처럼 들으며 기뻐하고 있었다. 무언가를 소유할 수 있는 건 바로 그런 순간들이 아닌가. 가만히 서두르지 않고 그것을 바라보는 일. 완전한 몰입으로 어떤 대상 속에 빠져드는 것만큼 마음을 치유해 주는 건 없는 것 같다.
책 300페이지를 읽는 일. 40분짜리 피아노 협주곡을 듣는 일. 두 시간짜리 영화를 보는 일. 미술관 내부를 아주 천천히 걷는 일. 그러는 동안 나의 편견과 아집을 내려놓고 마음을 활짝 열어두는 일. 그럴 때 왠지 인류의 일원이 되었다고 느낀다. 표현하고 경청해 온 사람들의 커뮤니티에 한 발짝씩 다가선다고 느낀다. 이 바쁜 세상에서 시간을 견디는 인내심이란 진화에 불리한 성정일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그 인내심이 없다면 내가 꿈꾸는 다정한 사람들의 세계는 그 꿈의 흔적조차 파르르하게 사라질까 두렵다. <겨울의 언어, 김겨울>
300페이지를 넘어 500페이지가 넘는 책 <속죄>를 읽을 때 냈던 조바심이 떠올랐다. 시간을 견디는 힘이 나에겐 참 부족하구나 한다. 결말을 알고 있는데도 책의 맨 뒤쪽을 펼쳐서 작가가 마련해 놓은 결말을 몇 번이고 확인했다. 빠져들 듯한 장면에서는 숨을 죽이며 몰입하다가도 독서의 여정이 길어지면 흘겨 읽는 방법으로 페이지를 넘겼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의 속도가 빨라져 조금은 천천히 살고 싶다는 열망이 커진다. 이젠 좀 느려도 괜찮을 것 같고, 조금 무료해도 견딜만할 것 같다. 그렇지만 평생을 빠르게 살아온 몸은 적응하기 어려워한다. 앞차의 느린 속도는 늘 짜증스럽고, 해결해 주길 바라는 업체의 문제점은 신속하게 처리되기를 갈망한다. 빨리빨리 문화의 힘은 너무 세고 강력해서 내 몸은 느림이 힘겹다. 하지만, 고운 식물원에서 만끽했던 느림의 포근함을 떠오를 때면, 다시 기운이 난다. 조금 더 느려도 괜찮을 것 같다. 바쁘게 살면서 놓쳤던 모든 걸 세세하게 따져본다면, 안타까운 마음이 커지고 커져서 눈물이 날지도 모르겠다. 그날 그때 그곳에서만이 볼 수 있었던 풍경을 놓쳤을 것이고, 그 사람에게 전해야 했던 마음을 잃어버렸을 거고, 한 발자국 천천히 다가가야 했던 삶의 여정을 뛰어넘어버렸을지도 모르니깐 말이다.
생각해 보면, 오래도록 돌아가야 했던 길이 더 생생하다. 현리 버스정류장에서 아침고요 수목원까지의 먼 길을 친구와 걸었던 날은 영영 잊히지 않는다. 하룻밤을 꼬박 새우며 소설을 읽었던 일들도, 모두가 잠든 밤 홀로 책상에 앉아 늦게까지 시험을 준비했던 일, 남편이 입원해 있던 병원의 병동들 사이를 천천히 걸으며 지치고 우울했던 마음을 달랬던 일까지. 모두가 시간을 견뎌냈던 순간들이었구나 한다. 오십을 살았고 이제 또 오십을 살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시간을 견뎌내는 일에 남아 있는 시간을 더 써야겠다.
해서, 나 역시 다정한 사람들이 꿈꾸는 세계를 지켜내는 일에 힘을 보태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