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이 된 뒤 내 인생을 돌아보면서 그 밑바탕에는 늘 무언가를 기다리는 마음이 깔려 있었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나는 무슨 일이 벌어지기를 기다렸고, 상황이 바뀌기를 기다렸고, 내게 맞는 남자나 직업이나 신발, 옷, 헤어스타일 따위가 휙 하고 나타나서 나를 바꿔주기를 기다렸다. 내가 행복하고, 남들에게 인정받고, 마음이 평화로운 사람이라는 느낌을 외부에서 내게 주입해주기를 기다렸다. <명량한 은둔자, 캐럴라인 냅>
인간의 성장과정은 모든 민들레가 그러하듯이 지독히도 닮았다. 우리 모두 이런 시간을 겪으며 나이 들어가지 않을까? 나는 성인이 되기 전부터 계속 무언가를 기다려왔던 것 같다. 지루하고 재미없는 일상을 바꿔 줄 신나는 일을, 가난에서 벗어나게 해 줄 상상 속 진짜 부모님을, 뾰족 구두를 신고 바쁘게 일터로 걸아가는 나, 내가 좋아하는 치킨이나 만두, 붕어빵을 사 와 줄 언니를 말이다. 기다림은 늘 지루했다. 게다가 기다려도 오지 않는 사람,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 태반이었다. 해서, 기다림이 싫었다. 누군가 약속을 잡았는데 10분 아니 5분만 늦어도 눈을 흘기며 기분 나쁜 티를 내야 했다. 만나자고 해 놓고 약속을 잡지 않거나 뭔가를 사준다고 해 놓고 쉽게 잊어버리는 사람은 잘 믿지 못해 거리를 두었다. 나를 기다리게 하는 모든 것에 화가 나고 짜증이 나서 어쩔 줄 몰라 엉엉 울었던 기억도 장기기억 보관소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런데 기다려야 할 일이 있었다. 충분히 기다리고 기다려야 이뤄지는 일들이 있었다. 기다림이 싫어서 돌아가버리면 영영 만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것, 또 어떤 일들은 아무리 오래 기다려도 소용없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어쩌면 이런 깨달음 역시 기다림의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인생은 기다림의 연속이란 식상한 표현이 왜 생겨났는지 알겠다. 우리가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시간이 금이다', '마른하늘에 날벼락'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등을 문장으로 만나면 의식조차 못하고 지나치지만, 가끔 온몸으로 그런 문장들이 스며들 때가 있다. 진짜였구나 하는 순간들. 삶이 깊어질수록 식상한 문장들이 이정표가 되어 준다. 오랜 시간 인간이 쌓아온 지혜가 뭉쳐 있는 문장임을 알게 되는 순간, 우리의 눈가엔 작은 골짜기들이 여러 개 생겨 있을 수도 있다.
기다릴 필요가 없었던 일을 계속 기다렸던 적이 있었다. 오랜 시간 혼자 좋아했던 남자아이가 나와 같은 마음이 되길 기다렸던 일이나, 그럴듯한 행운이 찾아와 내 삶을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바꿔 줄거라든가, 평생 나만을 위해 삶을 헌신할 멋진 남자를 기다리는 일로 적지 않은 시간을 써버렸다. 두 손을 모아 간절히 기도하면 이뤄지지 않을까 염원했던 늦은 밤의 작은 바락들, 적어 내려갔던 문장들이 쌓여갔다. 무엇을 바라든지 내가 직접 행했던 일들에겐 결말이 있었다. 더 기다릴 텐가 아니면 그만 잊을 텐가라는 선택 앞에서의 결말 말이다. 혼자 좋아했던 남자아이에게 용기를 내어 마음을 전해보고, 나에게 좀 더 맞는 일이 뭔지 고민한 후 도전하고, 이런저런 소개를 마다하지 않고 좋은 사람을 만나보는 노력까지. 외부에서 내게 주길 바랐던 일들을 기다리지 않고 해 보았을 때 그제야 삶이 조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삶에는 견고한 성 같은 게 쌓여 있다. 외부의 침입에서 자신을 보호해주기도 하고, 타인의 삶을 가로막아 오해하거나 질투를 유발하는 성이다. 그 두터운 성을 모른 채 마냥 기다리는 일은 멈춰야 하지 않을까? 견고한 성 안에서 스스로를 관찰하고 무엇이든 성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틈을 내어주는 일은 온전히 자신의 몫이다. 각자의 성 안에서 타인의 삶은 중요하지 않으니까. 아무도 자신 보다 타인을 먼저 볼 수 없으니까. 삶을 바꾸는 일은 기다림만으론 안된다. 성안에서 보이는 게 무엇이든 간에 꽃이라도 그려 볼일이다. 하늘이라도 바라볼 일이다. 삶은 기다림의 연속이지만, 걷고 뛰고 날아가는 일은 온전히 각자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