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신비라고 했다. 맨 처음 성당에 나가 세례를 받기 위해 6개월의 교리공부가 시작되었던 첫날, 신부님은 " 여러분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 자체가 신앙의 신비입니다. 스스로 왔다고 여기겠지만 사실은 하느님의 부름이 있었고 그에 응답하기 위해 이곳으로 오신 겁니다" 그러니 축복이고 신비라는 말씀이셨으리라. 지금으로부터 약 25년 전이라 기억이 가물 하지만 낯섦과 설렘을 가득 안고 시작한 교리 공부 기간 내내 나는 이유 없이 들뜨고 행복했다. 영적 충만이 마음을 차지했고 누구에게든 신앙을 가지라고 포교하고 싶어 안달이었다. 전칠에게도 함께 살던 올케 언니에게도 적극적으로 신앙인이 되라고 권했다. 나처럼 기뻐하고 행복하길 바랐기 때문이다. 그동안 몰랐던 신의 사랑과 자비로 내 삶이 한껏 따뜻해질 수 있다는 것에 감동했던 시기다. 세례를 받고 시간이 꽤 흐른 어느 날 신은 완전히 내게로 왔다. 전과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무심히 돌아본 길 위엔 질서 있게 심어진 나무만 보였을 뿐인데 무슨 일인지 내 안에 자리 잡았던 신의 존재가 모호하고 야릇한 세계에서 명확하고 현실적인 세계로 이동한 것이다. 순간 나는 " 하느님은 진짜 계시는 구나"라고 혼잣말을 했다. 강렬하게 느껴졌던 신의 존재가 내 삶을 관통한 후 언제든 무슨 일이든 신께 고하는 열렬한 신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렇게 굳건했던 믿음이 결혼하고 남편을 간병하고 두 아들을 키우며 사는 일상 속에서 시나브로 허물어져 갔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내 안의 신앙심은 이내 야트막한 방지턱만큼 작아지고 말았다. 신비롭게 왔던 신앙이 삶의 순환에 맞게 가버린 거다. 시절인연처럼. 우리의 만남은 뜨거웠고 환희로 가득했지만, 그 끝은 파도가 바위를 쓰러내 듯이 느리지만 분명하게 이뤄졌다.
해서, 지금 나는 종교가 없다. 언제고 다시 성당에 가겠지 하는 마음마저 옅여졌다. 신앙의 신비가 찾아와 주면 또 그리 되겠지 하는 막연함만 남아 있을 뿐이다. 종교가 없어졌지만, 여전히 나는 영적인 삶을 사랑한다. 기도하는 일이 싫지 않다. 아름다운 자연경관에 감탄하고 경외감에 사로 잡힌다. 우연히 나와 같은 생각을 하다가 통화버튼을 누른 친구의 전화가 신기하고, 남편의 생각이 나와 같을 때마다 영적교감을 떠올리곤 한다. 종교 없이도 스스로 삶의 의식을 만들고, 그것으로 사랑을 나누고 자신을 더 아낄 수 있는 삶이 가능했다. 과학적 지식이 아무리 출중하다 해도 우주는 여전히 신비롭고 별은 아름답다. 구름의 이동과 바람의 움직임, 기후의 변화와 계절의 바뀜이 무엇 때문인지 명확히 알고 있더라도 그것들이 주는 따스함이나 그리움 혹은 짜증스러움이나 안타까움을 느끼는 일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 원래 인간은 보이는 사실과 이미 알고 있는 진실 속에서도 상상의 나래를 펴고 즐겁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창조하는 존재이니까.
저마다 다른 역법을 쓰고 기후도 정치도 미신도 제각일지라도 우리 각자가 기념하는 것의 골자에는 어떤 자연현상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 굳이 신화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우리가 우리보다 더 큰 존재의 일부라는 사실에는 전율할 수밖에 없다. 광대한 우주와 자연의 심오하고 아름다운 진실에 경탄하는 것만으로도 영적으로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다.( 우리, 이토록 작은 존재들을 위하여, 사샤 세이건)
어쩌면 우리가 우주의 일부라는 사실과 우주 안에 무엇이 있든 간에 그것들과 우리가 서로 연결된 사이라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아름다운 존재일지도 모른다. 작은 콩알 하나가 내 식탁 위에 오기까지 전 과정을 처음부터 스스로 만들어가려면 우선적으로 우주를 만드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했다. 우리의 존재도 그 작은 콩알과 다를 바가 없다. 지구는 일 년에 한 번 태양 주위를 돌지만 지구를 포함한 태양계는 거대한 우리 은하를 2억 2500만 년 주기로 돌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2억 2500만 년을 두고 태어난 인간과 지구의 수많은 생명체는 동시대의 운명 공동체가 아닐까? 과학이 주는 지식이 때로는 우리 삶을 영적으로 채운다.
신앙을 떠났거나 처음부터 종교가 없었거나, 아무런 신도 마음에 담아둘 수 없는 사람일지라도, 꽃 한 송이에 담긴 우주를 볼 줄 아는 사람이라면, 구름사이로 빛나는 태양에 감탄하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영적으로 가득한 삶이 가능할 것 같다. 영원처럼 길었던 우주의 시간 어느 틈에 내 시간이 생겨났다는 사실과, 태초 인류의 시작과 함께 수많은 엄마를 통해 연결된 탄생 중에 나란 인간이 태어났다는 경이로움, 내 시간 이후로도 영원과 같은 우주의 시간은 계속 흐를 거라는 자명한 사실 앞에서 겸허함을 느낀다. 신앙과 멀어졌지만, 우리 집엔 여전히 십자가 고상과 마리아 님의 성상이 있다. 예수님을 믿지 않아도 크리스마스를 즐겁게 보내듯이 나는 그 성물을 집안에 모셔두며 기도하는 마음을 보내기도 한다. 성당이나 교회에서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도가 아닐 수도 있다. 어쩌면 나를 존재하게 해 준 우주의 흐름과 세상만물의 움직임에 대한 감사일수도 있겠다.
눈이 내리는 원리를 알아도, 늦은 밤 소복소복 쌓이는 눈의 아름다움은 덜 해지지 않는다. 태양빛을 반사하는 게 달빛이란 사실을 안다고 해서 어두운 밤하늘을 밝히는 보름달의 영롱하고 투명한 빛이 덜 빛나보이진 않는다. 따스한 봄날 세상천지가 꽃으로 뒤덮이는 원리를 알고 있다고 해도, 꽃은 늘 아름답다. 별이 빛나는 까만 밤, 먼 과거로부터 오는 별빛이 죽은 별의 마지막 빛이라도 그 빛에 사랑을 담으며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