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래, 『전태일평전』
전태일에게는 참으로 바라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인간의 나라였다. (...) ‘덩어리가 없기 때문에 부스러기가 존재할 수 없는’ 사회, (...) 그것을 그는 바랐다. 부유하고 강한 자들의 횡포 아래 탐욕과 이해관계로 얽혀진 ‘불합리한 사회현실’의 덩어리 (...), 그것이 분해되기를 그는 바랐다.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들이 그 잔혹한 채찍으로부터 구출되기를 그는 너무나도 절절하게 바랐다.(p.314)
스물두 살,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며 근로기준법 책과 함께 스스로 화마(火魔)에 몸을 던진 전태일 열사. 그는 일평생 ‘부스러기’ 인간으로 살았다. 겨우 중학생 나이의 여공들마저 착취하고야 마는 냉혹한 부의 담합에서 밀려나 있던 주변인의 삶. 그러나 그가 바란 것은 부의 ‘덩어리’에 편입하는 것이 아니었다. 누구도 ‘부스러기’ 인간이 되지 않는 세상을 꿈꾸며 그는 산화한 것이다. 그의 삶은 인권변호사 조영래에 의해 비로소 한 권의 책으로 엮어진다. 『전태일평전』(아름다운전태일, 2020)이다.
이 책의 역사는 한국의 민주화, 산업화가 지나온 질곡을 오롯이 담고 있다. 이 책이 집필된 때는 저자가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로 도피를 이어가던 도중이었다. 저자는 수배자의 몸으로 3년여의 세월을 쏟아 전태일의 수기와 주변인들의 증언을 수집하여 책을 썼다. “대학생 친구가 하나만 있다면….” 전태일의 처연한 바람이 그의 가슴을 때렸기 때문이었다. 실은 1976년에 완성됐지만 군사 독재 정권 탓에 필사본, 복사본으로 읽히던 이 책은 1983년이 되어서야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란 제목으로 초판 출간되었다. 저자명도 밝히지 않은 채였다. 출판사 돌베개와 인쇄소, 서점 역시 문 닫을 걸 각오했다고 한다. 책은 곧 판매 금지 조치 되었고 1987년에 해제된다. ‘망원동 수재(水災) 사건’, ‘대우어패럴 사건(구로 동맹 파업)’, ‘부천서 성 고문 사건’ 등 시대의 어둠 속 상처 입은 소시민들을 변호하며 온몸을 던졌던 저자는 1990년 43세의 나이로 타계하였고, 결국 생전에 자신의 이름으로 출간된 『전태일평전』을 보지 못한다.
이 책은 전태일의 생애와 그가 품었던 이상을 풀어낸다. 1948년, 전태일은 가난한 봉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가진 것’이 없으면 ‘배운 것’마저 없어지던 그 시대. 전태일은 정규 교육을 몇 해 받지 못하고 중학교도 졸업하지 못한다. 그리고 어린 나이에 삼발이 장사, 구두닦이, 신문팔이 등의 일을 전전한다. 그가 평화시장 노동자로 첫발을 들인 것은 1964년, 그의 나이 16세 때였다. 직함은 ‘시다.’ 이는 일본어 시타바리(下張り)에서 유래한 말로, 다리미질과 실밥 뜯는 일, 잔심부름 등을 하는 역할이었다. 하루 14시간 이상을 주사나 각성제로 버티며 꼬박 일해도 겨우 일당 50원*을 받는 잔혹한 노동. 전태일은 자신보다 어린 시다들이 “그 고사리 같은 손으로 먼지구덩이 속에서 굶으면서 애쓰고 있는 걸”(p.134) 본다. 그리고 아래와 같은 일기를 남긴다.
인간을 물질화하는 세대, 인간의 개성과 참 인간적 본능의 충족을 무시당하고 희망의 가지를 잘린 채, 존재하기 위한 대가로 물질적 가치로 전락한 인간상(人間像)을 증오한다.(p.134)
인간이 ‘물질’로 전락해 버린 ‘노동 지옥.’ 그것이 채 스무 살도 안 된 전태일이 경험한 평화시장의 현실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폐병 3기 진단을 받은 여성 미싱사가 해고된 사건을 계기로 그는 각성하게 된다. “죽어가는 저 여공들을 살리자. (...) 저 잔인한 노동조건을 내 힘으로 바꾸어보자.”(p.156) 우연히 근로기준법을 알게 된 그는, 이를 모른 채 혹사당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연대를 위해 ‘바보회’, 이후 ‘삼동회’를 조직하여 노동운동에 본격 투신한다. 노동 실태 조사를 바탕으로 노동청에 진정서를 제출하고 언론 보도에도 성공하였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다. 마침내 그는 결단한다.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p.266) 불길 속에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p.331)라며 소리치던 그는 끝내 숨을 거둔다.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배가 고프다……”(p.339)였다.
저자가 전태일의 생애를 쫓아가며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 그는 전태일이 그의 일기장 곳곳에서 타인을 ‘나의 전체의 일부’ 또는 ‘나의 또 다른 나’로 지칭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이를 통해 전태일의 생애를 관통하는 인간관, 즉 모든 인간은 서로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상을 길어 올린다. 한 사람에게 적대적인 현실은 곧 모든 사람에게 적대적인 현실이며, 한 사람의 신음은 곧 전태일의 가슴에도 파문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누구도 ‘부스러기’가 되지 않는 사회, 그것은 그가 목숨을 버려서라도 추구하던 바로 그것이었다.
저자는 그 자신 역시 전태일을 닮은 삶을 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것 같다. 자신이 유명을 달리한 그해 초, 아들에게 보낸 다음 엽서의 내용에서 이를 읽어낼 수 있다.
앞의 사진은 뉴욕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이다. (...) 아빠는 네가 이 건물처럼 높아지기를 바라지 않는다. 세상에서 제일 돈 많은 사람이 되거나 제일 유명한 사람, 높은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작으면서도 아름답고 평범하면서도 위대한 건물이 얼마든지 있듯이 인생도 그런 것이다. 건강하게 성실하게 즐겁게 하루하루 기쁨을 느끼고 또 남에게도 기쁨을 주는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실은 그것이야말로 이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처럼 높은 소망인지도 모르겠지만...**
여전히 많은 평범한 노동자들이 일터에서 신음하고 죽어가는 오늘, 이 책은 전태일과 조영래의 삶을 통해 말한다. 혼자 우뚝 솟은 첨탑 같은 인생, 우월감과 선민의식에 사로잡힌 인생. 그런 인생이 아니라, 작고 평범한 삶이라도 ‘부스러기’로 밀쳐지지 않고 타인에게 기꺼이 기쁨을 선사할 수 있는, 그런 인생이 귀하게 대접받는 세상. 살 만한 세상은 모름지기 그런 세상이 아니겠느냐고.
* 1970년 서울 시내버스 요금은 15원이었다. 임금의 1/3이 출퇴근하는 데 들어간 셈이다. (원문 주. p.110)
** 출처: SBS(2023.03.16.),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나의 변호사」(70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