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알’을 얻기 위해 ‘피켓팅’을 해본 일이 있는가. ‘피켓팅’은 피가 튀는 전쟁을 연상케 할 정도의 티켓팅을 말한다. ‘포도알’은 ‘피켓팅’을 치러낸 끝에 얻을 수 있는 좌석이다.
나는 예매 사이트의 서버 시계를 켜두고 21:00:00이 될 때까지 기다리면서 고독한 조성진 채팅방에 접속했다. 들어가자마자 누군가가 ‘카네기홀 사진 고화질로 보내주세요’라는 문장이 쓰인 조성진 사진을 보냈다. (...) 화질이 좋은 몇 장을 채팅방에 보냈다. (...) 감사합니다, 선생님. 사시는 동안 적게 일하시고 많이 버세요. (p.62-63)
장류진의 단편 소설 「일의 기쁨과 슬픔」은 ‘포도알’을 보듬으며 오늘을 살아내는 직장인들의 분투기다. 이 소설은 동명의 소설집(창비, 2019)에 수록된 표제작으로, 당시 회사생활과 창작 활동을 병행하던 작가가 2018년에 발표한 소설이다. 작가는 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하였고, 실제로 작중 배경인 판교의 IT 회사에서 7년 이상 일한 경력이 있다고 한다.
주인공 안나는 판교의 IT 스타트업에서 근무한다. 그녀의 회사는 ‘우동마켓’이라는 지역 기반 중고 거래 앱 서비스를 만들고 있다. 성장세를 이어가기 위해 기민하게 움직이던 우동마켓에 어느 날 의심스러운 사용자 ‘거북이알’이 등장한다. 하루에 거의 백 개씩 판매글을 도배하는 ‘거북이알’은 앱의 생리를 어지럽히는 ‘어뷰저(abuser)’인가, 아니면 그저 충성 사용자인가. 안나는 ‘거북이알’과의 대면 거래를 시도한다. ‘거북이알’은 닉네임처럼 걸음이 느린 사람이 아니었다. 점심시간이 끝나기 전에 ‘쿨거래’하고 다시 잰걸음으로 회사로 돌아가는 대형 카드사의 여직원이었다. 그런데 왜 그녀는 이토록 많은 물건들을 거래하고 있는 것일까.
‘거북이알’과 안나의 생존 방식은 서로 닮아있었다. 윗사람의 욕망 내지는 조직의 욕망과 나의 욕망을 ‘거리두기’ 하는 것. 기업의 번창, 버그 없는 시스템. 이런 욕망에 과몰입하면 결국 나 자신이 갉아 먹히게 되니까. 그리고 그녀들은 자신의 ‘포도알’을 보듬으며 현실을 살아낸다. 거북이알에겐 거북이, 안나에겐 ‘루바’와 조성진이 그것이다.
‘천재 개발자’로 회사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입사한 케빈은 그녀들과 달리 아직 거리두기가 잘 안된다. 케빈 역시 어서 조직의 욕망을 적당히 타협하고 그의 ‘포도알’ 레고가 내면의 지분을 더 차지하게 된다면 회사 생활이 덜 고달프려나.
“코드를 좀 멀리서 보면 어때요?” 케빈이 말없이 나를 올려다봤다. “자기가 짠 코드랑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내가 덧붙였다. “버그는, 그냥 버그죠. 버그가 케빈을 갉아먹는 건 아니니까.”(p.60)
이 작품은 ‘거북이알’의 사연을 중심으로 전개되지만, 작가는 소설의 목소리를 안나에게 줌으로써 독자에게 메시지를 전달한다. 안나는 거북이알에게 그녀가 감당하는 부당 대우에 대해 적극적인 문제 제기를 하도록 이끌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녀는 일면식도 없던 거북이알이 털어놓는 이야기에 깊이 공감한다. 그리고 케빈에게까지 대화의 손을 내민다. 그녀는 ‘연대’할 줄 아는 것이다.
연대는 힘이 세다. 굳어진 다수의 시각에서는 ‘어뷰징’으로 보이던 것들이 실은 시스템상의 ‘버그’ 탓일 수 있다는 것이 인식되고 비로소 ‘업데이트’에 이르기까지 필요한 것. 그것은 바로 연대다. ‘케빈’, ‘안나’ 이런 아메리칸 스타일로 서로를 호명해도 생각까지 쿨해지기는 쉽지 않은 우리의 기업 문화에서, 나의 욕망과 조직의 욕망이 건강하게 거리두기 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