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이런저런 일들이 급격하게 많아지는 타이밍에, 최근에는 인공지능에 관한 글을 집중적으로 쓰고 있었지만, 이번 주는 놓치지 않고 써야하는 주제가 하나 있다. 6개월마다 업데이트 하기로 스스로 약속한, 내 아이가 크는 이야기이다. 나는 마케팅 전문가이고, 인문학적 시각의 에세이를 쓰는 작가이기도 하지만, 그런 프로페셔널한 타이틀만큼 중요한 나의 일 중 하나가 '한 인간의 성장을 지켜보고 지원해주는 일'이다. '육아'라는 미명하에 너무 사적이고 가벼운 주제가 될까 우려한 적도 있지만, 지금의 생각은 다르다. 살면서 어떠한 주제를 이리도 가까이에서 시계열적으로 집중적으로 관찰하고 연구할 수 있는 기회는 인생에서 흔치 않다. 게다가 인간의 발달 과정에 따라, 요즘 고민하고 있는 주제인 인공지능을 함께 고민해보는 것도 가능할 같다. 만 네 살의 전반부를 맞이한 인간의 특성을 경험에 기반하여 한번 회고해 보았다.
1. 알아서 행동하기 시작했다.
저번 글에서도 언급했듯이, 인공지능이 절대로 해서는 안될 일이 '시키지도 않은 일을 혼자 알아서'하는 일이다. 그런데 우리집에 살고 있는 작은 인간은 만 네살이 되자 그런 욕구가 급격하게 발달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혼자 양말을 신고 벗고, 옷을 입고 벗고 하는 일은 이미 만 세살도 되기 전부터 독립적으로 하게 되었지만, 단지 알려준 것을 학습과 훈련으로 하게 된 것과는 다른 자발적인 욕구가 부쩍 자라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a.k.a. 뭐든지 '내가 할거야' 단계)
만 네 살인 어느 여름 날, 갑자기 엄마의 발신 번호로 전화가 와서 받았더니 "엄마 보고 싶어. 빨리와~~!!"하는 아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의 할머니이자 나의 엄마가 옆에서 흐뭇한 듯 재미있다는 듯 웃으시며, '내 휴대폰 가져가더니 본인이 직접 리스트에서 찾아서 전화를 걸었다'고 하신다. 이제는 자신의 욕구를 표현하기 위해서 어떤 도구를 어떻게 사용해서 전달을 할 수 있는 지를 정확히 알고, 원할 때 원하는대로 행동을 한다. 엄마는 유튜브를 안보여주니 남에게 조금이라도 폐끼치는 것 싫어하는 아빠한테 일부러 공공장소에서 떼를 쓰고, 엄마가 안 사주는 또봇 장난감이나 초코 쿠키는 할아버지한테 조르면 쉽게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활용할 줄 안다. 상황적인 맥락과 효과성을 판단해서 행동으로 옮길 줄 안다.
그리고, 시키지 않으려는 것들도 하려고 떼를 쓰면서 골치가 아프기 시작했다. 한번은 자신의 손에도 맞을 리가 없는 고무장갑을 억지로 끼고는 직접 설거지를 하겠다고 난리였다. 그러고 진짜로 5분 이상, 정말 진지하게 설거지를 도와준답시고 열심히 세제를 묻히고 헹군답시고 여기저기 물 범벅 난리를 쳤다. 요즘은 시키지 않은 것을 하는 것을 넘어, 안시키고 싶은 것까지 하겠다고 달려드는 의욕을 꺾는 것이 더 어렵다. 그때마다 '호기심과 열정은 지적 성장에 필수적인 요소니까 좋은 거다' 되뇌이며 스스로를 다스리려고 한다.
2. 사고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기 시작했다.
누구도 물어보지 않은 것에 대해 스스로 질문을 하고, 나름의 문제 해결을 위한 아이디어를 내며 사고를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마치 Chat GPT로 비유를 하자면, 상대방이 질문을 던지면 AI는 대답을 하는 것과 같은 프로세스가 아니라 그 두 역할을 스스로 해가면서 해답을 찾아가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랄까. '문제를 해결하라'는 프롬프트를 입력하지 않아도 본인의 '니즈'에 따라 스스로 해답을 찾아가는 것과도 같다.
한동안 코피가 자주 나서 어린이 한약을 지어온 적이 있다. 처음 한약의 쓴 맛을 보게된 아이는 "으아아악 이건 너무 짠맛 짠맛이야!!! 이건 도저히 먹을 수가 없어!!"라며 기겁을 하였다. 여전히 어린 아이답게 절대로 먹지 못한다면서 울고불고 거부를 하다가, 계속 코피가 나지 않으려면 꼭 먹어야한다는 것에 납득을 당하였나보다. 그래서 생각하더니 "엄마 그럼 내가 좋은 생각이 있어~! 구미 비타민을 입에 먼저 꼭 넣고 먹으면 짠맛이 잘 안나서 먹을 수 있을 것 같아. 대신 엄마가 나 다먹을때까지 옆에서 계속 응원해주고."라며 대안을 제시했고, 그렇게 약 한 재를 다 먹게 되었다.
또 한번은 할아버지와 배드민턴을 열심히 치다가 할아버지가 너무 힘들어서 더 이상 못치겠다고 한 적이 있었다. 이 상황에서 체력이 쉽게 고갈될 리 없는 우리 아들은 계속 배드민턴을 치고 싶었다. 그래서 곰곰이 생각하더니 "할아버지, 내가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 할아버지는 힘드니까 여기 앉아서 치는거야. 앉아서 손만 움직여서 치면 훨씬 안 힘들잖아. 그러니까 할수 있어! 계속 더 치자~~"라며 우리 아빠에게는 쉽게 빠져나갈 수 없는 개미지옥과 같은 대안을 제시하였다. 아이는 어떤 문제가 발생한 이유가 있으면, 그것에 대한 어려움을 해결하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배워가고 있는 중이다.
3. 감정이 더 정교하고 적극적이 되었다.
인공지능이 아무리 엄청나게 발전한다고 해도 인간의 Day 1에도 결코 미칠수 없는 영역, 바로 감정의 영역일 것이다.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아니 어쩌면 태어나기 전부터 감정이라는 고유하고 고귀한 것을 소유하지만, 만 네살이 되면서 그 감정은 그 이전보다는 훨씬 발전되고 정교해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아들이 수시로 "안아주세요~안아주세요~"하며 라임을 넣어가며 노래처럼 부르는 빈도가 잦아졌다. 어떨때에는 드러누워서 "지금 사랑이 떨어지고 있어요~ 빨리 와서 안아주고 뽀뽀해줘서 구해주세요오~"하며 오바하기도 한다. 어제는 처음으로 "엄마가 유치원에서 계속 너무 보고 싶었어~"라며 뾰로통한 표정을 짓기도 하였다. 아이가 안아달라며 하루에도 몇번이나 팔을 벌릴 때마다, 나는 오래 전 보육원 자원봉사를 다니던 때의 아이들 모습이 계속 오버랩되어 떠오른다. 꼼짝도 못하는 신생아나 각자 혼자 노는 2-3세 아이들 반을 지나 4-5세 반에 들어가면 아이들이 처음보는 나에게 마구 달려와 서로 안아달라고 난리여서 가슴이 먹먹해지곤 했다. 잘 인지하지 못하는 아기들보다 더 많은 포옹이 필요한 건 어쩌면, 감정이 급격이 성장하는 이 시기의 아이들일 지도 모르겠다.
심지어 올 해 갓 입학한 유치원에서 한 달도 되지 않아 우리 아들을 좋아하는 여자 아이가 있다는 얘기도 들었다. (역시 여자 아이들은 더 빠르다..!) 그 여자 친구는 꽤 적극적이어서 우리 아들을 왕자님(;;)같다며 선물 주겠다고 그림을 그려놓고 기다리기도 하고, 밥 먹을 때마다 옆에서 같이 먹으려 한다고 한참 뒤에 선생님께 전해 들었다. 우리 아들은 여전히 변신 로봇 놀이를 같이할 수 있는 남자 친구들이 훨씬 더 좋은 것 같지만, "엄마는 안경 벗는 게 더 이뻐." "이 드레스(원피스) 입으니까 오늘 엄마 이쁘다."며 묻지도 생각지도 않은 사랑스런 피드백도 서슴없이 던질 줄 안다. 그리고 처음 보는 아이라도 비슷해보이는 또래를 찾아서 "친구야, 나 너랑 놀고 싶어. 나랑 같이 놀자!"며 적극적인 호감을 표하기도 했다. 감정이 정교해짐과 동시에 솔직해지고, 또 적극적이 되었다. (성격도 분명히 한 몫하는 것 같다.)
육아라는 귀한 경험을 통해서 인생에서 그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주제인 '인간의 성장과 발달'이라는 프로세스를 배우고 있다. 이를 통해 우리 개개인이 자라면서 잊었던 과거를 회고 할 기회를 주기도 하고, 좀 더 나아가서는 인간이라는 종의 미래와 가능성에 대한 탐구도 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우리 아들로 비춰본 네 살짜리 인간의 특성을 한번 돌아보니, 인공지능이 앞으로 하지 못할 것이라고 믿고 싶은 영역이 본격적으로 발달하는 시기가 이때가 아닌가 싶다. 그것이 바로 1)시키지 않은 일을 나서서 하고, 2)문제를 스스로 발견 및 정의하여 해결하고, 3)감정의 정교한 발달과 적극적인 표현이었다. 인공지능은 세상의 모든 지식을 보유하고 있을지 몰라도, 어떤 면에서는 세네살 아이보다도 결코 나을 수 없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그 부분'에서 우리는 인간으로서의 고유 영역을 보존하고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