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언니는 은근 말이 많아.”
“내가? 그런가? 네가 편해서 그렇지. 다른 사람들하고 있을 때 이렇게 말 많이 안 해.”
“아니야, 편하고 뭐고 다 떠나서 그냥 말이 많은 것 같아. 예전부터 그랬어.”
“그래?”
얼마 전 지인과 나눈 대화다. 가끔 주변 사람들이 나에 대해 이야기할 때가 있는데 내가 어떻게 타인에게 비치는지 조금은 알 수 있는 기회가 된다.
말 많은 사람이라는 이미지는 별로라는 생각에 부정하고 싶어서 반론을 했지만 실패했다. 상황이나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니 틀린 말은 아니다. 그래서 인정하고 일단락.
대화할 때 자기주장만 피력하거나 알고 있는 지식을 나열하거나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없는 사람을 싫어하는데 혹시나 내가 그런 모습을 보였나 걱정되기도 했다. 내가 싫어하는 것을 내가 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래도 “은근 말이 많다.”라고 표현해 줘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은근”이라는 단어가 부정적인 느낌을 살짝 덜어내 주는 것 같았다. 말이 많은 것이 꼭 나쁜 건 아니지만 “너무”라는 부사가 들어가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인가.
친한 지인과 사적이 만남에서와 다르게 직장에서는 말을 들어주는 역할을 한다. 1인 교습소에서 아이들을 대상으로 미술수업을 하는데 특히 초등학교 저학년들은 문을 들어서자마자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봇물 터지듯 이야기를 한다.
가끔은 반복되는 이야기에 집중을 못할 때도 많지만 그럴 때면 이야기의 마지막 문장이나 단어를 따라 말하며 너의 이야기를 잘 듣고 있다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3학년 정도 되면 선생님이 진짜 제대로 듣고 있는지 재차 확인하기도 해서 조금 더 집중해야 한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대화는 더욱 까다로워진다. 고학년이 되면 나름의 가치관이 서서히 생기기 시작해서 아이의 가치관을 건드리지 않는 선 안에서 피드백을 주며 이야기를 들어주어야 한다. 그러다 중학생이 되면 거의 대화가 단절된다.
자신의 이야기를 쉽게 하지 못하는 아이들도 있다. 그런 아이들은 네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다는 것만 알려 주고 스스로 이야기를 꺼낼 때까지 기다려준다.
한 번은 한 아이가 풀이 죽어서 왔는데 무슨 일이냐고 물어봐도 아무 일도 없다고 했지만 아이의 표정을 보니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네가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선생님이 해결해 줄 수는 없을지도 몰라. 그래도 이야기를 해준다면 수업 시간 동안은 너의 기분을 이해하고 배려해줄 테니까 나중에라도 이야기하고 싶으면 이야기해.”
“네...”
이 아이를 대할 때면 들어주고 싶다고 다 들어줄 수 있는 건 아니구나 생각이 들었는데 수업이 끝나갈 때쯤 친구랑 싸웠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결국 내가 해결해 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열을 내며 상황을 설명하던 아이의 표정이 집에 갈 때는 웃는 얼굴로 바뀌었다.
아이들을 보면 가끔 내가 보인다. 36살을 먹은 나도 이 아이들과 크게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면서 알게 된 사실은 말은 하는 것보다 듣는데 더 많은 에너지를 소모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이 된다는 것도.
항상 친구들을 만나 수다를 떨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목이 칼칼하다. 아직은 내 이야기를 하는데 급급한 어리고 미숙한 대화를 할지도 모르겠다. 지금 쓰고 있는 글도 크게 다르 않을 지도.
자기 이야기를 쉽게 꺼내지 못하는 아이를 기다려 주듯 여백이 있는 대화를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드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