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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뀨어라운드 Aug 08. 2024

서로 씻겨 주는 존재

아내와 아이의 선물


제주도 한 달 살기 여행의 둘째 날. 우리는 ‘제주 에코랜드‘라는 곳을 방문했다. 에코랜드는 걸어도 걸어도 끝이 안 보이는, 무지막지하게 넓은 곳이었다. 땡볕에 내 발걸음은 점점 느려졌다. 아내와 아이는 힘들지도 않은지 걸어가는 내내, 우다다다 뛰며 서로 ‘잡기놀이’ 하느라 바빴다.


한참을 걸어 피톤치드가 향긋한 숲 속에 들어서자, 통나무 길이 보였다. 아이는 통나무 길을 너무 재밌어했다. 숲 속 통나무 위를 다람쥐처럼 네발로 기어 다녔다. 아내는 흥취가 돋았는지 신발을 벗어 손에 들고는, 자갈길에서 맨발 산책을 즐겼다.



다만, 나는 점점 더위에 지쳐갔다. 그럼에도 추억을 남겨보겠다고, 휴대폰을 들고 아내와 아이의 뒷모습을 쫓아다녔다. 그러나 의지만으로는 체력의 한계를 극복할 수 없었다. 다리가 점점 지쳐갔다.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는? 여전히 쌩쌩했다.


그렇게 에코랜드를 2/3 가량 돌아보았을 때, 우리는 갑작스러운 결정을 내렸다. 그것은 바로 ‘스냅 촬영’이었다. 몸이 지쳐 휴식을 호소함에도, 우리는 당장 오늘만 사는 사람들처럼, 즉흥적으로 스냅 촬영을 결정했다. 곧 아내가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에 최대한 셋의 추억을 남겨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잠시 들른 휴게소 안에서 스냅 작가님들을 검색했고, 아주 수월하게 약속을 잡을 수 있었다.


에코랜드를 마저 다 돌고 난 후, 우리는 스냅 촬영을 위해 제주 ”비밀의 숲“ 으로 향했다. 몸이 나른한 것이 이대로 누우면 바로 잠에 들 것 같았지만 힘을 내 보았다.


마침내, 제주 비밀의 숲 주차장에 도착했고, 늘어선 차들 사이로 스냅 작가님과 조우했다. 지쳐서 표정이 굳어 있는 우리 세 가족이었지만, 아이의 지렁이 젤리와 스냅 작가님의 가방에 숨겨져 있던 비눗방울 총 덕분에 웃으며 사진을 남길 수 있었다. 그리하여 숙소로 돌아오자, 내 체력은 거의 방전 직전 상태가 되었다.


운전하랴, 걸으랴, 사진 찍으랴 기진맥진이었다. ’아이고 죽겠다 ‘를 외치며 침대에 몸을 잠깐 누여 보았다. 이 잠깐은 아내도 이해를 해주겠지 하고.


그런데 방 밖에서 아내와 아이가 갑자기 나를 불렀다. 나는 피곤한 마음에 괜히 투덜대며 거실로 나왔다.


“아빠~!”

“아빠~ 저희가 이벤트를 준비했어요!”

(우리 집에서는 아내도 나를 아빠라 부른다.)


아내와 아이의 소리가 복도 끝 화장실로부터 들려온다. '뭐지?' 하면서 다가가자, 화장실에서 아내와 아이가 대야에 물을 떠다 놓고, "아빠~ 아빠~" 하고 있다. 그 앞으로 가자, 나보고 대뜸 발을 내놓으랬다.


“아빠가 오늘 운전하랴, 걸으랴 많이 피곤하실 것 같아서 저희가 이벤트를 준비했습니다~! 자, 발을 여기 담궈 보세요~!“


명랑한 아내의 말소리가 들렸다. 머쓱한 얼굴을 하며 화장실 문턱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양 발을 수줍게 대야 안으로 넣어보았다. 발에 닿는 물이 뜨끈했다.


- 찰브닥 찰브닥-


아이가 조막만 한 손으로 연신, 대야의 물을 퍼내어 내 다리에 끼얹는다. 아내의 손도 이를 거들었다. 아내는 고운 두 손으로 까만 내 발을 주물렀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아이에게,


"OO아, 아빠 발도 마사지해 줘~ 아빠~ 고생하셨어요~ 하고"


틈틈이 아이에게 하는 방법을 일러준다.

그러자 아이는 두 손으로 내 발과 다리를 조몰락 거린다. 그러다 문득 내 다리에 있는 예전 상처들을 작은 손으로 어루만져 주며,


"아팠겠다~ 호오~~"


하고 나를 위로해 줬다.


뜻밖의 경험에 나는 마음이 먹먹해져서


"얘들아 고맙다~"


하고 그저 작은 목소리로 고마움을 표현했다. 잠시나마 투덜대며 밖으로 나온 게 미안해지는 순간이었다.


그간 잊고 있었던 기억이었다. 휴대폰 속 앨범을 뒤지다가, 보물을 찾았다.



아내의 머리를 감겨주었다.


그러고보니 생각나는 기억들이 있었다.


작년 말이었다. 새벽에 갑자기 아내가 나를 깨웠다. 휴지를 돌돌 말아 두텁게 만들어 턱에 대고서.


"미끄러져서 넘어졌는데, 턱이 찢어진 것 같아."


아이가 안방에서 아내랑 같이 자다 침대에서 떨어졌다고 했다. 떨어진 아이에게 달려가다가, 수면 양말 신은 발이 미끄러져서 넘어졌단다. 그렇게 아내는 병원에 급히 가서 응급 처치를 했고, 오후엔 주말에 연 성형외과를 찾아가서 몇 바늘을 꿰맸다.


그로부터 2주일 정도였나. 이틀에 한번 꼴로 아내의 머리를 감겨주었다. 턱에 물이 들어가면 안 되는데, 혼자서는 머리를 못 감을 것 같다고 했다. 처음 한 번만 감겨 주면, 그 이후로는 미용실에 가겠다고 했지만, 아내 머리 감겨 주는 경험을 다음에 또 언제 해보겠냐며, 남은 기간도 정성껏 서비스를 제공했다.


그런데 두피 마사지도 해 달랜다.


… 해주었다.


후반부로 갈수록, 집안일에 아이케어까지 해야 해서, 정성이 조금 약해지긴 했다. 그렇게 2주일이 지나고,  아내가 스스로 머리를 감을 수 있게 되었다.


다행이었다.



아이가 용변의 실수를 했다.


또 생각나는 기억 하나.


불과 몇 개월 전. 퇴근하고 아이와 저녁 시간을 부대끼고 있는데, 아이가 큰 게 마려워서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했다. 화장실에 들여보내니, 다시 안 마려워졌다고 했다.


아이는 요사이 노는 게 너무 재밌어서, 자꾸 화장실을 안 가려다가 실수하는 일이 잦았다. 조금 더 있어 보고, 정 안 되면 그때 나오라고 했지만, 아이는 금방 밖으로 나왔고, 얼마 안 있다가 또다시 후다닥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들리는 소리.


"아빠! 나 팬티에 묻었어 ㅠㅠ"


순간 참을 인이 부족했다. 한숨이 절로 나왔고, 아이에게 빽 잔소리를 하고 말았다. 그리고 내 모습을 본 아내가 화장실로 들어가서, 아이의 뒷수습을 하기 시작했다. 아주 다정하게.


그 다정함에, 나도 속으로 후회를 하고 있는데,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엄마 정말 고마워... 내 응가를 만져주는 사람은 엄마뿐이야..."


웃음이 나면서도 동시에, 엄마의 다정함과 아빠의 부족함을 느꼈다.



가족이란


가족이란 참, 한 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관계다.


제주도에서 아이와 아내는 내 발을 씻겨 주었고, 나는 아내의 머리를 감겨 주었고, 아내는 아이의 엉덩이를 씻겨 주었다.


물고 물리는 관계? 아니, 서로 손길을 내미는 관계.


우리 가족에게 가족이란, 서로를 씻겨 주는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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