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살 남자아이의 체력이란 지치지 않는 에너자이저와도 같다. 아마 아들 가진 모든 부모들은 매일 이 넘치는 에너지를 어떻게 할 자기가 고민거리일 것이다.
그래도 날씨가 맑은 날엔, 아이를 해변으로, 숲으로 데려가서, 마음껏 뛰어놀게 하며, 체력을 소진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비 오는 날이면 참 곤란했다. 아무래도 우리는 자연과 함께 노는 게 좋았기 때문이다. 실내 활동을 할 수 있는 곳으로 외출을 나가도 우리는 금세 돌아오곤 했기에, 비 오는 날이면 시간이 참으로 더디게 갔다.
날씨 좋은 기간으로 고르고 골라 한 달 살기의 기간을 골랐음에도, 막상 도착한 제주는 비가 자주 왔다. 비 오는 날 아침이면, 나는 끄응끄응 거리며 겨우 일어나는데, 아이는 하루 종일 힘이 넘쳐흘렀다. 이건 내게 불가항력적인 큰 시련이었다. 이럴 때면 아이와 단 둘이만 긴 여행을 하기로 한 것이 조금은 후회가 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시간은 보내야겠고. 아이와 나는 숙소에서 그저 평범한 행위에도 의미를 붙여 놀이로 만들었다. 놀이에 굳이 어떤 교육적인 의미도 부여하지 않고, 그저 조금이라도 더 길게, 조금이라도 더 몸을 격렬하게 움직이는 것에 목적을 두고,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렇다. 그것은 시간을 흘려보내는 행위였다. 하루 종일 실내에 갇힌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더 아이를 움직이게 하여 밤잠을 빨리 들게 만들려는 아빠의 간절한 바람이 담긴 행위 예술이었다.
집에서 빨래는 항상 내 당번이었다. 저녁에 아이를 씻겨 놓고 세탁기를 돌리면, 아이가 잘 때쯤 빨래가 완료됐다. 그러면 얼른 건조기에 던져 놓고, 아이를 재우고 난 후, 다음날 빨래를 개곤 했다. 아빠가 빨래하고 개는 게 신기해서 다가오는 아이를 보면 항상 말했다.
“아빠가 할게, 넌 엄마랑 놀고 있어~”
하고, 아이가 일절 건드리지 못하게 했었다. 아이가 이 일에 참여하는 순간, 나 혼자 10분이면 할 일을 또 한참 동안 하게 될게 분명해서였다. 이 현실적인 아빠는 스스로 세운 효율적인 프로세스가 망가지는 걸 원치 않았다.
그리고 제주에 와서 비 오던 어느 날. 한참 빨래를 개는 와중에, 나는 이번 제주 한 달 살이 여행의 테마가 ‘스스로 여행’이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어차피 비가 와서 할 것도 없고, 그렇다고 영상을 주야장천 틀어주자니 그건 싫고, 아이에게 빨래나 같이 개자했다.
평소라면 아빠가 항상 안된다고 했던 것을, 같이 하자고 하니 아이는 신이 났다. 조물조물 작은 손으로 빨래를, 이건 갠 건지 아니면 꾸겨놓은 건지, 알 수 없는 형태로 만들어 놓고 다했다고 한다. 결국 모든 빨래는 내 손을 다시 거쳤다. 모름지기 명품은 장인의 손을 반드시 거쳐야 하는 법이었다.
그렇게 빨래를 다 개 놓으니, 아이가 씨익 웃음 짓더니 엉덩이부터 시작하여 몸을 대자로 빨래 위에 널브러졌다.
“으히히히히”
장난치는 웃음소리를 가득 내며, 빨래 위에서 몸을 뒹굴었다.
'아들아 왜 그러는 거니...'
수건을 예쁘게 개 놨더니, 발로 수건만 쿵쾅쿵쾅 밟으며, 징검다리처럼 건너갔다. 결국 수건들은 다시 개기 전 형체로 돌아갔다.
'이놈 자식 가만 안 둬...'
그렇게 한참을 실랑이하다가, 드디어 모든 빨래를 차곡차곡 개서 원래의 자리로 가져다 놓기만 하면 되었다. 하지만 또 아이가 빨래 위에서 장난을 칠까 두렵다. 나는 급히 아이디어를 생각해 냈다.
“우리 이제 지게차 놀이하는 거야! 너가 이 수건들 지게차로 실어서 저기로 아빠한테 갖다 줘!”
빨래 가지고 장난치는 것도 재밌는데, 거기다가 지게차 놀이라고?? 아이는 아주 신이 났다. 비가 와서 어디도 나가지 않아, 아침부터 내복인 채였는데, 내복 입은 지게차로 변신했다.
“지게차가 갑니다. 지게차가 갑니다. 위이이잉”
“비키세요 비키세요. 지게차가 갑니다.”
혼자 입을 연신 나불대며 지게차 흉내를 냈다. 하지만, 지게차의 성능이 좋지 못한 지, 한참이 걸려서야 수건 두 개를 아빠에게 운반했다.
성공이다.
지게차의 성능이 떨어질수록, 놀이하는 시간이 길어져 갔다. 그렇게 저녁이 가까워졌다. 이때 이러고 열심히 논 덕분에, 아이는 집으로 돌아와서 부쩍 형아가 되었다. 내가 빨래를 개고 있으면 아이가 다가와, 쉬운 건 자기가 개겠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곤 자기 속옷과 양말, 손수건들을 제법 잘 개어 놓는다.
역시 집안 일도 조기교육이 필요하다.
서귀포에 위치한 두 번째 숙소에 도착해서, 구석구석을 탐색하는데, 우리 눈에 밟힌 게 하나 있었다. 장롱 꼭대기에 있던 반투명한 상자였다. 그 안에는 색색깔의 긴 빨대들이 들어있었다.
“웬 빨대가 이렇게 가득 있지. 이게 뭘까?”
하고 중얼거리는데, 아이가 달려와 외쳤다.
“나 이거 알아! 어린이집에서 해봤어. 이거 이름 빨대 블럭이야!”
나는 이게 블럭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신기했다. 세상에 빨대 블럭이란 블럭도 있었구나.
’아 이게 블럭이라고? 신기하네‘
나는 그저 신기하다고 중얼거리고, 다시 장롱에 넣어놓았었다. 그리고 비가 많이 오던 어느 날. 이 빨대 블럭 상자를 다시 꺼냈다. 어른이라고 항상 아이에게 가르쳐주란 법은 없지. 이번엔 아이에게 놀이하는 법을 배워보자고 생각했다.
“이거 한번 해보자! 아빠한테 하는 방법 가르쳐 줄래? “
“응! 내가 가르쳐 줄게!”
항상 엄마나 아빠가 무엇을 가르쳐 주다가, 이번엔 자기가 엄마 아빠를 가르쳐 줄 수 있게 되자 신이 난 모양이었다. 아이의 한차례 강의를 듣고 난 뒤, 빨대 블럭으로 실습을 하기 시작했다.
시작은 칼이었다. 십자 모양의 연결 블럭을 가지고 위아래, 좌우 네 곳에 빨대를 꽂았다. 그리고 칼이라고 외치며 아이와 부딪쳐 보았다.
- 챙챙챙챙
빨대끼리 부딪치니 소리가 날 턱이 없다. 부딪치는 소리는 입으로 낼 수밖에. 그렇게 한참을 휘두르다 보니, 시간이 또 안 가기 시작한다. 이윽고 다른 놀이를 생각해 냈다. 빨대 블럭으로 집 만들기다. 자석 블럭으로 집을 만들던걸 응용했다.
처음엔 인형 하나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작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후엔 아이가 들어갈 정도로, 그다음엔 내가 들어갈 정도로 크게 만들었다. 그런데 만들고 보니 집이 아니다. 감옥 같기도 했다.
자꾸 사방팔방을 뛰며 난리를 치는 아들의 머리 위에, 빨대 블럭 집을 씌워 버렸다.
“꺄아아아아아악”
돌고래 소리가 난리도 아니었다. 조용한 시골 마을에 5세 아이가 함께 살게 된 여파는 꽤 컸다. 급히 손가락으로 입을 가리며 “쉿” 주의를 주었다. 아이 키워 본 부모라면 알겠지만, 한번 흥분한 아이를 다시 진정시키기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에라 모르겠다. 이번엔 나도 같이 빨대 블럭 안으로 들어갔다. 이것은 이제 집이라기보다는, 누가 무너뜨리지 않고 통과하느냐 겨루는, 장애물 경기나 다름없게 되었다.
그렇게 한참을 놀다 보니 늦은 밤이 되었고, 그렇게 우리는 또 비 오는 날을 숙소 안에서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외에도, 남은 날들 동안 우리는 다양한 놀이들을 시도해 나갔다. 이 작고도 작은 거실에서 초시계를 맞춰 놓고 원을 그리며 달리고 또 달리는 달리기 경기부터, 씨름에 레슬링까지. 아빠와 5살 아들이 숙소 안에서 즐겁게 할 수 있는 놀이란 결국 몸을 쓰는 놀이가 최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