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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미 파커 Mar 10. 2024

명랑의 기본은 체력.. 그렇게 '달리는 인간'이 된다

하루키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지  - 우리 각자의 속도에 대하여  

요즘 난 ‘달리는 인간’이다. 아직 초급 러너지만, 꽤 꾸준히 달리고 있다. 주말에 1~2번, 그리고 평일에 1~2번, 주 평균 2~3회를 목표로 하며, 소박하게 한 번에 30분 정도 뛴다.


달리기 시작한 건, 본격적인 ‘솔로 활동’을 시작하면서다. 얼마나 외롭든, 얼마나 솔로로 살든. 일단 최대한도로 ‘명랑’하게 지내야겠다고 결심하면서다. 달리기는 솔로 활동과 굉장히 밀접하다. 본질적으로 ‘혼자’하는 행위라서다. 흔히 말하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 아무도 시키지 않았고, 하지 않아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뱃살은 늘어나지만) 않는다. 시작도 지속도 마침도 온전히 자신의 ‘의지’를 실험하는 일. 그래서 나는 ‘달리기’를 솔로 활동의 기본, 즉 ‘기초 체력’이라고 부르고 싶다. 물론, 솔로든 아니든, 또 어떤 나이 대와 시절을 지나든, 충만하고 충실한 삶은 ‘체력’이 따라줘야 한다.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란 정언까지 가져오지 않아도(결국 가져왔지만), 중년으로 접어드는(아직 되어가는 중이다) 동지들은, 몸소 깨우치며 살아왔을 것이다. ‘저질’ 체력이 얼마나 우리의 마음과 일상을, 삶 자체를 ‘저질’로 만드는지….
 
달리는 곳은 다양한데, 주말엔 주로 집 근처다. 조성된 지 얼마 안 된 ‘신도시 풍’ 수변 공원은 편리하고 쾌적하다. 이사 온지 6년. 여전히 조성 중인 구역이 있지만, 제법 사람들이 걸으며 다져 놓아 한 기운이 감돈다. 이제 모두 ‘주인’ 같다. 그런 풍경은 안정감을 준다.

그림=픽사베이


매일 운전해서 서울로 출퇴근 하는 경기도민이라, 평일엔 내 이웃을 볼 일이 없으니, 달리기를 하면서, ‘아, 우리 동네에 이런 분들이 사시는구나’ ‘마을에 아이도 많고, 개들도 참 많군’ 하고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세 발 자전거를 타기 시작한 아이, 아빠에게 두 발 자전거를 배우고 있는 어린이도 본다. ‘40대 비혼’의 삶에 아이가 있는 풍경은 낯설고 귀하다. 몸이 천근 만근 늘어지는 주말, 이불을 박차고 공원에 나와 달리지 않는다면, 쉽게 볼 수 없는 장면이다. 육아에 시달리고 자녀 교육에 치이는 현실의 부모들(나와 다르게 사는 내 또래들)은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고 할지 모르겠으나. 하여간 저는 여러분들의 아이들을 보며 생각합니다. 아, 너희도 애쓰고 있구나, 지금 도전 중이구나. 언니, 아니 이모, 아니 아줌마도 열심히 할게. 헉헉대며 기울어지던 몸을 다시 세운다.



무라카미 하루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책 표지


‘달리는 인간’이 되고 싶은 막연한 꿈은 오래됐다. 20대 후반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읽고 나서부터다. 실제로 하루키는 지독하게 달리기를 사랑한다. 그리고 굉장히 오래, 잘, 여전히 달리는 사람이다. 책은 ‘달리기’라는 하루키의 취미이자 일상을 축으로 써내려간 회고록인데, 그의 인생철학과 문학론을 엿볼 수 있어 전세계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신입 기자 시절 이 책을 읽으며 마음을 다잡곤 했다. 솔직히 물리적인 ‘달리기’를 할 엄두는 나질 않았고(하루하루 너무 피곤했으니까!), 하루키 같은 대작가도 자신이 사랑하는 일, 그러니까 글쓰기를 오래, 꾸준히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 매일 고통스러운 달리기를 열심히 하고 있다는 것에 위로를 받았다. 언젠가(기운이 좀 생기면) 하루키처럼 진짜로 달려보고 싶다는 원대한 목표를 품고. (그걸 실행하는데 10년이 넘게 걸릴 줄은 정말 몰랐지만…)
 
‘4N’년 인생 돌아보니, 그다지 의지도 강하진 못했다. 기세 좋게 시작했다가, 금세 지쳐 포기하고, ‘내가 그렇지 뭐’ ‘나는 왜 이럴까’ 했던 게 한 둘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 같은 과(?)들은 물리적(?), 혹은 심리적 강제성이 있어야만 간신히 끌려가는 편이다. 무리를 해서라도 PT나 개인 필라테스 강습을 받곤 했었는데, 그게 다 ‘의지’를 돈으로라도 사기 위함이었다. 달리기를 시작하고 나서, 가장 만족도가 높은 건, 바로 이 지점이다. 온전히 내 힘으로, 내 의지로, 내 두 다리로 이뤄낸 쾌거(?). 이제는 엄마한테 등짝 스매싱을 당한다 해도 꿈쩍 않는 나이가 됐는데, 같이 달리자며 손잡아 당기는 남자친구나 남편(그런 남편 별로 없다고요?)도 없고, 산책이 필요한 반려견도 없고, 심지어 내 MBTI는 외출 하자마자 집에 들어가고 싶어진다는 ‘INFP’다. 그런 열악한(?) 조건을 딛고, ‘달리는 인간’이 되자며, 되어야 한다면서 나 자신을 힘껏 몰아붙였다. 이것도 혼자 못하면서, 무슨 ‘명랑’을, ‘솔로 활동’을 논하느냐! 저 멀리서 나를 내려다보는 또 다른 ‘나’(이상향의 나)가 격하게 꾸짖었기 때문이다.
 
PT나 필라테스처럼 큰 돈도 안 들고, 장소에도 구애받지 않는 건 달리기의 최대 장점이다. 운동화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달린다. 최근 애용하는 장소는 회사 근처. 바로 덕수궁 돌담이 이어지는 정동길이다. 점심 시간엔 인근 직장인들로 북적대는 곳. 식당 앞 줄지어 선 사람들, 식사를 마치고 커피 한잔 들고 산책하는 사람들, 그리고 늘어나는 관광객들….

달리기는 주로 퇴근 후에 한다. 모두 빠른 걸음으로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시간, 마치 연어처럼 그 무리를 거슬러, 나는 뛴다. (하지만 뭔가, 조금 부끄러워 마스크는 쓰고 뛴다) 시간의 축적이 느껴지는 건축물들이 늘어선 지역이라 그런지, 저녁 무렵 정동길을 달리면 이상하게 마음이 울렁거린다. 하루 일과가 끝나고 다들 서둘러 집으로 향하는 때, 나만 혼자 특정 장소에 갇혀버린 ‘지박령’이 된 기분. 달리는 건 분명 나인데, 어느 순간 저들이 달리고, 내가 멈춰서 제자리를 맴도는 것 같은 착각. 갑작스레 ‘타임 슬립’으로 시공을 초월해 버릴 것 같은 상상. (고수가 되어야 오는) ‘러너스 하이’는 절대 아닐 텐데, 달리기 고수님들, 혹시 이 증상은 뭔지 아시나요.
 


몇 주 전엔 부산 해운대 바다를 달렸다. 좋아하는 뮤지컬을 보기 위해 부산에서 1박을 했기 때문이다. 반려동물을 기르면, 그 중심으로 라이프 스타일이 재편된다고 하던데, 내겐 ‘달리기’가 그 역할을 했다. 부산까지 갔으니, 이왕이면 바다를 보며 달리고 싶었다. 공연장과 거리가 있지만, 일부러 해운대 인근에 호텔을 잡았다. 금요일 저녁 기차로 내려가, 냉채 족발을 먹고, 해운대에서 자고, 아침 일찍 해운대 러닝을 한 후, 돼지국밥을 먹고, 오후 공연을 보고 서울행 기차를 타는 ‘알찬’ 솔로 활동(이것은 추후 다른 편에서 자세히 공개하겠다)을 했다.


토요일 오전 해운대를 달리며 만난 풍광은 또 새롭고 흥미로웠다. 바다 조망으로 연결된 한 호텔의 야외 정원에선 한참 결혼식이 준비 중이었다. 한껏 달뜬 신부와 삼삼오오 모여있는 여성들이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고, 여기저기 까르르까르르 웃음꽃이 피었다. 오늘처럼 날씨 좋은 날, 저기 저 신부가 되어도 좋았겠지만, 신부의 친구가 되어 춤을 춰도 좋았겠지만, 그걸 보면서 달리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아. 잠시 곁눈질 하다, 앞을 본다. 달린다.


숨이 차 보폭을 줄인다. 이번에는 "아버님, 좀 더 활짝 웃으세요!" 하는 카랑카랑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린다. 또 곁눈질. 그 ‘아버님’이 아주 젊어서흠칫 놀랐다. 백일 혹은 돌(죄송합니다, 잘 구분을 못…)이 된 듯한 아이를 안고 어색한 듯 웃는 남성. 아, 그렇군. 그는 이 아이의 아버님이 맞다. 옆에는, 젊은 ‘어머님’. 누군가의 인생 필름이었나. 결혼식을 스쳐 달려, 가족 사진을 찍는 풍경에 다다르자, 많이 이들이 걷고, 선택하는 일반적이고 가장 흔한 인생의 ‘단계’들을, 나는 왜 경험하지 않았나, 염원하지 않았나, 왜 밟지 않았나, 혹시 넘지 못했나, 잠시 생각했다. 달릴 때는 온전히 달리는 것에만 집중하라는데, 아직은 ‘보이는 것’들에 반응하는 뇌를 어찌할 수가 없다. 잡생각이 많아진다. 어쩌면, 나만의 달리기 방식. 문득, 나도 ‘어머님’ 소리를 듣는 날이 올까?(아, 이미 백화점 구두 매장에선 가끔 ‘어머님’이라 불린다.......) 다시 앞을 본다. 달린다. 바닷바람이 분다. 모래가 많다. 마스크를 꺼내 쓴다. 눈이 따갑다. 그래도 달린다. "수고하셨습니다! 오늘의 운동을 마쳤습니다." 달리기 앱에서 흘러나오는 기운 찬 남성의 목소리가 멈출 때까지.


‘달리는 인간’의 끝엔 뭐가 기다릴까. 체중감소, 지구력 증가, 매번 새로운 풍경 감상, 매번 또 다른 깨달음(혹은 잡념)…. 뭐가 있을지는 모르겠는데, 장기적으로는 하프코스 아마추어 마라톤 대회에 출전해 완주한다는 큰 꿈이 있다. 한마디로 ‘장거리 러너’가 되고 싶다. 어디서 들었는데, 선수가 아닌 일반인이 달리기를 시작해서 소위 ‘전성기’를 맞이하려면, 10년이 걸린다고 한다(그러니까, 하루라도 어릴 때 시작하시기를). 그렇다면, 앞으로 10년 뒤가 될지 모르겠고, 그때라도 가능하다면, 미래의 나를 미리 칭찬해주고 싶다. 그리고, 그리 하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대신, 걷지는 말자고, 끝까지, 달려 보자고.


하루키는 자신의 묘비명에 ‘작가(그리고 러너)’라고 쓰고 싶다고 했다.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는 말을 남기고 싶다고 했다. 나는 늘 일과 취미, 소설 쓰기와 달리기에 늘 일관되고 꾸준한(그러면서 결과물도 좋잖아!) 하루키의 삶의 자세와 태도를 늘 본받고 싶어했다. 원해서 택했지만, 원치 않는 일을 더 많이 해야 하는 게 직장생활이라는 걸 뒤통수 맞듯 하나씩 깨우쳐 갈 때마다, 나만 홀로 뒤쳐져 있는 것 같을 때, 왜 나의 속도는 ‘저들’과 다를까 의문이 생길 때마다, 그의 책을 펼쳤다. ‘멀리 풍경을 보자’는 말을 되새기곤 했다.

달리는 솔로 활동 여자가 된 이상, 그 때 그 마음, 다시 품어 본다. ‘곁눈질’ 많은 내 달리기 습관을 조금씩 개선해 나가야 겠다. 이 달리기가 진짜 ‘명랑한’ 솔로 활동이 되려면 말이다. 그래서 앞으로 이 말을 주문처럼 외우며 달리려 한다. 동지들도 해보시길. ‘화이팅’

"나는 또 한 살을 먹고 아마도 또 하나의 소설을 써가게 될 것이다. 어쨌든 눈앞에 있는 과제를 붙잡고 힘을 다해서 그 일들을 하나하나 이루어 나간다. 한 발 한 발 보폭에 의식을 집중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동시에 되도록 긴 범위로 만사를 생각하고, 되도록 멀리 풍경을 보자고 마음에 새겨둔다. 누가 뭐라도 해도 나는 장거리 러너인 것이다."  

이미지=픽사베이

*이 글은 2023년 5월에 작성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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