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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해주 Jan 23. 2024

#2. 벚꽃은 지기 전, 가장 화려하다

- 지호의 이야기 2

태선우를 만난 건, 벚나무에 뽀얀 꽃망울이 맺히는 계절이었다. 지호의 인생 계절에서 만난 그해 벚꽃이, 눈부시게 찬란하고 또 시리도록 아프게 될 줄 그땐 몰랐다.


"지호야, 언니 결혼식 준비 좀 도와줘."


결혼식을 한 달 앞둔 사촌 지혜의 전화에, 지호는 곧장 서울행 기차에 올랐다. 서울에 올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시골에서 나고 자란 그녀에게 이곳은 마치 빛에 둘러싸인 경이로운 도시였다. 사람들은 왜 이렇게 세련됐으며 건물들은 어쩌면 하나같이 우아해보이는 건지. 이런 자신을 보며 지혜는 촌스럽다고도 했지만. 시골도 아닌 서울 언저리에 사는 사람들도 이곳에 입성을 못해 안달이 아닌가. 그렇다면 '언저리 주변인'조차 "인서울, 인서울"을 노래부르는 건 도대체 뭘로 설명을 해야 할까.

지호에게 서울은 그랬다. 딱 보는 것까지만. 겉보기에 예쁜 장미를 한번 꺾어보겠다고 겁도 없이 손댔다가 날카로운 가시에 찔려 피를 보는 것처럼. 어쩐지 함부로 손을 대서는 안 될 것만 같은. 화려하고 동경할 만한 도시가 분명했지만, 발을 들이고 나면 더는 발을 뺄 수 없는, 그래서 인생이 제대로 꼬일 것만 같은 그런 기분. 가끔 기분 전환으로 여행을 떠나온 것처럼, 퍼스널 스페이스를 분명하게 하고 싶은 그런 곳.  

내 인생에 서울살이 한 달이면 차고 넘치지. 지호는 달뜬 마음으로 도시의 야경을 바라봤다.

서울에서 한 달은 눈 코 뜰 새 없이 바쁘게 흘러갔다. 눈 뜨자마자 지혜에게 이끌려 청첩장에, 한복 맞춤에‥ 도대체가 누가 결혼을 하는 건지 알 수도 없이 지나가버렸다.

한 달은 참 쉬웠다. 지호가 서울에 빠져들기에 충분할 정도로. 사람은 적응의 생물이라고 했던가. 나고 자란 고향보다 서울이 더 친숙해지니 참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다. 언제부터 서울이라고. 하지만 그도 그럴 것이, 때가 되면 딱딱 오는 지하철과 버스, 발만 내딛으면 마트며 편의점이며 병원이며, 서울의 인프라는 사람이 살기에 끝내주게 편리했으니까. 자동차가 있어도 시내에 한 번 나가려면 40분은 기본으로 운전을 해야 하는 무오리와 전혀 딴판이었으니 말 다한 셈이지.

그렇게 한 달이 지나 지혜의 결혼식을 이틀 앞둔 날이었다. 그동안 여기에 정이라도 들었던 걸까. 이틀 후면 무오리로 내려가야 한다는 서운함과, 왠지 모르게 다시 내려가고 싶지 않다는 마음까지 들었던 거다. 너무 신경을 쓴 탓인지, 아니면 정말 서울에 눌러 앉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자리를 잡기라도 한 건지. 저녁을 먹고 난 후부터 따끔따끔 오른쪽 아랫배가 신경을 긁기 시작하더니 새벽 어스름할 때부터는 배가 심하게 뒤틀리고 구토 증상까지 일었다. 끙끙 앓는 소리가 절로 나고, 식은땀으로 온 몸이 축축해졌다.


"언니이.. 언..니이.."


지호는 꺼져가는 소리를 쥐어 짜 옆에 잠든 지혜를 불렀다. "왜‥" 잠에 취한 목소리로 대꾸하던 지혜가 지호의 모습에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너 왜 이래! 응? 지호야! 지호야!!"


아득히 들리는 지혜의 목소리 뒤로 지호의 기억이 끊어졌다.

지호의 의식이 돌아온 건 다음날 오후. 슴벅슴벅,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흐릿한 초점을 맞추려 미간에 온 힘이 몰렸다. 점차 뚜렷해진 시야에 들어온 건 새하얀 천장이었다. 여긴 어디지, 시선을 아래로 내리니 손등에 얌전히 꽂힌 링거 바늘이 보였다.


"정신이 좀 들어?"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천천히 돌리니 지혜의 안도하는 표정이 들어왔다. 왜 내가 병원에 누워 있냐고 눈으로 묻는 지호에게,


"여기가 어딘가 싶지? 어디긴 어디야, 병원이지. 너 맹장 터졌대. 조금만 늦었으면 복막염으로 퍼져서 배를 아주 갈라야 했을 뻔했다더라."


맹장? 배를 갈라? 아직 결혼도 안 했는데 배를..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입 안이 까끌하고 목이 심하게 탔다.


"나 물 좀..."

 

지혜가 갈라진 목소리로 물을 달라는 지호의 입에 젖은 수건을 물렸다.


"너 가스 나올 때까지 아무것도 못 먹어. 그리고 아프면 빨리 말을 해야지! 미련하게. 결혼식 전에 초상 치를 일 있니?"

"미안해 언니.. 나 결혼식 못 가겠지...?"

"그 몸을 하고도 결혼식 얘기가 나오냐"


지혜가 걱정스레 지호를 흘길 때였다.

"드레싱 할게요"


병상 커튼을 걷고 앳된 얼굴의 의사가 들어섰다. 드레싱 트레이를 침대 한 쪽에 가만히 내려두고,


"환자복 상의 조금만 위로 걷을게요"


환자복을 걷은 후 능숙한 손놀림으로 수술 부위에 드레싱을 하는 남자. 쿵쿵, 지호의 심장이 갑자기 제멋대로 뛰기 시작했다. 심장아 너 지금 왜 이러는 건데? 고장난 건 맹장이지 네가 아니잖아? 지호는 이 상황이 하도 어이가 없고 기가 막혀서 "큼큼" 헛기침을 해댔다. 기침 소리에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들고 걱정스레 보며 묻는다.


"혹시, 불편하신가요?"

"…네? 아, 아뇨."


지호는 당황스러움에 눈을 꼭 감고 반대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불편하시거나 아프면 말씀하세요."

"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대답한 지호를 보고서 다시 드레싱에 집중하는 남자. 쿵쿵. 눈치없는 지호의 심장이 또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애써 펄럭이는 심장을 다독이며 슬며시 곁눈을 뜨고 흘깃 보는 지호. 하얀 의사 가운이 잘 어울리는 남자였다. 그리고 왼쪽 가슴께에 선명한 이름. 태선우... 지호는 그의 이름을 속으로 되뇌며 다시 눈을 감았다.

매일 같이 자신의 수술 부위를 드레싱 하러 오는 남자를 기다리게 된 것은 지호로서도 굉장히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이상하게 그가 기다려졌다. 드레싱을 하겠다, 불편하면 이야기해라, 수술 부위는 잘 아물고 있다…. 선우가 지호를 향해 하는 말은 언제나 이 세 문장이 다였다. 별다를 것도 없는데. 이런 걸 두고 첫 눈에 반했다는 건가 싶기도 하고.

그러고 보니 내일이 퇴원이었다. 퇴원을 하고 나면 곧장 무오리로 내려가야겠지. 이런저런 아쉬운 마음에 애먼 베갯잇만 쥐어다 놨다 하고 있자니 밖에서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드레싱 할게요"


태선우였다. 다른 날과 다름없이 똑같은 루틴으로 드레싱을 하는 남자. 이 남자의 얼굴도 오늘이면 끝이겠구나. 더 볼 일은 없겠지. 말이라도 한번 걸어볼까 별별 생각으로 지호의 머릿속이 어지러울 때였다.


"내일, 퇴원하시죠?"


선우가 처음으로 다른 걸 물어왔다.


"아… 네."

"그럼 이제 환자가 아니시네요?"

"그렇...죠."

"혹시, 남자친구 있어요?"

"네? …아뇨"


그 순간 지호의 앞으로 불쑥 선우의 손이 다가왔다. 핸드폰을 쥔 채로.


"번호, 알려 줄래요?"

"…??"

"밖에서 따로 밥 먹어요, 우리"


우리라고 했다. 환하게 제 앞에 선 남자가 분명 그렇게 말했다. 우리, 라고.

경이로운 도시에서 만난 경이로운 남자, 그리고 경이로운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창밖에 흐드러지게 핀 벚꽃이 너무도 애잔하기에.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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