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호의 이야기 5
“지호 씨랑 나랑 둘이 살아갈 집. 서로 다르게 살아서, 한 공간에 있다보면 부딪히기도 하고 서운할 때도 있을 거야. 하지만 우린 잘해낼 거라고 믿어.”
“치- 그걸 선우 씨가 어떻게 알아”
“피- 내가 그러기로 결정했으니까, 지호 씨랑”
같이 살자고 했던 그날, 선우가 한 말이었다. 우린 잘해낼 거라고. 그렇게 믿는다고. 그러기로 결정을 했다고. 바보같이 왜 그땐 몰랐을까.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있을 거라는 걸. 사람의 인생이란 이런 날들의 연속이라는 걸.
엄마와 아빠가 차례로 자신의 곁을 떠나갈 때, 가지말라는 말 한마디 못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에 소리 없이 눈물만 뚝뚝 흘렸던 그때, 다짐 비슷한 걸 했던 것 같다. 앞으로는 버림받지 말자고. 내가 먼저 버리자고.
떨리는 눈동자 속에 오롯이 자신만을 담아내는 선우의 눈은 왜 그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건지.
"다시 말해봐, 서지호. 방금 뭐라고 했어?"
"너 버린다고, 태선우."
"지호 씨. 서지호!"
선우가 떨리는 손으로 지호의 양 어깨를 마치 애원하듯 꾹 붙들었다.
"우리, 잘하기로 한 거 잊었어? 그러기로 했잖아, 나랑."
지호가 다시 아래턱을 지끈 물었다.
"그랬지. 그런데, 분명히 우리라고 했어. 태선우 씨가."
선우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그래, 우리."
"그런데 지금 우리가 어딨니. 계획은 너 혼자, 그거 틀어지면 뒷일 감당은 나 혼자야?"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미현이 말했다.
"내가 더 있어야 할 것 같지는 않고. 마무리 잘 부탁하죠, 서지호 씨."
미현은 제 할 일은 끝났다는 듯 자리를 떠나버렸다. 그 뒤를 쫓던 선우의 시선이 다시 지호에게 향했다.
"서지호, 넌 뭐가 이렇게 빠르고 간단해. 아직 시작도 안 했어, 우리."
선우를 마주본 지호의 눈빛이 단단해졌다.
"아니. 나 그거 안 하고 싶어, 선우 씨."
"...뭐?"
"당신 하나 얻자고 내 인생, 시궁창으로 못 밀어 넣는다고. 그러니까 잘 됐어. 시작도 안 된 거, 정리하는 게 맞아."
지호의 어깨를 붙잡고 있던 선우의 두 팔이 툭- 떨어졌다. 그런 선우를 둔 채, 지호가 말했다.
“그거 알아? 어떤 상황에서는, 위선보다 위약이 더 나쁘다는 거.“
미련 한 톨 남지 않은 얼굴로 돌아서는 지호의 뒤에 대고 선우가 낮게 물었다.
"서지호, 나 사랑은 했냐."
사랑은 했냐고 물었다, 그를. 평소 같았으면 너무나 당연히 나왔어야 할, 아니 몇 시간 전만 해도 서로 주고받던 그 말이 나왔어야 했다. 자신과 선우는 그런 사이가 아니었나. 그러나 무의미했다. 사랑해도 어차피 함께 할 수 없으니까.
이렇게 깔끔하게 포기하는 게, 한번 싸워보지도 않고 내어주는 게 사랑이 맞냐고 누군가 물어온다면 지호는 주저앉고 대답할 것이다. 태선우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이 반복된다면 분명 찬란한 이 사랑도 빛바래고 희미해져 어느 틈엔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겠지. 내 부모처럼.
지호는 돌아선 채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제가 갈 길은 이미 정해졌다는 듯 꼿꼿하게 걸어서 방으로 들어가 조용히 문을 닫았다.
무오리로 내려가는 기차 안.
처음 선우의 집으로 갈 때처럼 지호의 짐은 단출했다. 짐 가방 하나에 책이 몇 권. 슥슥, 차창 너머로 뭉개지듯 지나는 풍경을 그저 눈으로 쫓는 지호. 그런데 이상하게 눈물은 나지 않았다. 어쩌면 선우와의 운명이 이렇게 되리란 걸 자신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사랑하는 남자의 그 흔한 친구도 한 번 만난 적 없다고 느꼈을 때, 서프라이즈로 병원 앞에 찾아간 날 자신을 보고 당황하는 선우를 봤을 때, 언뜻언뜻 비치는 그의 옆 얼굴에 그늘이 드리울 때.
예견된 미래를 바보처럼 애써 외면하고 바라보지 않은 것도, 그런 선우에게 '우리'가 돼주지 못하고 결국 혼자 모든 걸 해내라고 벼랑 끝으로 몰고 간 것도, 버림 받고 버려야 하는 선택 앞에 서고 싶지 않아 선우에게 결정을 미뤘던 것도, 모두 지호 자신은 아니었을까. 자신은 여전히 이렇게 도망치는 것 말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인가 싶어 자조 섞인 실소가 터져 나왔다.
그럼에도. 그 남자 태선우를 사랑했느냐고, 아니 여전히 사랑하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지호는 망설임 없이 이렇게 대답할 것이었다. 사랑, 한다고. 태선우를. 처음 누군가를 향해 가져본 간절함은, 사랑해서 떠난다는 거짓말 뒤에 숨겨 서서히 그 빛을 꺼뜨리는 거라고.
지호는 미련없이 서울을 떠나 다시 무오리로 돌아왔다. 서울에는 선우가 있었으니까. 발 들이면 안 되는 세계로 또 움직이면 안 되었기에. 지호는 반짝이는 도시에 등을 돌렸다.
몇 달 뒤. 매스컴에서는 연일 "태사랑 재단-'후계구도'에 박차 가하나"라는 속보가 흘러나왔다. 선우의 결혼 소식이었다.
결국 맞선녀랑 잘 된 건가? 나 같은 건 벌써 잊었구나. 하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돌아서는 자신을 붙잡을 명분 따위는 없겠지. 무오리로 내려온 뒤에도 선우에게서는 어떤 연락도 없었으니까.
"나쁜 놈! 잘 먹고 잘 살아라!! 메스 들고 살아서! 칼 같이 날카로운 놈아!!!"
첫차 안.
잔뜩 꼬부라진 혀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는 지호였다. 그녀가 하는 대로 무표정 하게 바라보던 이영이 말해다.
"미련이 많네. 이렇게 후회할 걸, 왜 놔 줘? 놔주길. 옆에 꼭 붙들어 두지."
술 기운 때문에 뜨끈하게 달아오른 두 눈을 들어 올린 지호가 이영을 쳐다봤다.
"싸장.. 나,는 내가 버,렸는데... 왜! 꼭 내가 다시 버,림 받은 거 같,아?"
"글쎄. 서지호라는 인물이 버리는 거에 익숙한 거 같지는 않은데."
"너무 정,확해서 재,수 없네. 사랑해서 떠,난다는 거짓말 같은 거... 안 들,어 봤어?"
"그러게. 그런 어록은 누가 만들었나 몰라."
"그거 다 뻥이다? 개뻥."
"개뻥이라고?"
"사랑하면 꼭 붙,어 있어야,지.. 왜 떠나! 어느 시덥,잖은 인간이 술,김에 뱉어낸...!! 개똥철학인 거지."
"개똥철학이건 뭐건. 지금 이러고 있는 것도 보고싶어 죽겠단잖아, 그 남자가."
보고 싶어 죽겠다는 말이었다. 지금 자신이 이렇게 흐트러진 게. 그 순간, 참았던 눈물이 차곡차곡 차올라 지호의 두 눈에서 쏟아져내렸다. 선우를 떠나고 단 한 번도 울지 않은 지호였다. 그래서였을까. 속에 쌓여만 있던 깊은 웅덩이가 더는 고여있지 못하고 터져버린 것 같았다.
보고 싶었다. 그 남자 태선우가. 죽을 만큼. 소리 없이 흐르는 눈물이 지호의 뺨 아래로 아롱져내리는 그 밤, 이영은 조용히 그녀의 눈물을 바라봐주었다.
"그냥 이럴 땐, 소리내서 우는 거야 지호 씨."
토닥토닥. 지호의 등을 가만가만 쓸어주는 이영은 그저 먼 데를 보며 무심하게 말했다.
"흐... 흐흐흑... 나 너무 미련하지. 나.. 너무 바보 같지. 나, 너무 답답하지..."
이영이 낮게 말했다.
"사랑은 그런 거더라. 미련하고, 바보 같고, 답답한 거."
그날부터였다. 지호의 방황이 시작된 것은.
주말에는 친구들과 어울려 시내 나이트에 간다. 평일 저녁에는 매일 소개팅 약속을 잡는다. 새로 생긴 헌팅 포장마차에서 간간히 생판 모르는 남자들과 어울려도 본다. 이런 세계가 존재한다는 걸 그 전에도 알았을까. 아마 태선우가 아니면 결코 몰랐겠지.
너 아니어도 잘 먹고 잘 살고 있다고, 이따위 말도 안 되는 쇼가 선우의 귀에 흘러가기를 미련하게도 기다렸던 건지.
지호는 매해 벚꽃이 가장 흐드러지게 핀 시기가 찾아오면 어기없이 아팠다. 그렇게 4년. 올해도 온 몸을 에워싸는 아픔에 몸살을 앓는 참이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태선우가 그녀의 앞에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