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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해주 Feb 08. 2024

#7. 느려도 괜찮으니까‥

-지호의 이야기 7

쿵쿵쿵쿠궁-

요란한 비트 소리에 맞춰 삼삼오오 몸을 흔드는 남녀가 뒤섞인 모습이다. 어두컴컴한 실내에는 화려한 조명들이 정신 없이 돌아가고 그 사이로 미친 사람처럼 몸을 흔들어대는 지호가 보인다. 스테이지 일각의 부스에 앉아 그 모습을 묘한 얼굴로 보고 있는 선우.

얼마 후. 블루스 타임을 알리는 느린 재즈풍의 노래가 흐르자 스테이지를 메우고 있던 인파가 썰물처럼 빠져 제 자리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 틈으로 지호의 모습을 더듬는 선우. 그런데, 어라? 지호가 스테이지 위에 그대로 남아 있다. 낯선 남자와 함께. 설마. 아닐 거다. 적어도 지금 자신이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일이 일어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서지호가 이런다고?  

그랬다. 지호는 웬 낯선 남자의 품에 폭 안겨 블루스를 추고 있다. 뿐인가. 누가 보면 세상 이런 다정한 연인이 따로 없다. 촉촉하게 젖은 눈망울로 상대를 보는 눈빛하며 수줍은듯 간간히 감쳐무는 입술까지. 지금 이 상황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이랬다.

아, 딱 돌겠네.

그러나 자신이 지호에게 한 짓을 생각하면 이건 개미 오줌에도 못 미친다.  

자신을 떠나던 날, 지호가 했던 말이 그러했으므로.


“그거 알아? 어떤 상황에서는, 위선보다 위약이 더 나쁘다는 거.“


차라리 아픈 너를 안아주는 척, 돌아보는 척이라도 했다면. 좀 덜 나쁜 놈이 됐을까. 세상 좋은 말은 다 갖다 붙여 지켜줄 것처럼 굴다가, 아무것도 해보지 않은 채 제 손으로 결국 부숴버린, 자신은 이런 등신천지가 아니었던가. 김빠진 탄산수처럼 자조 섞인 웃음이 픽 하고 터져나왔다. 그래놓고 서지호의 이런 방황 따위에 뭐? 딱 돌아? 세상 이렇게 후진 놈이 또 있을까 싶은 거다.

테이블에 턱을 괸 선우가 스테이지를 가만히 본다. 낯선 남자와 블루스를 추는 지호가 어느 순간 나비처럼 날아올라 사라없어져 버릴 것만 같아 자꾸만 바싹바싹 심장이 타들어간다. 닿을 듯 닿지 않는 곳에, 끝끝내 달아날 것만 같아 애먼 손끝이 시려온다.

서지호를 다시 제 품에 둬야겠다.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게. 설사 그 과정에서 부서지고 깨지고 망가지더라도. 어차피 지금의 자신이나 서지호나. 더 고장날 것도 없었으니까.

서지호를, 다시 돌려놔야겠다. 원래의 모습으로.

포장마차 안.

훤하게 탁 틔인 중앙 원탁 테이블에 홀로 앉아 제 잔에 쪼르륵 소주를 따르는 지호.


“나 한 잔~ 그리고..”


지호가 맞은 편 빈 소주잔에 술을 따른다.


“너도 한 자-안”


제 앞에 놓인 소주 잔을 들고 주인 없이 빈 자리에 놓인 잔에 “차앙” 부딪힌다. 그리고 곧바로 술을 털어넣는 지호. 으으.. 살짝 부르르 몸을 떤 지호가 테이블 위에 있는 오이를 -썰어둔 지 좀 됐는지 표면이 말라 있다- 집어 먹는다.

지호의 옆 테이블에 앉은 선우가 조금 전 그녀가 했던 행동을 그대로 재연한다. 제 앞에 놓인 잔에 소주를 따르고 반대에 있는 빈 잔에 다시 쪼르륵. 그리고 짠. 지호가 그랬던 것처럼 한 입에 소주를 털어 넣는다. 선우의 테이블에 놓인 안주들은 모두 손 댄 흔적 없이 나온 상태 그대로였다.

그 채로 지호가 술을 따르면 선우도 따르고, 지호가 마시면 선우도 마신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건데. 이제 그만 좀 가시지.“


지호가 반대 편에 놓인 잔을 보며 말했다. 그녀의 말에 선우가 화답하듯 자신 앞에 놓인 잔을 보며,


“신경 쓰이면 오던가.“


무감한 눈으로 잔을 들고 마시는 선우. 각자 다른 사람에게 하는 말처럼 들리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건네는 언어였다. 꽤 그리웠다는 듯. 네가 나에게로 오기만을, 그렇게 오랜 시간 기다렸다는 듯.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여기 계산 좀 해주세요.”


동공이 살짝 풀린 지호가 어기적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를 따라 슬며시 몸을 일으키는 선우.

포장마차를 나온 후 걷기 시작한 두 사람. 지호가 앞서 걷고 열 걸음쯤 뒤에서 선우가 따라 걷고 있다. 지호가 왼발을 떼면 선우도 왼발, 그녀가 오른발을 떼면 그도 오른발. 길게 늘여진 지호의 그림자를 따라 걸으며 그 뒷모습에 시선을 맞추는 선우. 두 사람 머리 위로 쏟아지는 가로등 불빛이 가만가만 따라 흐르고 있다.

그런 채로 10여 분쯤 걸었을까. 지호가 웬 가게 앞에 우뚝 멈춰 선다. 시선을 따라가 보니 <첫차>라는 간판이 보였다. 여긴 또 어디란 말인가. 집에 가는 줄 알았더니 아닌 모양이다. 설마, 저런 상태로 술을 더 마시겠다는 건.. 맞구나. 그녀가 휘적이는 모양새로 가게 앞 쪽으로 걷고 있었다.

선우가 그녀를 따라 막 걸음을 뗄 찰나, 지호가 돌연 선우 쪽으로 훽 몸을 틀었다


"오지마! 오지 말라고! 가! 이 말미잘 같은 놈아! 제발 좀, 내 눈앞에서 꺼지라고!!"


지호의 악다구니에 어깨를 한 번 으쓱하더니 능청스레 응수하는 선우였다.


"괜한 말미잘 욕 하지 마시고."

"예전에 태선우가 알던 서지호 아니야. 완전 타락했어. 아니 죽었어!! 그러니까 가!!"

"안 가."


망설임 없는 선우의 대꾸에 지호가 체념하듯 말했다.


"마음대로 해. 길거리에서 얼어 죽던지 말던지."


그러더니 첫차 안으로 쏙 들어가버리는 지호. 홀로 덩그러니 남은 선우가 허탈하게 웃다가 허공에 옅은 숨을 흘린다. 재킷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하니 새벽 2시다.

서지호, 너 나 없는 시간을 매일 이렇게 살았던 거구나.

지호가 사라진, 첫차의 출입문을 바라보는 선우의 눈빛이 깊어졌다.

“싸자앙-----”


지호가 둘둘 말린 혀를 가까스로 펴 이영을 불렀다. 주방에서 다 된 두부조림을 반찬통에 담고 된장국에 막 봄동을 넣던 이영이 슬쩍 보면, 지호는 이미 바에 엎어져 있다.


“얼음물 주까?“


지호가 엎드린 채로 대꾸했다.


“아니. 술, 줘. 쎈 걸루다가.”

“까먹진 않았겠지. 우리 집은 취객 금지야. 취한 사람한테는 술 안 팔아.”

“치-사하게.”


이영이 피식 웃는다. 천천히 몸 일으키는 지호. 주방 쪽에 대고 킁킁 냄새 맡는다.


“냄새 너무 좋다. 뭐 만들어?”

“밥 주까? 두부조림이랑 봄동이 좋아서 된장국 끓였는데.“

“응. 아, 아니.”

“달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그저 이영을 빤히 쳐다보는 지호. 부탁하기 애매하거나 혹은 할 말은 있는데 꺼내기가 쉽지 않을 때 나오는 지호의 습관이었다. 이영이 차분하게 물었다.


“왜. 뭔데.”

“그게, 음...”


다시 입을 다무는 지호. 이영은 된장국을 국자로 한번 휘 저은 다음 내려놓고 그녀 앞으로 다가가 기다렸다. 다음 말이 나올 때까지.


“싸장. 가게 앞에, 잠깐 나가봐 줄 수 있어?”


불안하게 떨리는 지호의 눈동자를 보며 이영이 물었다.


“누가 있어?”


대답 대신 그저 이영의 눈을 빤히 바라보는 지호. 이영은 슬쩍 고개를 틀어 벽시계를 본다. 새벽 2시 10분을 넘어가고 있었다. 이 시간에 지호를 찾아온 사람이라면.


“그 남자 있는지만 봐주면 되는 거야?“


지호가 보일듯 말듯 가녀린 고갯짓으로 끄덕인다.


“알았어.”


이영이 천천히 첫차의 출입문 쪽으로 다가선다. 그리고 출입문 손잡이를 잡고 문을 당길 때였다. 촤르릉- 드림캐쳐의 맑은 울림이 첫차에 퍼졌다. 살짝 놀란 얼굴로 앞을 보는 이영. 훤칠한 키에 서글한 눈매가 인상적인 웬 남자가 떡하니 서 있었다. 이영은 놀랐던 표정을 지우고,


“어서오세요.”


하며 그에게서 한 발자국 걸음을 물렸다.


“편한 자리, 아무 데나 앉으세요.”

“네, 고맙습니다”


남자의 말은 정중한 어투였지만 언뜻 들으면 감정이 없는 문자의 나열이었다. 그의 눈은 줄곧 이영의 등 뒤에 있는 지호를 향해 있었으므로. 이 남자구나. 이영은 지호의 ‘그 사람’을 곧 알아 보았다.

올곧게 걸어가 지호의 옆자리에 앉는 선우. 지호가 동그랗게 눈을 뜬 채로 선우를 바라봤다. 가라고 윽박질러도 안 간다고 했는데. 한참을 안 들어 오기에 그냥 가버린 건지. 벚꽃의 계절이긴 해도 아직은 차가운 새벽 바람인데. 이슬을 맞으며 자신이 나갈 때까지 밖에서 있겠단 건지. 그렇다고 스스로가 확인하기에는 내키지 않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이영에게 그의 동태를 알고자 했던 거다. 그런데 너무 뻔한 걱정이었는지, 선우는 지금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제 앞에 앉아 있다. 잠시나마 고민했던 것들이 무색할 정도로.


"난 네가 무서워... 무섭다고."

"도대체 뭐가 그렇게 무서운데. 내가 너무 못미더운 놈이라서?"


눈물이 그렁해진 눈으로 선우를 응시하는 지호.


"아니. 뭘 어떻게 해도 결국 난, 너를 버려야 하는 위치에 서 있게 될 테니까."


선우의 동공이 커졌다. 그러다 이내 옅은 한숨을 내쉬며 그가 말했다.  


"내가 널 버려야 하는 선택만 아니라면, 수만 번 네가 날 버린다고 해도 상관 없어."

"넌 진짜 이기적인 새끼야."

"뭐?"

"결국 지 마음만 편하면 장땡이지."


잠시 멈칫하던 선우가 한 손을 이마에 얹더니 갑자기 박장대소를 하기 시작했다. 주체가 안 되는지 끅끅 소리까지 내며 웃는다. 눈가에 눈물까지 맺혀가며. 그 모습을 잠자코 바라보는 지호. 선우가 얄미워죽겠다는 듯 노려본다. 뭐가 이렇게 우스워? 했다가. 선우가 정말 미쳐버리기라도 한 건지. 하긴 저나 선우나 미치기 직전이거나 이미 돌아버린 게 맞긴 하겠지만.

잠시 후 웃음이 멈춘 선우가 눈가에 맺힌 눈물방울을 손가락으로 꾸욱 찍어내며 말했다.


"그러는 서지호는 진짜 못돼 처먹은 기지배지."

"…뭐? 못돼 처‥ (하? 하하...)"


선우의 입에서 나온 거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언어에 말문이 막히는 지호. 자신이 알던 그 남자가 아닌 것만 같다. 태선우가 이런 저급한 말도 할 줄 아는 인물이었던가. 멍한 얼굴을 한 그녀에게 선우가 다시 덤덤하게 말했다. 꼭 남의 말을 하는 것처럼.


"서지호는 자기 감정을 끝까지 책임지기 싫으니까 버리는 선택만 하는 거잖아. 그래서 끝까지는 안 가는 거야. 버리는 게 편하니까. 죽더라도 끝을 보는 일은 괴로우니까. 서지호의 사랑은 비겁해."

"그래서 그게 뭐. 나빠?"

"어. 나빠."


지호의 대답에 선우가 옅게 웃음 짓는다. 내심 안도했으니까. 어쩌면 지호도 자신과 다르지 않는 위약자라는 사실에.


"재수 없어. 꼴도 보기 싫어! 태선우!!!"


지호가 얼굴을 가차없이 돌리는 그때, 선우가 그녀의 턱을 그러쥐고 훽 틀어서 자신을 보게 했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지호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이런 거친 행동도 서슴없이 할 줄 알았던가? 모든 행동이 소프트 콘 아이스크림처럼 부드럽기 그지 없던 그였다. 허공에서 겉돌던 그녀의 눈동자에 선우가 깊게 시선을 맞췄다.


"앞으로는 꼴 보기 싫어도 봐. 재수 없어도 피하지마. 느려도 괜찮으니까‥ 도망가지만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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