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이상형이 뭐예요?

- 은강과 희락, 그리고 차희의 이야기 5

by 장해주
다정했던 사람이여 나를 잊었나
벌써 나를 잊어 버렸나
그리움만 남겨놓고 나를 잊었나
벌써 나를 잊어버렸나
- 노영심 <그리움만 쌓이네>


낡은 카세트 안에서 감미로운 여가수의 음색이 강과 희락, 그리고 차희 주변을 부드럽게 휘감았다.

순간, 희락을 내려다보는 강의 동공이 세차게 흔들렸다. 엄마라니. 아이는 실수로라도 절대 ‘엄마’라는 이름을 입에 담지 않았다. 그것이 마치 금기어라도 되는 듯. 입 밖으로 꺼내고 나면 금세 부서지고 흩어져버리는 언어라 아깝기라도 하듯이. 희락에게 ‘엄마’라는 단어는 그런 것이었다.

엄마, 이것을 꺼내놓는 것조차 아쉽고 아까워서, 제 작은 품에 가둬두는 게 최선인 그런 것.

강은 큰 키를 천천히 구부려 딸 아이를 가만히 품에 안았다. 아이의 작은 심장이 뛰는 게 느껴졌다. 여리고 따뜻했다.

제 엄마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마음이, 희락에게는 있었나 보다. 짙은 그리움으로. 이 작은 가슴이 얼굴도 모르는 상대에 대한 그리움을 차곡차곡 쌓아놓기만 하다가. 종내에는 터져버린 것이다.

강은 희락을 안은 채 눈을 꼬옥 감았다. 안도하는 마음으로. 다행이었다. 아이의 마음이 고장 난 게 아니어서. 제 기능을 해주고 있어서. 그리움이라는 예쁜 마음을 담을 줄 아는 사람으로 자라주고 있어서.

아이는 마치 그 마음을 알기라도 하듯 고사리 같은 손으로 도닥도닥 제 아빠의 등을 두들겼다. 괜찮다고. 괜찮아. 그러니까 우린 또 괜찮을 거야. 인사를 건네듯.

차희는 아이를 품에 안고 있는 강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제 아빠의 품에 안겨 말갛게 웃고 있는 아이가 보였다. 그 모습이 하도 애틋하고 다정해 보여서. 차희는 눈물이 터질 것만 같았다.

엄마. 분명 엄마라고 했다. 차희는 희락이 뱉은 엄마라는 두 음절을 입 안에서 천천히 굴려보았다.

엄마. 두 글자가 차희의 입 안에서 부드럽게 부서졌다.

강의 품에 안겨 있던 희락이 바르작댔다.


“숨 막혀 아빠아...”


강이 천천히 아이를 놓아주고 마주 봤다.


“아빠~ 이렇게 희락이만 좋아하면 어떻게 해. 진짜 장가 못 가아~~”


강은 딸 아이의 말에 옅게 풉- 하고 웃음이 터졌다. 도대체 이런 말을 어디에서 알아 오는 걸까? 누가 나서서 가르쳐주는 것도 아닌데. 강의 눈빛이 짓궂게 바뀌었다.


“아빠는 우리 희락이만 있으면 되는데.”


아이의 눈이 순간 시무룩하게 가라앉는가 싶더니 다시 초롱초롱하게 빛을 발했다. 그리고는 제 아빠의 귓가에 무언가 속삭였다. 가만히 딸의 목소리를 듣던 강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졌다.


“...뭐?”


희락의 표정이 개구지게 변했다.


“이모 이상형은 뭐예요?”

아이의 말에, 조금 전까지 촉촉이 차희의 눈가를 적시던 물기가 빠르게 말라버렸다.

“이상..형?”


강이 재빨리 희락을 저지하려고 했으나,


“희ㄹ.....”


“네. 우리 아빠 진짜 멋있지 않아요?”


이미 늦었다. 제 아빠의 소개를 마친 아이는 차희를 보며 해죽 웃었다.

“응. 너네 아빠 멋있어.”


“이모오~ 우리 아빠 좋아해요?”


제 아빠를 좋아하냐는 질문을 제법 수줍게 하는 아이를 보며, 차희는 당황했던 기색이 사라졌다.


“희락이 눈에는 어떻게 보이는데?”


“음...”


잠시 골똘히 생각하던 희락의 얼굴에 해사한 웃음이 번졌다. 꼭 제 아빠를 닮은.

순간, 툭 떨어져 있는 그녀의 손에 작고 따뜻하고 말캉한 무언가가 감겼다. 천천히 시선을 옮긴 곳에,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희락의 환한 얼굴이 있었다. 슴벅슴벅. 무슨 상황인지 몰라 두 눈만 끔뻑이던 차희.

희락은 쥐고 있는 차희의 손을 조금 더 꼬옥 감아쥐며 말했다. 목소리에는 진심을 담아서. 동그란 눈은 조금 더 귀엽게 치뜨며.


“난 이모가 우리 아빠를 아주아주 마~~아니 좋아했으면 좋겠다.”


그런 딸을 보며 강은 할 말을 잃은 얼굴이었다. 제 딸이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다니. 희락에게 이런 능력(?)이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제 아빠가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건, 아이는 지금 기회를 놓칠세라 빠르게 어필 작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모. 우리 아빠가 좀 쌀쌀맞게 보이지만 속이 꽉 찬 남자에요. 요리도 잘하구요. 공부도 잘하구, 일도 잘해요. 그리구 음.. 맞다! 아빠 품이 진짜 따뜻해요. 가끔 무서운 꿈을 꾸거나 천둥 번개가 치면 아빠 방에 가서 자는데, 그때마다 아빠가 안아주면 잠을 잘 자요.”


귀로는 들려오는 아이의 말소리에, 시선은 잡힌 손에 머물러 있는 차희.

“응. 이모는 품이 따뜻한 남자가 이상형이야.”

두 사람의 모습에 강의 눈이 다시금 아연하게 물들었다. 여기서 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미쳤을 때였다.

“근데 희락아. 아까 아빠한테 뭐라고 귓속말 한 거야? 이모 되게 궁금한데.”


“아~ 그거요?”


큭큭. 아이가 귀엽게 키득대더니 입을 열었다.


“왠지 이모가요~ 희락이 엄ㅁ.....”


“은희락!”


강이 재빨리 희락의 뒷말을 막았다. 그러나. 이번에도 늦은 것 같다. 아이의 끊어진 뒷말을 이은 맑은 목소리가 그의 귓전에 울렸다.


“희락이는 이상형이 뭐야? 엄마 이상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