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나무에게 말을 거는 남자

by 강 산

그날 이후, 이연은 책장을 넘기기 전에 먼저 주변을 살피는 버릇이 생겼다.

누가 있는지, 누가 없는지, 말하는 사람이 있는지, 듣고 있는 나무는 그대로인지.


책 속의 문장을 확인하기 전, 그녀는 그 남자를 찾았다.

도시락을 꺼내는 손동작, 혼잣말을 내뱉는 입술, 나무껍질을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리는 버릇.

하나하나가 책 속 묘사와 겹쳤다.


“오늘은 구름이 좀 끼었네요.”


그의 말이 책 속 다음 장과 일치할 때, 이연은 더 이상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말이 글이 되는 건가.

아니면 글이 먼저, 말이 나중인가.


어느 쪽이든, 이상한 일임에는 분명했다.


하지만 이상하다는 건, 곧 궁금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연은 서울숲을 찾는 이유가 점점 ‘산책’이나 ‘점심’보다는

‘그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는 걸 자각하고 있었다.


그는 항상 같은 시간에 나타났다.

열두 시 반쯤.

구김 없는 셔츠에 밝은색 바지를 입고, 검은 슬리퍼를 질질 끌며 등장했다.

어디선가 싸 온 듯한 도시락을 열고, 말없이 나무 앞에 앉았다.


처음엔 혼잣말처럼 보였지만,

자세히 보면 그의 말은 언제나 느티나무를 향해 있었다.


“오늘도 잘 있었어요?”
“전 오늘 회사에 늦잠 잤어요. 조금 혼났죠.”
“근데요… 어제 그 꿈을 또 꿨어요. 진짜 이상하죠?”


누구에게도 하지 못할 말들을, 그는 매일 나무에게 전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신기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이연은 그 말들을 ‘듣고 있는’ 사람이 자신뿐이라는 사실에

묘한 책임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의 말에 가끔 웃고, 고개를 끄덕이고,

마치 책장을 넘기듯 하루하루를 함께 읽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며칠 뒤,

이연은 처음으로 책보다 먼저 남자의 말이 앞서간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날은 유난히 더웠다.

서울숲의 나무들도 지친 듯 보였고, 벤치마다 앉아 있던 사람들은 하나둘 그늘을 찾아 흩어졌다.


그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땀이 흘러내리는 것도 신경 쓰지 않은 채, 그 느티나무 앞에.


“있잖아요, 오늘은 아무 말도 하기 싫어요. 그냥, 여기 있고만 싶어요.”


이연은 책장을 넘기지 않았다.

넘기지 않아도, 그날의 문장은 이미 눈앞에 있었다.


“오늘은 아무 말도 하기 싫어요.”


그 문장은 책 속 다음 장에 들어 있어야 할 것이었다.

하지만 아직 확인하지 않았음에도, 그녀는 그 문장을 이미 들었다.


이연은 조심스레 책을 펼쳤다.

그리고 예상대로, 거기 적혀 있었다.


오늘은 아무 말도 하기 싫어요. 그냥, 여기에 있고만 싶어요.


그제서야 이연은 깨달았다.


이 책은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함께 살아가는 어떤 사람의 마음이었다.

그리고 그 마음은 매일 한 장씩, 나무에게, 그리고 자신에게도 도착하고 있었다.

그날 이후, 이연은 책장을 넘기기 전 항상 생각했다.


‘오늘 그는 어떤 말을 할까?’


그리고 책을 읽는다는 건,

누군가를 매일 조금씩 이해한다는 일이라는 걸

처음으로 배워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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