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절약과 저축이 미덕인 가정에서 자랐다. 재물을 아끼고 모으는 것은 근면하고성실한 삶의 태도이자 목적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개발도상국의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은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의 꼬리라도 되고 싶은 마음으로 자라났다. 돈을 소비하는 것이 아닌 아닌 저축이 미덕인 집에서 자라고 그런 시대를 살았다는 것은 나 또한 저축, 다시 말해 축적을 미덕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다. 그런데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문학자인 조르주 바타유는 이해하기 어려운 주장을 한다. 에너지를 생산하고 축적하기만 하면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저축이라는 아름다운 미덕이 어떻게 문제를 야기한단 말일까? 돈을 많이 축적하는 것이 왜 문제가 된다는 것일까?
만약 그 체계가 더 이상 성장할 수 없게 된다면, 또한 그 초과분이 그 체계의 성장에 완전히 흡수될 수 없다면, 초과 에너지는 기꺼이든 마지못해서든 또는 영광스럽게 재앙을 부르면서 든 간에, 반드시 대가 없이 상실되고 소모되어야만 한다.
바타유의 논의에 따르면 에너지의 근본은 태양 에너지이므로 생산을 하기 위한 근본 에너지는 무제한으로 제공된다. 태양에너지의 공급이 끊어지지 않는 한에는 지구에의 생명은 무한히 생산되며 이것은 개체의 보존과 유지에 도움이 된다. 그러나 그 이상의 생산분 즉 과잉 에너지가 만들어질 경우 지구체계는 이것을 감당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이러한 과잉 에너지를 소모하기 위해 인류는 여러 장치를 고안해 낸다. 종교예식, 예술, 축제, 섹스와 같은 것을 통해 과잉된 에너지를 모소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적절히 소모되지 않는다면 극단적으로는 1,2차 세계대전과 같은 비극적 전쟁을 야기시킬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돈에 대한 맹신 때문인지 경제적 과잉으로 인한 파국을 선뜻 이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인간의 성장에 대한 비유에서는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성장기의 아이들에게도 과잉 에너지에 대한 문제는 적용된다. 성장기 아이들은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섭취한 에너지는 성장에 사용된다. 그러나 성장이 멈춘 성인기에 성장기와 비슷한 양의 음식을 먹으며 그것은 몸에 그대로 축적이 된다. 비만이 되어 건강을 해치게 된다. 이런 과잉 에너지를 소모시키기 위해 부적절한 행동을 한다. 예민해거나 우울해지기도 하며 폭력적으로 행동하기도 한다.
육체적 성장에 필요한 에너지뿐 이나라 정신의 에너지가 제대로 처리되지 않으면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를 많이 만나 보았다. 사회적으로 통제된 환경 속에서 자기 에너지를 발산할 수 없으면 공격적인 행동을 보이거나 위축되고 우울해진다. 우울한 사람은 에너지가 없는 것 같지만 우울과 무기력 또한 상당한 에너지가 내재되어 있다. 자신의 생체 에너지를 제대로 소모시키지 못한다면 정서적 문제를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심리적 에너지는 욕구일 것이다. 자신의 원하는 것, 자신의 생명이 이끄는 바 대로 살지 못하는 일들이 반복되다 보면 타인을 파괴하거나 자신을 파괴하는 행동을 만들어 낸다.
과잉된 에너지(돈)는 소모시켜야 한다?
성장에 필요한 것 이상의 과잉된 에너지의 초과분은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바타유는 초과된 에너지를 소모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때 소모는 비 생산적 소모이다. 소모를 통해 무언가를 얻거나 취하거나 다른 결과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생산을 목적으로 하거나 소비가 되지 않는, 교환의 형식이 아니라 비 생산적인 소비, 소비 자체를 위한 소비여야 한다.
넘치는 에너지를 소모하는 것과 그것을 이용하는 것은 다른 일이다. 완벽하고 순수한 상실, 피를 흘려보내는 일은 필연적으로 발생하며 애초부터 성장에 사용될 수 없는 초과에너지는 파멸될 수밖에 없다. 이 피할 수 없는 파멸은 어떤 명목으로든 유용한 것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이제 불유쾌한 파멸보다는 바람직한 파멸, 유쾌한 파멸이 중요해질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분명하게 다를 것이다.
파멸 자체를 위한 파멸이다. 이 파멸은 어떤 명목으로든 유용한 것이 될 수 없다. 그 파멸은 에너지를 소모하여 유용성을 갖는 것이 아니다. 무언가 주어서 내게 돌아올 것을 기대하거나, 무언가를 주어 내 소유로 하는 것이 아니다. 기브 앤 테이크 같은 교환의 개념도 아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와 비슷하다. 내 것을 주었다는 생각조차 잊는 것이다. 내가 준 것을 상대가 알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것이다. 생색낼 일도 서운해할 일도 없다. 이것이 불교의 무주상보시이며 바타유가 말한 유쾌한 파멸이다. 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
빈센트 반고흐 <비 내리는 밀밭>, 73.5x92.5 cm, 캔버스에 오일, 필라델피아 미술관
돈을 벌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
딸이 예고에 가고 싶다고 했다. 입시상담도 받아보고 예술 관련 업에 종사하는 지인들을 통해 들은 조언을 종합한 결과 미대 진학을 위해 예고를 거칠 필요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러나 딸은 계속 미련을 가졌다. 내가 딸의 예고진학을 만류하는 이유가 혹시 돈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학비와 과외비는 어떻게 충당한다 쳐도 좀 산다는 집안 사이의 경쟁에서 딸이 주눅 들지나 않을까. 그런 딸의 모습을 보며 내가 초라해지지 않을까라는 걱정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만일 내가 돈이 많은 부모라면 아이의 선택에서 이렇게 저렇게 재는 말을 늘어놓게 될까라는 생각이 들어 부끄러워졌다. 혹시라도 아이의 진로에 돈이 변수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이제는 돈을 벌어야 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례비를 더 많은 받을 수 있는 곳으로 직장을 옮겼다. 돈을 더 벌게 되니 좋았다. 돈을 더 벌게 되는 쓰는 것이 한결 편해졌다. 돈을 소비하는 것에 대한 대한 죄책감이 준 것이다. 돈을 버는 만큼 씀씀이가 편했던 것은 아니다. 10년 전 월급쟁이 생활을 할 때는 지금보다 몇 배의 돈을 벌었지만 돈을 쓰는 게 늘 무서웠다. 저축도 해야 하고 대출금도 값아야 해서 돈을 벌어도 미래에 저당 잡힌 빚쟁이가 된 기분이었다. 벌어도 내 돈이 아닌 것 같아서 월급날이 되면 더 허탈했다.
월급쟁이 생활을 청산하면서 가정주부가 된 후에도 돈을 쓰는 일은 늘 마음을 괴롭게 했다. 회사를 나오면서 몇 년간 육아와 아버지 간병에 전념할 것이라고 각오했고휴직의 기간 동안에 쓸 만큼의 비상금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 비상금으로 생활을 했기에 늘 죄를 짓는 기분이었다. 무엇에 대한 죄인지도 모른 채 왠지 비상금에 손을 대는 한심한 인간, 미래를 준비하지 않는 개념 없는 인간이라는 자책에 시달렸다. 비상금은 왠지 비상시, 이를테면 사고나 큰 일을 계획할 때 써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생활비로 비상금을 쓰는 것이 불편했다. 나는 돈을 축적해야 한다는 오랜 습관에 길들여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돈에 대한 오랜 습관이 있다.
나는 가난을 걱정하지 않는 집에서 자랐다. 내가 국민학교에 다니던 80년대만 하도 단칸방에서 사는 친구들이 많았다. 친구들은 서너 평 되는 방 하나와 부엌이 딸린 집에서 네다섯명의 식구가 함께 사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주인집 딸이었고 엄마가 재테크를 잘한 덕분에 2층 양옥집에서 살았다. 단칸방에 사는 친구들은 우리 집에 오면 너네 집 부자냐고 물곤 했다. 당시에는 전화기와 칼라 TV가 없는 집도 있었다. 반면 우리 집에는 식탁을 놓을 수 있는 주방, 심지어 피아노까지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늘 돈에 대한 결핍이 있었다. 엄마는 구두쇠였다. 엄마는 입던 빤스도 돌여 입는다는 신공술을 부리셨다. 휴지도 4칸 이상 쓰는 것은 범죄였다. 그 당시에는 그렇게 사는 분들이 많아서 크게 이상할 것도 없지만 이렇게 껍데기가 좋은 집에서 지나치게 절약을 하는 것이 싫었다. 아버지는 그런 엄마를 보며 늘 궁상맞다고 놀리셨다. 엄마는 자식들에게 돈 쓰는 것도 인색했다. 엄마에게는 교육비를 제외하고는 모두 사치였고 늘 돈 걱정에 시달렸다. 우리 집은 동네에서 제법 번듯한 규모였지만 나는 늘 가난했다. 엄마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돈은 더러운 것”이라고 했다. 돈을 주는 사람과 돈을 받는 사람의 마음이 달라 갈등했던 적이 있으시다고 했다. 아마도 아버지는 마음만큼 돈을 선물하고, 그 돈을 통해 마음이 전달되기 바라는 그런 분이셨다 것 같다. 돈이 사람의 마음을 어지럽히던 일도 많이 보고 겪고 경험하셨다고 했다. 아버지는 돈에 대해 깔끔한 분이셨다. 자신의 몫 이상의 돈을 받지 않았고 줄 돈이 있으면 지체하지 않았다. 유혹받았던 적도 많았지만 아버지는 그런 청렴함 혹은 결백함을 지키기 위해 부단히 애쓰면서 사셨다는 것을 안다.
나는 그런 부모의 모습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나는 돈을 움켜쥐려고 하면서도 돈을 속되게 생각한다. 돈으로는 사랑을 표현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돈이 아닌 다른 것이 더 큰 마음이라는 생각을 가져왔다. 나는 돈 대신 내 몸과 마음으로 할 수 있는 사랑을 표현하려고 했다. 그 사람이 필요한 것을 대신해 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부모님께도 돈으로 사랑을 표현하지 않았다. 필요한 것을 고민해서 사드리거나 내 노동력과 시간을 드렸다. 연로하신 부모님에게는 돈보다도 내 보살핌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는 돈 때문에 힘들어 본 경험이 별로 없어서이다. 나는 돈이 없어서 고생한 적이 별로 없다. 돈이 부족할 때가 있기는 했지만 가난에 대한 상처는 없다. 그리고 돈을 벌고 싶다면 벌 수 있는 젊음과 능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부모라는 뒷배가 있으므로 가난이 무섭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돈에 대한 감수성이 매우 부족하다. 누군가에게 돈을 줄 때도 돈을 받을 때도 어색하고 투박하다. 그리고 돈으로 사랑을 표현할 수 있다는 생각에 쉽게 동의하지 못했다.
빈센트 반고흐 <종달새가 나는 밀밭>, 1887, 캔버스에 오일
돈에 대한 새로운 기억이 생겼다.
나이가 들 수록 미래에 대한 두려움, 가난에 대한 두려움이 생긴다. 내 것이 준다는 두려움이다. 이 두려움은 돈을 다시 채울 수 없다는 생각에 심화된다. 그러니 내 것을 지키고 싶고 빠져나가지 않도록 움켜쥐려고 했다. 돈뿐만이아니다. 돈도 사랑도 체력도 양껏 쓸 수 없었다. 두려웠다. 그것들은 쓰고 나면 사라지고 나는 비워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나를 다시 채울 수 있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최근에 아이의 진학 문제로 적극적으로 돈벌이를 하게 되었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 생계를 위해 번다는 생각으로 임하기 시작하자 이전과는 다른 감성을 느끼게 되었다. 지금 돈을 버는 과정은 이전에 직장생활처럼 착취당했다는 느낌이 들거나 소진된다는 느낌이 없다. 내가 번 돈이 소중한 이를 위해 쓰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회 초년생 때 돈을 벌 때는 내가 무엇을 위해 벌어야 하는지, 얼마가 필요한지도 모른 채 불안에 떠밀려 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내 노동으로 번 돈으로 사랑하는 이들에게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해줄 수 있다는 기쁨이 있다. 돈을 버는 괴로움은 여전히 있지만 기쁨은 그 괴로움을 견디게 한다.
그리고 이전처럼 나를 소진의 상태로 몰고 가지 않는다. 지금은 일하려면 체력을 어떻게 비축해야 하는지 안다. 하루 8시간 동안 상담하고 나서도 지치지 않도록 몸을 관리한다. 에너지를 다 쓴 후에는 잘 먹고 운동하며 체력을 관리한다. 힘을 쓰고 나면 먹고 운동하고 좋은 것을 보고 들으며 다시 충전을 한다. 그 괴정은 돈을 쓰고 다시 버는 과정과도 같다. 내가 경제의 순환 속에 있다는 것을, 삶의 순환 속에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경험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돈을 쓰는 두려움이 줄게 되었다. 소모되더라도 다시 생성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사랑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사랑할 때 상대가 원하는 것을 해주기 위해서는 마음도, 돈도, 체력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이 과정이 내가 완전히 해체된다고 생각하면 내가 파멸되는 길을 택하기 어렵다. 악착같이 나를 지지키고 싶어질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 무언가를 사랑했을 때 내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믿음, 나의 파멸은 또 다른 생성을 가능케 하리라는 믿음, 그 무모한 믿음이 나를 유쾌한 파멸에까지 이르게 할 수 있지 않을까?
파멸(소모)의 가능성, 한계 없는 자유
제한 없는 소모는 다른 사람들에게 나의 내밀한 부분을 드러내 보여준다. 그래서 소모는 고립된 존재들을 소통하게 해주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격렬하게 소모하는 사람들끼리는 모든 것이 투명하고, 모든 것이 열려 있고, 그리고 모든 것이 가능하다. 열광이 커짐에 따라 이제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폭력은 끝도 없는 자유를 얻는다.
이전에 돈을 벌고 쓸 때는 소비의 개념이었다. 필요한 것과 교환하는 유용한 일이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내 것을 준만큼 받고 싶었고 그만큼이 돌아오지 않으면 서운해했다 그리고 준만큼 받을 수 있는 안전한 관계에서만 내 몫을 나눴다. 이것 역시 교환이다. 유용한 것을 얻기 위한 거래이다.
나는 가진 게 많다. 돈이 아니더라도 지식과 경험, 시간, 호기심, 다정함 등이 있다. 나는 그것들을 쓰는데 인색했다. 안전한 관계에서, 내게 유익함을 돌려줄 것이라고 확인된 관계에서만 가능했다. 그랬기에 한계 밖으로 벗어나지 못했다.
바타유가 예를 들었던 종교적 제의에서 처럼, 과잉된 에너지의 소모만이 신에게 합당한 대접을 받은 것처럼, 인간은 소모를 한 대가를 통해서 타락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바타유는 이를 "격렬하게 소모하는 사람들끼리는 모든 것이 투명하고 모든 것이 열려있고 그리고 모든 것이 가능하다."라고 했다.황홀한 문장이다.
나는 아직 바타유의 경제이론을 논리적으로는 이해하지 못했다. 사실 이해하기가 겁이날 정도다. 하지만 소유와 교환을 넘어선 경제개념이 있다는 것은 감성적으로 조금은 알 것 같다. 애초에 내가 무엇을 해서, 무엇을 잘해서 받게 되는 대가가가 아니었듯이 나는 아무런 이유 없이 그저 존재하는 것 만으로 많은 것을 받았다. 태양이 우리에게 에너지를 무조건적으로 증여하고 것처럼 말이다.
돌려주지 못한 사랑이 있다. 고맙고 미안하다. 내가 받은 사랑이 나를 위해 과잉되지 않도록, 그 과잉이 다른 파국을 만들지 않도록 부지런히 소진시키면 살고 싶다. 돈도 사랑도 체력도 모두 소진하는 삶을 살고 싶다. 파멸과 생성의 과정은 마치 피가도는 과정과도 같다. 태양 에너지가 대지를 비추고 대지의 생명은 꿈틀거린다. 생동하는 삶이란 움켜쥐는 것이 아니라 순환하는 것이다. 대지의 열기와 함께 흐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