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보도지침>은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때는 198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두환 정권시절 정부 당국이 언론사에 정치 경제 사회 문제를 특정 방식으로 보도하라는 지침을 내리고 정부의 의도에 맞게 기사를 쓰도록 강요했다. 이에 언론사들은 취재한 기사들의 보도가치와 상관없이 정권을 비호하는 기사를 발행하는등의 언론 조작이 일어났다. 보도지침은언론사 상부를 통해 은밀히 하달되었지만 1986년 한국일보의 김주언 기자가 월간 '말'지에 이를폭로하며 세상에 알려진다. 이 보도로 인해 한국일보 김주언 기자와 월간 말지의 편집자는 고발을 당하게 된다. 연극은 이 고발 사건을 다룬 재판장을 주 무대로 전개된다.
1986년 발간된 <말>지 특별호 (c) 한국사 총설 DB
연극은 재판장에서 시작된다. 재판장에는 보도지침을 폭로한 두 명의 기자, 변호사, 검사, 판사 그리고 멀티 역할을 맡은 여자 남자가 등장한다. 이 법정에서 논쟁을 벌이고 있는 이들은 대학시절 연극 동아리원으로 설정되어 있다. 연극 무대는 법정이기도 하지만 과거의 연극 동아리방이 되기도 한다. 법정에서의 마지막 대사가 현재 법정 장면의 첫 대사가 되기도 하고 법정의 마지막 대사가 과거의 첫 장면이 되기도 하면서 과거와 현재가 되풀이된다.
실제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다고 해서 사회적, 정치적 이슈를 다룰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동아리 연극반이라는 과거의 설정을 통해 이 법정에서의 논쟁하고 있는 사건이 과거와도 연관이 있음을 보여주어서 흥미로웠다. 딱딱한 법리 논쟁을 벌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법정에서 저마다의 주장을 하는 사람도 한 명의 사람이며, 각 인물마다 살아온 배경과 가치관, 경험치, 그리고 미래에 대한 전망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결국 통치도, 법도, 정의도 모든 것은 사람이 하는 일이며, 사람에 대한 일이라는 것을 법정과 동아리 방의 설정을 통해 보여준다.
보도지침을 고발하여 기소당한 두 명의 언론인 피고인과 이 피고인을 변호하고 있는 변호사뿐만 아니라 법정에서 기득권의 논리만 주장하며 그 외의 말은 들으려 하지 않는 검사, 기계적 중립을 지키려는 판사 모두는 대학시절 연극 동아리에서 본래의 자기로 살고 싶었던 인물들이다. 오로지 자식의 성공만을 바라는 부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기만의 글을 쓰고 싶었던 가난한 청년, 부자로 자라온 덕에 보호받았지만 알을 깨고 세상으로 나아가고 싶었던 청년, 눈으로 목도한 폭력을 글로 쓸 수 없다면 펜을 꺾어 버리겠다는 패기를 지닌 젊은 기자. 한때 자유를 위해 투쟁했지만 권력의 무도함에 상처받은 중년의 교수, 각기 저마다의 사연을 가진 인물들은 연극을 통해 무언가를 찾고 싶고, 무언가를 표현하고 싶고, 무언가가 되고 싶었다. 그들이 바랬던 것은 무엇일까?
연극은 왜 시대의 희망인가?
연극 중간마다 동아리원들은 "연극은 시대의 정신적 희망이다!!!"를 외친다. 이들이 외치는 연극은 단순한 '연극'이라는 방법이 아니다. 이 연극에서는 '독백'을 중요하게 다룬다. 연극 <보도지침>에서는 실제 사건이 폭로된 잡지 매체인 월간 <말>지의 제목이 월간 <독백>이라는 제목으로 바뀌어 전달된다. 그리고 연극 동아리에서는 독백의 중요성과 힘에 대해 공부하고 연습한다. 마지막 최후 변론도 독백으로 이루어진다. 그 독백에서는 각 캐릭터들이 과거를 통해 만들어진 자신의 신념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그것을 지켜내기 위한 현재의 아픔을 드러낸다. 그리고 미래에 대한 태도를 선언한다.
연극에서 '독백'이란 배우들이 홀로 말하는 것이다. 상대역과 함께 하는 대사가 아니라 속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배우의 심리를 표현하는 방법에는 표정, 제스처, 상황적 맥락, 상대에게 하는 말 등이 있지만 그것으로 표현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독백이라는 요소를 가지고 있다.
독백이야 말로 연극적이다. 연극 속에서만 독백의 조건이 성립되기 때문이다. 독백이야 말로 진실하다. 자기 목소리로 자신이 겪은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독백이야 말로 힘이 있다. 비밀스러움이 간직하고 있는 에너지의 폭발력이 있기 때문이다. '실은...'이라고 말했을 때 모두는 귀를 기울이게 된다. 독백을 할 때는 누군가 말을 끊거나 참견하지 않는다. 독백을 할 때는 모두는 침묵한다. 독백이 끝날 때까지.
연극 <보도지침>의 외침처럼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은 '연극'일지도 모르겠다. 나의 이야기를 할 '무대', 너의 이야기를 들을 '침묵'이 필요하다. 이야기는 진실해야 하며 듣는 이는 온 마음을 다해 경청해야 한다. 이것이 독백의 조건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일종의 독백이다. 글을 써서 보여준다는 것은 무대 없는 연극이다. 진심을 담은 글에는 힘이 있다. 마음을 흔드는 힘이 있다. 굳은 마음에 틈을 내는 힘이 있다. 글을 계속 써야 할 이유를, 진심을 써야 할 이유를, 온 마음으로 들어야 할 이유를, 침묵해야 할 이유를 다시 한번 새긴다. 표현하며 살고 싶다. 제대로 보고 제대로 들으며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