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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그루 Nov 18. 2023

두 사람

17년 동안 절임배추를 보내면서 어떤 노하우가 생겼다.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농장에서 배추를 하다가, 절여다가, 깨끗하게 세척해가지고, 꼼꼼하게 포장해서 보내더라도 가는 도중 사고가 나거나(박스가 터지거나) 물량이 너무 많아 하루정도 늦게 도착하는 경우가 사실상 비일비재하다.


내가 어렸을 때는 엄마가 혼자서 주문을 받았는데, 양념준비 다 해놓고 여러사람이 우르르르 배추만 목빠지게 기다린다. 배추가 안 온다고 엄마에게 전화를 해서 욕을 하고, 양념버리니까 물어달라고 하고 아주 난리였단다. 엄마는 엉엉울면서도 매일 배추를 절이고, 매일 주문을 받았다.


이런 일이 10년이 넘어가니, 몇 해 전부터는 꼭 김장하시기 하루 전날 도착으로 주문해달라고 사정사정한다. 우리뿐 아니라 이제 제법 많은(아마도 대부분의) 절임배추 판매자분들이 그렇게 설명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말을 안 들으시는 분들이 계신다. (이 글을 쓰는 와중에도 방금 통화한 한 분이, 도착하는 날 낮에 김장을 하신다고 꼭 그때 받게 해달라고 하신다)


특히 금요일과 토요일은 전국적으로 물량이 피크다. (다음주와 그 다음주가 더 심할텐데)


아니나다를까 어제 택배사에서 전화가 왔다. 두 분의 배추가 각 한 박스씩 터져서 재포장을 하다가 차를 놓쳤다고, 그 한 박스씩은 바로 못 들어갈거란다.


환장할 일이지만 이럴때를 대비해서 하루정도 여유를 두고 주문을 받은 것이다. 두 분께 전화를 드린다.


첫 분은 절대 안된다고 하셨다. 이미 다 펼쳐놓고 양념을 만들기 시작하셨단다. 그래서 저희가 받으신 다음 날 하시라고 꼭 부탁을 드렸는데, 라고 말씀을 드려도 고객과 약속을 했으면 꼭 지켜야지 무조건 오늘 받게 하라고 하신다. 그 뒤로도 뭐라고 뭐라고 하셨다. 사실 그 말씀이 맞다. 고객과의 약속이 맞다.


하지만 나는 속으로 말했다. 손님도 저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으셨어요. 받고 나서 양념을 만들기 시작해달라고 두 번이나 말씀드렸는데. 하지만 나는 그저 죄송하다고 하고 택배사에 전화를 해서 퀵을 요청했다.


절임배추 박스비보다 비싼 퀵비였지만 돈이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 다음부터는 좀 더 잘 말씀을 드려야겠다, 다음부터는 판매글에 고지를 더 강력하게 해야겠다, 우선 죄송하다고만 해야 했었다 등의 공부비용이었다.


그 다음분에게도 전화를 드렸다. 다행히도 그 분은 양념을 먼저 만들지 않으신 분이다. 당황하시기는 했지만 어쩔 수 없지요라고 하셨다. 정말정말 너무 감사해서 눈물이 와글거렸다.


어쨌든 마음이 좋지 않아서("고객과의 약속" 이후로), 아마도 첫주라서 물량이 아주 많지 않을때도 이 지경인데 다다음주까지 나는 어떻게 버티나, 내년에는 더 많은 양을 보낼 것인데 어떻게 해야 하나 이런 생각을 하느라 속이 상해있는데 고객님들의 귀여운 연락들이 도착한다.


세상에. 내가 너무 애정하는 한 고객님은 정말 자주 예쁜 꽃사진을 보내주시는 분인데 절임배추 후기도 너무나 사랑스러우셔서 빵긋 웃고 말았다. 매말라서 금이 가던 기분이 많이 말랑해졌다.



오늘 아침에 눈을 뜨니 6박스 중 1박스만 도착하지 않았다는 연락이 왔었다. 찾아보니 문제의 그 '군포터미널'(위의 두 분도 저 터미널에서 사고가 났다)에서 사고가 난 것이다. 이쪽은 아예 연락도 없었네, 하면서 사고사실과 오늘 받으실 거라는 안내를 드렸다.


당황스럽고 너무 죄송한 나와는 다르게 오히려 나를 위로해주시는 쿨한 나의 고객님. 너무 사랑스러워서 달려가 꼭 안아드리고 싶었다.


오른쪽은 우리 엄마가 작년 크리스마스를 위해 구입한 셀프 생일선물이다(엄마는 크리스마스에 태어났다). 왼쪽은 우리 고객님이 추운 날 절임배추하느라 고생많다고 깜짝선물로 보내주신 것인데 어젯밤에 받고 진짜 많이 감동했다.


한두건의 클레임만으로도 너무 지치고 힘든 쿠크다스멘탈인 나인데, 사실 그보다 훨씬 더 감사하고 사랑스러운 많은 분들이 계시다는 걸 안다.


아침에 그런 영상을 봤다. 엄마가 딸에게 부정적인 생각을 지우는 방법을 가르치는 영상인데, 깨끗한 물속에 초코우유를 조금 따랐더니 곧 뿌얘졌고, 이것을 다시 맑게 만들기 위해 깨끗한 물을 열심히 붇는 내용이었다.


어제의 내 기분이 딱 그랬다. "고객과의 약속"으로 너무 우울했던 내 마음이 그 보다 훨씬 크고 맑은 마음들로 채워졌다. 정말 감사한 일이다.


매일매일 감사하다고 최면을 걸었더니 정말 감사한 일들이 많이 생긴다. 오늘도 내일도 감사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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