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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그루 Feb 12. 2024

월급 대신 사업자등록증을 선택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 딱 10년 전의 나에게 어울리는 말이다.


도시에서의 취직이 아닌 시골행을 결정하면서 마지막 한 학기 남은 대학생활은 학점에 상관없이 듣고 싶은 수업을 듣고 만나고 싶은 사람들을 만나며 보냈다. 자연스럽게 자신감이 채워졌고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대학생때부터 블로그를 열심히 했는데, 하루에 수 천명씩 방문하는 기간이 길어졌다. 시골에서 농사짓는 부모님의 구기자나 대파 등을 블로그에 올렸고, 학교를 다니면서 농산물을 판매했다.


이런 상황에서 진도에 내려갔으니 당장의 내가 집안에 엄청난 보탬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나의 현실을 깨닫기까지는 반 년도 걸리지 않았다.


그 때 나는 농사를 잘 짓는 것도, 그렇다고 판매를 잘 하는 것도 아닌, 그저 대학생티를 벗지 못 한 애송이였다.


다 같이 고구마를 심는데 내가 심은 줄의 고구마만 다 죽어버리거나, 다 같이 고추나무에 활죽을 꼽아주었는데 태풍이 왔을 때 내가 작업한 고추나무들만 다 날아가버렸다.


엄마는 처음 해보는 일이니 그게 당연하다고 했지만 아빠는 달랐다. 쓸데없는 놈, 천하의 멍청한 놈이라고 소리지르며 욕했다. 아빠를 꼭 닮은 나는 함께 맞서서 소리를 질러댔다.


와중에 내가 대단한 무언가라도 되는 줄 알고 부모님께 월급을 받을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우리 엄마는 "니가 좋아 내려와놓고 무슨 월급?" 이라 했다. (사실 그 말도 맞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따박따박 월급을 줄 수 있을 정도로 부모님의 형편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집에서는 눈만 마주치면 으르렁대는 아빠와 하나둘씩 졸업해서 취업을 하는 도시의 친구들을 보면서 그렇게 높았던 자신감이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진짜 다시 올라가야 할까?'

'도시에 가면 지금보다는 더 행복하지 않을까?'


어느 날, 그런 내게 엄마가 말했다. 바람 쐴 겸 교육이나 듣고 와라.


전국의 각 지역마다 '농업기술센터' 라는 기관이 있는데, 농민들에게 기술을 전수해주고 필요한 사업을 지원해주는 기관이다. 엄마는 집도 가까운 진도군농업기술센터에 가서 교육신청이나 해보라고 했다.


어차피 집에 있으면 아빠에게 욕이나 먹을 뿐 아니라 '뭐라도' 하고 있다는 자기위로가 필요했던 터라 주저없이 진도군농업기술센터로 향했다.




생전 처음 진도군농업기술센터에 찾아간 날. 그 날, 나를 바라보던 수 많은 시선들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지금이야 청년농부들이 전국단위로 쏟아지고 있지만 그 때(2015년 1월)는 내가 진도읍내 사거리만 지나가도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힐끔거리며 쳐다볼 정도로 시골의 청년들이 귀했다.


막 내려왔는데 교육을 듣고 싶어 찾아왔다는 내 말에 순식간에 네다섯명의 공무원선생님들이 다가왔다. 언제 어디에서 어떤 교육들이 있고 어떤 내용인지 아주 친절하게 말씀해주셨다.


그러다 우연히 전라남도농업기술원에서 주관하는 청년농부 창업경진대회를 알게 되었다. 대학교 졸업식도 치르기 전이었지만 수 많은 선생님들의 전폭적인 지지에 힘입어 얼떨결에 신청하게 되었다.


평생 창업을 하겠다는 생각도 없었던 내가 우연한 계기로 창업아이템을 만들어야만 했다. 그 때 또 엄마가 제안해주었다. 진도에는 농산물도 많고 수산물도 많으니 천연조미료를 만들어보는 게 어때?


우리 엄마는 맛의 고장 전라도에서도 인정받을 정도로 요리솜씨가 매우매우 뛰어난 편이었는데, 집에서 쓰는 조미료들로 마트에서 파는 합성조미료가 아니라 천연재료들을 손수 갈거나 우려내서 사용하셨다.


마침 우리 할머니의 성함이 허'양념' 인 것도 좋은 스토리텔링의 도구인 것 같아서 정말 얼떨결에 '천연조미료' 로 창업대회에 신청했다.


1차 서류가 통과해버리고(내 전공이 '경영' 이었던 것과 당시 진도군농업기술센터 곽성민 선생님께서 같은 곽씨라고 유난히 더 신경써서 서류를 봐주신 덕에) 한 달 동안 일주일에 한 번씩 전남농업기술원에서 창업교육을 들었다.


지금보면 너무나 창피한 수준의 사업계획서였다. 그 때 너무 많이 혼나서 중간에 포기하겠다고도 하고 울기도 많이 울고 담당선생님께 회유와 협박(?) 섞인 전화도 받고 참 난리였다.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겨우겨우 턱걸이로 붙어서 1,600만원의 사업비를 받게 되었다. 자부담 400만원도 필요해서 아빠에게 빌렸다. 난생 처음 생긴 빚이었다.


그 때부터 아주 정신없는 일 년을 보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업자등록이라는 것을 해보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천 만원이 넘는 돈을 써보고(지원사업비였지만), 태어나서 처음으로 계약서에 사인도 해보았다.


거의 매일 최상의 재료를 찾기 위해 산골자기의 버섯농부 할아버지를 찾아가기도 하고, 대한민국에서 물살이 가장 센 진도답게 수산물이 쫄깃하고 향이 좋아 여기저기 어부님들을 찾아다니기도 했다.


그렇게 일 년 가까운 시간동안 창업자로서 돈을 벌었다. 많이 부족하고 많이 어설펐지만 열정만은 가득해서 전국의 모든 곳을 다녔다. 불러주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갔고 TV 방송과 신문 인터뷰도 열심히 나갔다.


농업을 전공한 것도 아닌 어린 여자아이가 시골에서 농업으로 창업했다는 이유만으로 나는 수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이 나의 가장 큰 약점이 될 줄은 그 때는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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