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2학년을 마치고 일 년 간 휴학을 했는데, 친구들처럼 어학연수를 간다거나 자격증준비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잠시 나의 대학이야기를 해보자면 100% 문과체질이었던 내가 별 생각없이 고등학교를 이과로 졸업하고 대학입학도 이공계열로 들어갔다.
학부가 끝나고 전공을 골라야했는데 뜬금없이 무역쪽을 고르게 되었고, 또 뜬금없이 경영학을 복수전공하면서 나의 대학생활은 깊이보다는 문어발처럼 넓어지기만 했다(지금 생각하면 차라리 끝까지 이공계열에 남아서 '농업'을 전공했더라면 싶다).
이렇게 뒤죽박죽 엉망진창인 상태로 졸업하는 것은 그야말로 대재앙이었다. 고등학생때도 깊게 해보지 않은 진로고민을 위해 부모님께 말씀드리지도 않고 대학교 2학년을 마치자마자 휴학신청을 해버렸다.
사회인(혹은 백수)으로서는 가질 수 없는 시간이기에 나에게 일년간의 선물을 주었다. 일명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이었고 목표는 '곽그루는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아내는 것이었다.
누군가는 고시급 자격증도 없이, 어학연수 경험도 없이, 인턴경력도 없이 보낸 헛된 시간이라 욕할수도 있다(실제로도 흉을 들었다). 하지만 지금도 내 인생에서 가장 반짝반짝 빛나고 단단했던 시간이라 자부할 수 있다.
난생 처음 아르바이트도 해보고, 난생 처음 혼자 여행도 가보고, 난생 처음 원없이 읽고 싶은 책들을 읽었다. 아, '유통관리사'라는 자격증도 땄고, 운전면허도 무려 1종 보통으로 땄고, 영어공부도 해서 오픽 IH등급도 받아두었으니 그저 '놀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이렇게 실컷 놀면서 자존감이 아주 높아졌다. 부모님의 눈치, 주변사람들의 '카더라'에 휩쓸리던 내가 정말 난생 처음 혼자 결정하고 혼자 선택하고 스스로 받아들이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너무 좋아서 휴학을 1년 더 할까 고민했었고, 복학해서는 휴학전도사가 되었다).
내가 이렇게나 오랫동안 휴학시절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그 시간이 없었으면 지금의 내가 없을거라 확신하기 때문이다. 이것저것 많은 것들로 채운 시간이었지만 가장 많은 애정을 쏟은 것이 '블로그'였다.
일명 '깡총'이의 블로그에 휴학생활동안의 이야기들, 부모님이 계신 진도와 농장의 이야기들을 부지런히 올렸다.
한 번은 이웃삼촌이 보리를 베다가 엄마고라니가 아기고라니를 낳다가 놀라서 도망간 적이 있었다. 삼촌은 덩그러니 혼자 남겨진 아기고라니를 우리집에 데려다주었다(아마도 우리집 식구들이 다들 동물을 좋아해서 그런 것 같다).
우리는 젖병으로 우유를 먹여주고 '라니'라는 이름도 붙여주며 애지중지 돌보았다.
(지금보면 너무너무 촌스러운 블로그사진들)
당연히 이 이야기를 블로그에 올렸는데, 어느 날 <여섯시 내고향> 작가님께서 아기고라니를 촬영하고 싶다고 연락을 주셨다.
이 날 촬영은 실시간으로 진행되는 '라이브'였기에 평소와 달리 라니가 돌아다니지 못하게 방에 가둬두었다. 하도 낑낑거리는 라니가 불쌍해서 잠깐 놀다오라고 밖에다 풀어주었다.
그런데 이게 왠 일인가! 평소라면 논 한바퀴 돌고 돌아와야 할 라니가 방송시간이 다가워져도 돌아오지 않는 것이다!!
내 인생 첫 <여섯시 내고향>을 이렇게 망칠수는 없는데! 식구들은 모두 내게 화를 냈다. 나도 정말 할 말이 없었다.
정말 천만다행으로 방송시간을 십여분 정도 남겨두고 라니가 돌아와주었다. 다행히 라니와 함께 방송촬영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가정에서 고라니를 키우는 것은 불법인 것을 모르냐는 항의문의가 몇 건 왔었다...)
라니는 우리집에게, 특히 내게 정말 큰 복덩이다. 라니와 출연한 <여섯시내고향>을 본 수 많은 방송사와 신문사, 잡지사 등에서 연락이 왔다.
그 이후 <아침마당>과 (무려)<인간극장), <한국기행> 등 정말 많은 방송에 나오게 되었다. 지금까지 나간 방송만 50개가 넘을 것이다.
지금이야 '청년농부'가 쏟아지듯 나오고 있지만 2015년에는 젊은 사람이, 그것도 아가씨가 농사를 짓는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엄청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시절이었다.
청년농부컨셉으로는 거의 독점적으로 많은 촬영을 하게 되었고, 덕분에 직거래손님들도 연간 수천명으로 늘게 되었다. 공모전과 사업발표에 나가도 방송의 힘과 청년농부라는 '컨셉'의 힘을 빌어 비교적 쉽게 합격하였다.
뭐야, 쉽잖아.
상도 많이 받고, 방송도 많이 나가고, 알아보는 사람도 많아지고, 강의도 많이 하게 되면서 나는 점점 맛탱이가 가고 있었다.
당시 아빠의 걱정섞인 말씀대로 '빈 수레가 요란한 깡통'이 되어 본질을 채울 생각은 하지 않고 이 모든 기회들이 마치 모두 나의 능력과 공인것마냥 허세를 부리기 시작했다.
공모전에서 떨어지는 사람들, 상을 받지 못 한 사람들, 방송에 나가지 못한 사람들, 강의를 하지 못 하는 사람들을 은근히 무시하고 있었다. 자리에 나가서 누가 나를 알아보는 것이 당연한 것이 되었고, 누군가 내게 먼저 인사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 되었고, 내가 판매하는 것이 곧 완판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 옛날, 하늘이 우리 엄마를 도와 '미니홈피'덕분에 힘을 준 것처럼 내게도 라니와 블로그를 통해 힘을 주려던 것을 단단히 잘못 받아버렸다.
정말 말그대로, 나는 아주 급격히 맛탱이가 가고 있었다.
참고로 라니는 성인이 되어 독립을 하였지만 아빠말에 따르면 한 동안 새벽마다 찾아왔었다고 한다. 지금도 아빠는 풀숲을 볼 때마다 라니야, 하고 괜히 안부를 건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