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어두운 부분은 가장 밝은 곳과 맞닿아있다고 했다. 지난 10년 중 가장 우울했던 2년의 시간을 돌아보면 역시나 맞는 말이다.
진도에 내려오자마자 블로그와 여러 방송의 기회 덕에 나름 이쪽(?)에서는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공모전에 나가서 수상을 하거나, 여러차례 장관상을 받거나, 판매하는 농산물들이 완판하게 되는 것이 마치 내가 너무나 잘나서, 그게 당연한거라 여기게 된 시간들이 있었다.
2017년에 새정부가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청년농업인을 육성하는 지원사업이 생겼고, 여기저기서 청년농부 단체들이 생겨났다. 이전까지는 가뭄에 콩나듯 귀했던 청년농부들이 말그대로 쏟아지고 있었다.
나보다 훨씬 더 어리고 나보다 훨씬 더 예쁘고 무엇보다 나보다 훨씬 더 '진짜 농부'에 가까운 사람들이 수 백명씩 나타났다.
'진짜'들이 나타나면서 요란하기만 한 나의 '거품'은 스르륵 사라지고 있었다.
한창 콧대가 세던 내게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텅빈 수레가 요란하다고 했는데 지금 네 꼴이 딱 그렇다. 본질을 채워야 하는데 너는 겉치레만 요란하구나.
우리 아빠는 여기저기서 내 이름이 나오고 내가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날수록 더더욱 조심하기를 바라셨다. 그럴수록 농사에 대해서, 마케팅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한다고 하셨다.
하지만 나는 아빠의 바람처럼 땅을 공부하고 마케팅을 연구하기 전에 사람들을 만나 마치 내가 그럴싸한 전문가라도 된 것처럼 떠들기 바빴다.
그런 내가 '진짜 농부' 청년들이 나와서 자신만의 농법을 정립하고 순식간에 수 천명의 팔로워를 만들어 브랜드를 만드는 모습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저 사람들 정말 멋지다. 정말 잘 한다.
라고 생각한 것이 아니다.
저 사람은 부모를 잘 만나서 이미 처음부터 부자였을거야. 저 사람은 얼굴도, 몸매도 예뻐서 관심을 더 받는거야. 저 사람은 서울과 가까운 곳에 살아서 더 잘 된거야.
그들의 장점을 인정하고 배우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까내리기에 바빴고 심지어 이 불만의 끝을 가족들에게 몰아세우기 일쑤였다.
아빠와 싸우는 일이 더 많아졌다. 엄마의 눈치를 보는 날이 더 늘어갔다. 맞는 말 만 해서 뼈를 때리는 동생은 내게 '캐릭터빨이 떨어졌다'고 했다. 정말 맞는 말이었다.
나같이 못난 사람들이 우울한 이유는 하나였다. 그 당시 나의 불행은 다른 곳이 아니라 내 안에서 내가 만드는 것이었다. 내가 가진 것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끊임없이 비교하면서 내 스스로를 갉아먹고 있었다.
한 동안 숨만 쉬어도 심장이 뻐근할 정도로 답답하고 이유없는 불안으로 잠이 오지 않았다. 하루종일 무기력하고 눈물만 툭 나왔다. 지금 생각하면 일종의 우울증이었는데 그때는 혼자서 유난도 심하게 떤다고 자책만 했다.
정말 다행으로 내게는 그나마 한 줌의 희망이라는 것이 남아있었다. 언제나 이렇게 이불 한 구 석만 적시며 웅크려 있을 수는 없다!
이런 기특한 결심을 하게 된 것도 가족들 덕분이다. 당시에는 잔소리만 하는 사람들, 내가 농사를 짓게 만든 사람들, 부담을 주는 사람들이라며 원망도 했었는데 결국에는 이 사람들 덕분에 다시 일어나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결심을 하고 가장 먼저 한 일은 내가 속해있던 농부단체들부터 나오는 일이었다. 나는 찌질한 사람이라 가까운 곳에서 나보다 잘 된 사람들을 보면 속이 안 좋아지는 것을 겸허히 인정했다.
그럼 그 사람들을 안 보면 되는 것 아닌가? 자꾸 남과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것들중에서 결과를 내보기로 했다.
그 다음으로 했던 일은 우리가 하고 있는 수 많은 농작물 중에서 '선택과 집중'을 하는 일이었다. 나는 경영을 전공한 사람이 아닌가? 당시 우리 농장은 한 해에 스무가지가 넘는 다양한 채소와 잡곡을 키우고 있었는데 이는 참으로 비효율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오랜 기간 아버지를 설득해서 '고추'에 집중하기로 뜻을 모았다. 물론 이 집중작목을 선택하는 과정도 결코 쉽지 않았다(이 이야기만 곧 따로 글을 써야겠다).
고추를 선택한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가장 큰 것은 우리 농장의 가장 큰 무기인 '고객과 신뢰' 때문이다. 마음을 다잡고나서 "우리의 본질은 무엇일까?"라는 고민을 참 많이 했다.
우리 농장이 직거래를 시작하게 된 이유를 생각하다가 '고객과 신뢰'라는 정답을 얻었다. 고추는 상대적으로 가격과 상관없이 정말 믿을 수 있는지가 중요한 품목이었기에 선택했다.
그 동안은 부모님이 정한대로만 따라갔는데 내가 직접 선택을 했다는 그 자체만으로 나의 자존감은 정말 많이 올라갔다.
내가 설계한 '고추농사'만 계획대로 잘 되어주었더라면 앞으로도 계속 좋았을텐데 말이다.